제 6화 - 입궁 (3)
운명의 실타래의 끝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서화의 소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재간택 또한 통과하여 삼간택에 이르게 되었다. 삼간택 후보에 올라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서화는 혼비백산하였다.
' 아버님..!'
두 다리가 사시나무떨듯 덜덜 떨려왔다. 삼간택. 삼간택에 오른 세 여인 중 한 명은 중전으로, 나머지 두 여인은 후궁으로 입적하거나 다시 사가로 돌아가 평생을 홀로 살아가는 두 갈래의 길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 차라리 홀로 살다 죽는 것이 나아.'
서화는 저도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누가 볼새라 얼른 소매자락으로 훔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함께 삼간택에 오른 소저 두 명이 짐작했던 대로 좌의정 대감과 현감의 여식이었다. 그들과 견주었을 때 자신의 집안은 보잘 것이 없으니 궁궐의 웃전들께서도 주상전하께 힘을 실어드리기 위해 두 소저 중 한 분을 골라 중전의 자리에 앉히실 것이다.
' ...그리되면 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게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녁 끼니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목구멍이 까실까실한 것이 물한모금 넘기는 것도 힘이 들었다.
" 아까 잘 못 잡수시는 것 같던데...혹 어디가 미령한 것은 아닌지요?"
서화의 어깨 너머로 들리우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뒤를 쳐다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삼간택에 함께 오른 현감의 여식 조인경이었다. 온화하고 웃는 모습이 해사한 것이 처녀 간택에 처음 온 순간부터 중전의 자리에 진정으로 어울릴만한 소저라 생각했던 서화였다.
그런 그녀의 한 마디에서 따스한 마음씀씀이가 느껴져 서화 또한 옅은 웃음기를 띠며 답했다.
" 아... 아닙니다. 그저 긴장이 되어..."
" 저도 그러하답니다. 밤에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집에 계신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이 나 도통 잠에 들 수가 없어요."
인경이 서화의 곁으로 가까이 걸어오며 말했다.
" 삼간택을 치루고 나면...우리의 갈길이 정해지겠군요."
" 그러한...것이겠지요."
" ...전하의 여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느닷없는 인경의 질문에 서화는 말문이 턱-막히고 말았다.
" ..."
" 후훗... 답을 못하시는걸 보아하니 소저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신가보군요."
" 그럼...소저께서도 댁으로 돌아가고 싶으시단 말씀이십니까?"
서화가 인경에게 물었다.
" 이리 말하면 부모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경을 치셨겠지만...예. 저도 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
" 어쩔 수 없이 아버님의 뜻에 따라 이곳으로 왔지만...저는 궁궐에 살며 전하의 사람이 되는 것이...무섭고 두렵습니다."
사실이었다. 대비 조씨의 친척인 아버지는 인경 자신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만들고 싶어했다. 대비에게 몇번이고 찾아가 자신의 여식을 잘 보아달라며 청을 하고, 싫다며 눈물바람인 인경과 그녀의 어미를 호되게 꾸짖어가며 결국엔 간택에서 사용하라며 각지에서 구한 귀한 패물과 고운 비단옷까지 챙겨 궁궐로 들여보낸 그였다.
집으로만 돌아가고픈 두 소저는 아무말 없이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 우리...함께 한 곳에 남게 되던, 따로 다른 곳에서 살아가게 되던 벗이 되는 것은 어떠할련지요?"
인경이 수줍은 얼굴로 서화에게 물었다.
" 벗이요?"
" 예. 부끄럽지만 저는 아직 벗이라 부를 만한 친우가 없습니다. 하지만 소저와는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어색하지 않고 마음이 편합니다. 이런 저의 벗이 되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 저는 좋습니다."
이 드넓은 궁궐에서 불안한 마음이 눈 앞의 벗으로 인해 조금은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드러운 성품의 인경을 바라보며 서화는 다시 한 번 그녀야말로 중전의 자리에 어울리는 분이라 생각하며 불안감을 살짝 내려두고선 좋은 벗을 얻은 기쁨을 인경과 함께 누렸다.
***
삼간택을 치루는 날.
궁궐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와 대비와 마주하여 치루는 간택.
세 소저들은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대왕대비와 대비에게 절을 올렸다.
" 소저는 누구의 여식이오?"
대비의 질문에 좌의정의 여식 최수연, 인경, 서화가 차례로 답하였다.
좌의정의 여식의 복식은 어찌나 화려한지 마치 벌써 중전의 자리에 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대왕대비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한참을 응시하다 시선을 원래대로 돌려 입을 열었다.
" 그럼 삼간택의 최종 질문을 하리다. 소저들께선 편하게 마음먹고 답해주길 바라오."
" 예, 대왕대비 마마."
세 규수들이 입을 모아 답하였다.
" 소저들께서 생각하는 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꽃은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대왕대비의 말에 좌의정 여식이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제가 먼저 답하여도 되겠사옵니까, 대왕대비 마마."
" 그리하시오. 규수께선 어느 꽃이 가장 아름답다 생각하시오?"
" 소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모란이라 생각하옵니다."
" 모란이라면 목단이 아닌가. 그리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이오?"
이번엔 대비가 물었다.
" 모란은 꽃들 중의 제왕이 아니옵니까. 하여 오직 중궁전에서만 심을 수 있는 꽃이라 들었습니다. 그 크기도 매우 크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는 것이 일품이라 생각하여, 소녀는 모란이 제일 아름답고 귀하다 생각하옵니다."
좌의정 여식 최수연의 말에 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이번엔 현감의 여식이 답해보시오. 소저께선 어느 꽃이 가장 아름답다 생각하시오?"
" 소녀는 해당화가 가장 아름답다 생각하옵니다."
" 어찌 그리생각하시오?"
" 해당화는 보기에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향기 또한 곱고 아름다워 해당화의 꽃잎으로 차를 달여마시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몸을 맑게 해준다 들었사옵니다. 이러한 꽃이야말로 눈과 마음, 그리고 머리를 즐겁고 개운하게 해주니 인간에게 이로우며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런지요?"
" 오호...소저의 말씀이 일리가 있구려."
대왕대비가 웃으며 말했다.
" 그럼 이번엔 소저가 답할 차례오. 소저께선 어느 꽃을 마음에 두고 계시오?"
대비의 질문에 서화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 소녀는..."
떨림이 차마 그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와 함께 묻어나왔다. 이에 당황한 서화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 호호...괜찮소. 마음 편히 답해보시오."
대왕대비의 인자한 목소리에 서화는 다시 입을 열었다.
" 소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생각하는 꽃은...바로 민들레이옵니다."
" 민들레라...그 연유가 무엇이오?"
" 민들레는 버릴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이 몸에 좋다고 들었사옵니다. 꽃은 통으로 꺾어 차로 달여 마시면 몸의 어혈을 풀어주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들었사옵니다. 또한 줄기와 뿌리는 꽃머리와 더불어 약재로도 쓰이며 비록 입에는 쓰나 허한 몸의 원기를 달래고 기운을 북돋는데 좋다 들었습니다. 전쟁을 치룬지 10여년 밖에 되지 않아 아직 몸이 아픈 이들이 많고 나라살람이 풍족치 않은 작금에 이야말로 백성들에게 이로운 꽃이 아닐런지요. 백성들이 행복해야 나라가 행복하니 백성들의 건강에 이로운 민들레꽃이 가장 장하고 아름답다 생각하옵니다. 또한 민들레는 지천에 널려있어 구하기 쉬워 백성들이 큰 수고를 하지 않아도 구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꽃이 아니겠나이까."
서화의 말에 대왕대비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 참으로 현명한 답이오. 백성들의 안위까지 생각하다니...참으로 장한 답이오."
' 윤 소저야말로 중전의 자리에 어울리는 이가 아닌가.'
그 후로도 얼마간의 질문과 답이 오간 뒤 세 명의 소저들은 머무르는 처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 공간에 한 줄로 늘어서 앉은 세 소저들의 사이에선 갑갑한 공기만이 맴돌 뿐이었다.
그 때였다.
대왕대비전의 상궁이 교지를 받으라는 말과 함께 세 소저의 앞에 나타났다.
" 대왕대비전의 교지오. 좌찬성 윤성한의 여식 윤가 서화는 중전으로 책봉하고, 좌의정 최경주의 여식 최가 수연과 현감 조석현의 여식 조가 인경은 종1품 귀인에 책봉하노니 주상전하와 종묘사직을 지키는 데에 한치의 불경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
상궁의 말에 좌의정의 여식이 서화를 노려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분한 것인지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복잡하였다.
" 경하드리옵니다."
상궁과 나인들이 세 규수 앞에서 허리를 구부리며 말했다.
서화는 울음보가 터질 듯한 참담한 얼굴로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디기 힘든 듯 눈을 꾹 감아버리고 말았다.
' 끝났어...이젠 한가닥의 실오라기 같은 희망도 없는게야...'
굳게 닫힌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기어코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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