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화 - 입궁 (2)
이것은 필시 거짓부렁이다.
제발 누군가 나에게 이것은 꿈이라 말해주시오.
중전 간택을 위한 규수들을 위해 거처가 마련된 별당의 한 구석에서 서화는 얼이 빠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대왕대비의 믿기지 않던 재간택 후보들. 당연히 자신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아버님..."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무뚝뚝한 성정이시지만 그 안은 사실 너무도 따뜻하고 인자한 분. 자신이 돌아오지 않아 내색하진 않아도 속으로 이만저만 걱정하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서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아직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있다.
좌의정 여식과 현감의 여식이 있으니 자신은 아버지와 유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늘에 휘영청하니 뜬 보름달은 서화의 우울한 마음을 위로하듯 밝게 비추었다.
***
" 그래, 내 알아보고 오라던 것은 어떻게 되었느냐?"
" 전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재간택에 오른 소저들 중에는 좌의정 최경주의 여식 최수연, 현감 조석현의 여식 조인경이 포함되어 있었나이다."
" 내 예상이 옳았군."
임 상선의 말에 윤은 입꼬리의 한쪽을 올리며 피식-하고 바람새는 웃음을 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였다.
" 임금을 자신의 손바닥에 놓고 쥐락펴락 할 만큼의 세도가의 좌의정과 어마마마를 등에 업은 현감이라. 서로 자신의 여식들을 중전의 자리에 올려놓겠다며 다투는 꼴이 제법 볼만하겠구나."
윤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 잠시 바람 좀 쐬어야 겠다."
" 어디로 뫼실까요, 전하."
임 상선이 나직이 말했다.
" 천월각으로 가겠다. 그리고 오늘은 혼자 조용히 걷고 싶구나."
" 하지만 전하!"
" 내금위장과 함께 가겠다. 이 나라에서 가장 무예가 최고로 출중한 이와 함께인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니 내 말에 따르거라."
" ...알겠사옵니다, 전하."
" 시운아. 가자꾸나."
윤이 내금위장 홍시운을 부르자 구름 모양이 새겨진 운검을 든 그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천월각으로 향하는 두 사람.
" 이렇게 너와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 ..."
" 우리가 어렸을 땐...제법 많은 시간을 자주 함께 보냈는데 말이다."
" ..."
" 거 참. 말도 많은 놈이, 그렇게 입 꾹 다물고 내가 하는 말만 듣고 있으면 좀 쑤시지 않느냐?"
" 황공하옵니다, 전하."
" ...너는...나의 유일한 벗이다. 내 얼굴 위에 씌워진 두꺼운 가면을 내려놓고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란 말이다."
" ..."
" ...싫다. 그 사람이 웃으며 나를 맞이하고, 함께 보냈던 추억이 만연한 그곳에 새로이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무리 종묘사직이 중요하다 한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단 말이다. 평생 다른 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상상조차 할 수 없단 말이다."
윤의 말에 내금위장 홍시운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 아무리 그 사람과 비슷한 이를 취해도 이 그리움이 사그라들지를 않는다. 오히려 그이의 얼굴이 더욱 또렷이 선명해지는구나. 나는 어쩌면 좋으냐...?"
" 전하."
" 알고 있다. 나는 한 사내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주인임을. 나의 사사로운 감정보단 나를 따르는 백성들을 위해 이성을 잃지 않아야함을 내 잘 알고 있다. 보름달의 농간인가. 그동안 켜켜이 먼지가 새카맣게 쌓이도록 숨겨온 내 본심이 자꾸만 밤의 어둠에 기대어 흘러나오는구나."
윤은 임금의 모습이 아닌, 먼저 떠나간 지어미를 그리워하는 한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는 시운 또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함에 목구멍의 울대가 자꾸만 콕콕 쑤셔왔다.
" 쿡...내가 실성을 했나보군."
윤이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 그만 돌아가자. 바깥 바람을 쐬면서 무거운 마음 좀 털어낼까 했더니 되려 머리만 복잡해지는구나."
" 예, 전하."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주군. 양반가의 서출로 태어나 온갖 괄시를 받으며 살아왔던 유년시절. 내관의 혼이 쏙 빠지도록 조르고 졸라 궁밖으로 몰래 빠져나왔던 세자시절의 윤과 우연히 저잣거리에서 만나면서 두 사람은 친우의 연을 맺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앙상하게 말라있던 자신에게 항상 한아름 소매춤에 잔뜩 먹을 것을 가지고 나와 나누어주던 그의 주군. 그 누가 보아도 고귀한 집안의 자제임을 보여주는 그의 행색과 배우지 못한 자신 조차도 알아차릴 만큼 기품이 느껴지는 그의 어투였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벗이라 칭하며 살가이 대해준 것은.
윤이 이 나라의 국본임을 알게되었던 날, 자신과 같이 천한 존재는 더 이상 감히 그의 앞에 나설 수 없다며 모습을 감추려 했다.
" 우리는 벗이다. 신분은 중요치 않아. 사회적 제약에 우리의 우의를 저버리지 마라. 내가 아바마마의 뒤를 이어 이 나라의 임금이 된 후에 네가 겪었던 고통을 잊지 않고 더 이상 그러한 슬픔을 겪지 않도록 세상을 바꾸겠다. 그러니 나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그런 시운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 그의 말 한마디였다.
이후, 윤은 그의 숙부인 봉성대군에게 청을 하여 시운을 그의 양자로 들이게 하였고, 세자시절엔 익위사, 왕으로 즉위하고 난 후엔 그를 겸사복으로 명하여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 곁에 두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윤은 서출 또한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는 숨겨져 있던 인재가 양지로 나와 임금의 귀가 되고 눈이 되어 나라살림에 도움이 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미천한 서자 출신의 자신을 귀이 여기며 벗이라 칭하는 자신의 군주. 이 나라의 임금. 자신의 앞에 슬픔으로 뒤덮여 아픈 등을 애써 감추며 걸어가는 윤의 뒷모습을 보며 언젠간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 다짐하는 그였다.
그러던 그때였다.
우뚝-.
윤의 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
" 어찌 그러십니까, 전하?"
시운이 물었다.
" 저곳은 무얼 하는 곳이길래 평복을 입은 여인이 이 밤중에 궐안에서 있는 것이냐?"
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시운 또한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한 여인이 보름달에 시선을 빼앗긴 채 서 있었다.
" 저곳은 초간택을 통과한 소저들이 머무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 ...그렇구나."
윤이 달빛에 흠뻑 빠져있는 여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 저들 중에서 기어코 중전의 자리를 차지할 여인이 나오는게로구나."
' 누가 중전이 되든 내 그이에겐 절대로 마음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 ...전하."
" 가자."
그렇게 윤과 서화의 첫만남 각기 품은 다른 마음에 정신을 빼앗긴 채 아슬하게 비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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