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4화 (4/83)

제 4화 - 입궁 (1)

차갑고 꽁꽁 얼었던 추운 계절이 지나가고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싱그러움이 만연한 봄 날.

처녀 단자를 올린 양반가의 규수들에게 대왕대비로부터 입궁하라는 교지가 내려왔다.

비록 임금의 여색이 짙다 하나 그의 천신같은 외모와 늠름함은 능구렁이 기듯 높은 궁궐의 담을 타고 흘러나와 규수들의 귓속에 흘러들어왔다. 이에 딸을 안으로 감싸고 도느라 바쁜 아비들과는 달리 한창 꽃다운 나이의 여식들은 그 또래들이 그러하듯 임금의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을 가득 싣고선 입궁할 차비를 하기 시작했다.

" 아씨. 아씨의 얼굴에는 이 남색 저고리가 더 어울릴 것이어요."

유모가 치장도 하지 않고 분홍 스란치마에 연두빛이 도는 저고리를 입은 채 아까부터 서책을 읽고 있는 서화의 얼굴 앞에 남색 저고리를 불쑥 들이밀며 말했다.

" 그건 내 어머니가 내가 어릴 적 훗날의 나를 위해 지어주신 옷이질 않는가."

" 그러니 더더욱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입어야지요."

" 무에 좋은 날이라고. 나는 집에 돌아올거야."

" 이렇게 고운 우리 아씨가 입궁하시는데 대비마마는 물론 상감마마도 단박에 아씨께 마음을 빼앗길 것이어요."

" 실 없는 소리는 그만해, 유모."

" 우리 아씨께서 중전마마가 되신다면 이 유모, 당장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어요. 대감 마님께서도, 저 하늘에 계신 마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 그만하래도. 어쩔 수 없이 대비마마의 하명을 거역할 수 없는 노릇이라 입궁하는 것일뿐, 이번에 입궁하는 처자들의 수가 얼추 스무명은 넘는다 들었어. 나는 그저 머리수만 맞추러 들어가는 거니 너무 소란떨지 말게."

아까부터 서화의 곁에서 호들갑을 떠는 유모. 그러나 그런 유모의 모습에 서화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다.

아비인 좌찬성 대감이 말한 것처럼 삼간택에 들 경우의 수도 희박하거니와 좌의정의 여식과 대비마마의 혈육인 현감의 여식이 쟁쟁하게 겨룰 것이란 이야기를 들어 서화 자신도 크게 염려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왜 이리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것인지...

이는 결코 기쁘고 설레여서가 아니었다. 혹여라도 자신의 모든 삶이 깃들어있는 이 집을 돌아오지 못할까봐, 아비의 품을 떠나, 유모와 향의 곁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불안감에 휩싸였다.

" 아씨. 이제 나서야 할 시각이 다 되었습니다."

몸시종 향이 떠날 시간을 알려왔다. 문을 나서니 아비인 좌찬성 윤성한 대감이 서 있었다.

" 떠날 차비는 다 한게냐."

" 네, 아버님."

" 몸가짐에 신중, 언사에 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 명심하겠습니다."

가까이서 본 윤성한 대감의 눈밑이 빨갰다. 그 역시 서화처럼 걱정어린 밤을 꼬박 지새운 듯 했다.

"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거라."

당신의 여식의 발걸음이 무거운 것을 안 것일까. 윤성한 대감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버님! 소녀 꼭 돌아오겠습니다."

서화가 멀어지는 윤성한 대감의 뒷모습에 대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 네 집이 이곳인데 꼭 돌아오고 안 오고 할 것이 무어 있느냐... 무사히 돌아오거라...내 딸 서화야...'

하나 밖에 없는 여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여식. 임금을 모시는 신하된 도리로 차마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아비의 참 마음...

그는 그저 타들어가는 가슴을 애써 헛기침으로 가라앉혔다.

***

" 가마 안에 타고 계신 분은 어느 가의 여식이오?"

" 좌찬성 윤성한의 여식 윤서화라 합니다."

" 저쪽으로 들어가시오."

가마 밖으로 향이 자신을 대신해 신분을 밝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틈 사이로 살짝 훔쳐본 궁궐. 난생 처음 보는 궁궐은 너무도 웅장했다.

" 아버님.. 소녀 꼭 다시 돌아갈 것이오니 기다려 주시어요."

서화는 혼잣말을 하며 꼭 집으로 돌아가겠노라 다짐, 또 다짐하였다.

" 오랜만에 이 넓은 궁 안이 어여쁜 꽃으로 가득하니 그 향내음에 취하고 이 사람 마음이 참으로 따뜻해지는구나."

" 저도 그러하옵니다, 어마마마."

대왕대비 강씨가 규수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자 대비 조씨가 곁에서 말을 거들었다.

지엄한 이 궁궐의 가장 깊은 내전, 교태전을 차지할 중궁을 간택하는 일.

대왕대비의 눈엔 모든 규수들이 어여쁘게만 느껴졌다.

" 대비께선 마음에 드는 처자가 있으시오?"

대왕대비가 대비에게 하문했다.

" 소첩의 눈엔 그저 모두 어여쁘나이다."

대비의 말에 대왕대비가 웃으며 말했다.

" 이렇게 규수들을 보고 있으니 대비께서 입궁하셨을적이 생각나는구려. 어찌나 어여뻤던지 당시 혜종께서 대비를 보시고선 당장에 세자빈으로 맞이하겠다며 이 사람과 황조 전하(임금의 할아버지)의 혼을 쏙 빼놓았지요."

"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 대비께서 송구할 것이 무어 있습니까. 실로 참 어여뻤습니다. 그 때 대비께서 입궁했을적 이 사람 마음에도 단번에 들었구려."

" 어마마마께선 따로 마음에 두신 소저가 있으신 것이옵니까?"

" 글쎄요. 듣자하니 좌찬성 윤한성 대감의 여식이 어질고 곱다 하는구려. 그래서 눈여겨 보고 있는 중이오. 아, 이번에 대비의 고종 질녀도 처녀단자를 올렸다지요?"

사정은 그러했다. 대비 조씨는 자신의 고종 질녀를 이번 간택에 참여시켰다.

자신의 고종 사촌인 현감 조석현의 장녀 조인경을 중전으로 올리면 조씨 가문의 세력을 굳건히 하는데에도 도움이 될거니와 좌의정을 경계하고 그의 세력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어 아들인 주상에게 든든한 뒷배를 실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 예, 어마마마."

" 대비의 집안 사람이라면 참으로 어여쁘고 올곧은 사람이겠구려. 내 눈여겨 보겠소."

"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어마마마."

" 도제조를 들라하라."

" 예, 대왕대비 마마."

임금의 지어미로, 한 나라의 국모로 교태전의 자리를 흔들림 없이 굳건히 지켜낼 수 있는 여인을 고르는 자리. 가례도감 설치 후, 수많은 처녀단자를 중 성심을 다해 초간택에 오를 열댓명의 여인들이 자리한 것이 바로 금일(今日).

이마와 머리결 사이의 선은 반달의 곡선과 같이 둥글고, 매끄러운 진주처럼 부드러운 호선의 콧망울, 석류같이 불그스름한 빛깔을 뽐내는 붓으로 그린 듯한 입술, 아무런 걸림없이 아름답게 쭉 뻗은 목, 매끈하고 윤기나는 머릿결.

수많은 조건을 통해 이에 합당(合當)한 규수들을 선발하기 위해 대왕대비는 가례도감을 설치하였다. 이에 더불어 관상을  보기 위해 도제조와 제조 삼인(三人)이 대왕대비의 하명으로 규수들이 모인 예정전 안으로 들었다.

" 초간택을 행하라."

" 예, 대왕대비 마마."

도제조와 제조들이 차근차근 예정전 안에 고운 자태를 뽐내며 앉아있는 처녀들을 한 명씩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라의 종묘사직을 이끌어갈 후세의 임금을 잉태할 귀한 여인을 찾기 위해.

꼼꼼하게 살펴보는 만큼 시간도 더디게 흘러갔다. 여러시각을 미동조차 없이 꼿꼿하게 앉아있는 소저들의 눈에는 하나둘씩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앳된 소저들은 결국 앉은 채로 졸기까지 했다.

얼마나 더 흘렀을까.

" 심사를 모두 마쳤사옵니다, 대왕대비 마마."

초간택의 끝을 알리는 도제조의 말에 소저들의 눈빛이 긴장감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에 서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디 그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

초간택을 통과한 처녀들의 명단이 적힌 두루마리가 대왕대비의 손에 쥐어졌다.

" 초간택을 통과한 규수들을 공표하겠소."

사뭇 긴장한 듯한 대왕대비의 음성에 서화의 마음도 덩달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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