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2화 (2/83)

제 2화 - 간택령

“ 역시 오늘도 전하께선 그 분을 닮으신 여인을 들이신 것이오?”

“ 상선 어른.”

김 상궁의 어깨 너머로 들려온 임 상선의 목소리. 벌써 3대째 왕을 모셔온 노(老)충신이다. 비록 나이는 지긋하지만 그의 눈빛은 야생에서 무법자처럼 활개치는 범과도 같았고 자칫하다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이 구중궁궐에서 그 긴 시간동안 목숨을 부지해오면서 환관으로써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노련한 이였다.

“ 아직도 이리 마음 붙이실 곳을 못 찾으셨으니...그 혼란스러운 어심을 어쩌면 좋겠는가.”

“ 그러게 말입니다. 어서 중궁전에 새로운 주인이 들어오셔야 할텐데 말입니다.”

“ 들이는 여인들마다 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저리 쫓겨나는데 새로운 중전께서 들어오신다 한들 전하께서 달라지시겠는가. 벌써 이리 된지가 삼 년이 넘었는데...”

“ 그래도 저렇게 중궁전을 언제까지고 비워둘 수는 없는 법 아닙니까. 이리 죄 없는 아이들이 승은만 입고 쫓겨나 대접도 못 받고 평생을 죄인처럼 숨어 사는 사정들도 딱합니다.”

“ 김 상궁 자네... 성상께선 이 나라의 지존이심을 잊고 있는 겐가? 지존을 모시고 승은을 입는 것은 여인으로서 최고의 광명일세. 어찌 그를 두고 딱하다 하는가?"

“ 그런 것이 아니옵고...”

임 상선의 말에 궁궐의 여(女) 영의정에 버금간다는 제조 상궁 김 씨가 쩔쩔 맸다.

“ 그나저나 조만간 처녀 간택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네.”

“ 참말입니까?”

“ 이미 너무 오래 비워둔 교태전의 자리를 호시탐탐 넘보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네. 왕실의 지어미가 오래 부재중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야.”

김 상궁과 임 상선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이야기를 했다. 중전 간택을 이야기하는 내내 이들의 얼굴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고개를 젓기도 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조선 전역에 금혼령과 함께 중전 간택령이 내려졌다. 적령기의 여식을 둔 집안에서는 처녀 단자를 올리라는 대비전의 교지가 방방에 붙었다. 이에 신하된 도리로써, 백성된 도리로써 윗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마땅했으나 윤이 여색을 밝히는 소문이 이미 쉬쉬하면서도 퍼질대로 퍼진 터라 처녀 단자를 올리는 것을 꺼리는 사대부로 넘쳐 흘렀다.

***

" 서화 아씨!!!! "

"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게야?"

'서화'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어수선하게 구는 비슷한 동년배기의 여시종 향이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 대감 어른이 찾으십니다요. 지금 안 채로 좀 건너오시랍니다."

" 지금?"

" 예, 아씨."

하얀 화선지에 먹을 곱게 갈아 난초를 그리고 있던 서화는 바삐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별일이구나. 이 시각에 아버님께서 날 다 찾으시고."

서화가 향이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 아마 중전 간택령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닐까요?"

" 중전 간택령?"

" 예. 주상전하께서 새로운 중전마마를 들이신다고 들었습니다요."

"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게야?"

" 그것까진 쇤네가 어찌 알겠습니까요.. 어서 빨리 대감 어른께 가보셔요. 너무 지체하시다 불호령 내리시면 쇤네만 죽습니다요."

향이 서화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자 서화는 얕게 한 숨을 내쉬고는 안 채로 향했다.

" 아버님."

서화가 바깥에서 부르자 안에서 인기척 소리가 났다.

" 들어오거라."

" 예."

서화의 아비는 좌찬성 윤성한으로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모습을 보이는 어진 인물로 임금에게도 감언이설 보단 진심어린 충언을 하는 우직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니 그가 퇴궐한 후인 까닭인지 상복을 입고 서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 서화야."

" 예, 아버님."

그는 어렵게 얻은 귀한 고명딸 서화를 무척이나 아끼고 예뻐했다. 조정에서 대쪽같은 성정을 뿜어내며 뜻을 굽히지 않는 올곧은 모습의 뒤에는 그저 딸을 사랑하는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의 아비가 있었다. 서화도 그러한 아비를 어미보다도 더 따랐다.

" 내 너를 처녀 단자에 적어 대비마마께 올릴 것이다."

"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화가 놀란 듯 좌찬성에게 말했다.

" 내 아무리 너를 어여삐 여기고 귀하게 여긴다 하나 어찌 웃전의 황명을 거스르면서까지 널 내 품에 둘 수 있겠느냐..."

" 아버님..."

"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 듣자 하니 좌의정 대감의 여식도 처녀 단자를 적어 올리고, 대비 마마의 먼 친척뻘 되시는 현감의 여식도 처녀 단자를 올린다 하니 서화 네가 최종 삼간택에 오를 가능성 또한 희박할게야."

" ..."

" 그러니 너무 염려치 말려무나. 그 고운 얼굴에 근심이라도 드리우면 네 어미가 속상해 할게야."

좌찬성 대감은 애처가 이기도 했다. 아들은 커녕 서화 하나만 겨우 낳을 만큼 몸이 약했던 그의 처는 대를 이을 사내 아이가 필요하다며 그에게 새로이 장가를 들어 후처에게서라도 대를 보라 했지만 그는 단박에 이를 거절했다.

" 서화는 내 귀한 자식이오, 내 이 아이를 그 누구보다도 제일 어여삐 여기며 아낄 터이니 부인께서도 너무 애 끓지 말고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함께 이 아이를 사내 대장부 못지 않게 잘 키우면 되질 않소. 껄껄.."

라는 말과 함께.

좌찬성 대감은 두 명의 꽃을 곁에 두고 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며 여지껏 행복하게 살아왔다. 서화에게 염려하진 말라고 하였으나 어쩌면 짐작과 다른 상황으로 인해 그의 꽃들 중 하나를 어쩌면 그의 곁에서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 주상, 주상께 필요한 것은 이 궁 안의 살림을 잘 이끌고 주상을 곁에서 보필해줄 안 사람 입니다. 언제까지고 교태전을 저렇게 비워둘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닙니까."

" 아직은 필요 없습니다."

" 어언 3년이 흘렀습니다. 이 어미가 죽기 전에 주상과 똑 닮은 세자를 이 손으로 직접 안아보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이 어미의 소원.. 그리 못 들어 주시겠습니까?"

이는 다름아닌 임금과 그의 성모(聖母, 임금의 모후)인 대비 조씨의 대화였다. 이제쯤이면 어지러운 성심이 돌아오겠지, 저제쯤이면 흐려진 성안이 돌아오겠지 하며 기다린지 벌써 3년. 참다 못한 대비 조씨는 새로이 혼인을 할 생각이 없던 임금 윤을 대신해 중전 간택령을 내리고 처녀 단자를 올리게 만들었다. 이대로 더 이상 내전을 비워둔 채 육욕(肉慾)만 채우는 아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어 강단있게 결정을 내린 대비다.

이대로 가다간 이도 저도 될 것 같지 않아 임금이 정착할 만한 짝을 어미된 도리로서 직접 찾아 이어주고 싶었다.

" 이번 만큼은 주상의 말씀을 아니들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국모를 정하는 건 엄연한 내명부 소관이며 중전의 자리가 비어있는 이상, 내명부의 일은 이 어미의 일. 그 말은 즉 이 사람의 뜻에 달렸다는 겝니다. 이번만큼은 나도 물러설 수가 없으니 주상께서 이 어미의 뜻에 따라주세요."

매번 혼사 이야기만 나오면 어떻게든 피해가던 그였는데.. 완고하고 단호한 대비 조씨. 이번엔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윤은 대전 뒤에 있는 천월각(踐月閣)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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