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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118화 (121/122)

깊은 밤, 에두아르트 공작저.

알폰소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의 옆에는 깊이 잠들어 고르게 숨을 내쉬는 샤를로트가 있었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도 베개 위로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 모로 돌아누운 탓에 포개진 두 팔과 눈꺼풀을 내린 얼굴의 굴곡 등이 보였다.

여전히 눈 감으면 사라질 것처럼 느껴지는 샤를로트의 존재.

에두아르트 공작저로 돌아온 이후 샤를로트와 알폰소는 줄곧 같은 침실을 쓰고 있었다.

사실 알폰소가 부상을 입었을 때부터 슬쩍 침실을 합쳤던 터라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샤를로트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알폰소가 밤에도 몇 번씩 깨어 옆에 잠든 샤를로트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을.

샤를로트를 당겨 안은 알폰소의 뇌리 속, 낮에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 재생되었다.

-알폰소, 잘 생각해 봐요. 당신 내가 싫다는 거 할 수 있겠어요?

-아마 그러진 못할 겁니다.

-그렇겠죠. 그런데 그런 당신이 날 구속해 봐야 뭐 얼마나 구속하겠어요?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며, 샤를로트가 알폰소의 두 뺨을 잡아 늘였다.

알폰소는 대답 대신 뺨을 내어 주기만 했다.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샤를로트가 싫어할 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반드시 그녀를 억압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으므로.

알폰소가 샤를로트에게 한 말들은 모두 거짓 한 점 없는 진심이었다.

샤를로트는 기억이 뒤섞이는 일 없이 줄곧 한 시간대를 살아온 까닭에 이 변화가 자연스러운지 몰라도, 알폰소에게는 아니었다.

샤를로트를 위해 제 손으로 독을 마시길 결정했던 알폰소와 현재의 알폰소 사이에는 간극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 갈등 어린 속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으나 샤를로트는 명실상부한 알폰소의 비극이었다.

사랑하였기에 더욱 끔찍하게 느껴지는 비극.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히 떠오른다.

샤를로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날의 충격이.

-……내가? 저 여자를? 내가?

사랑을 떠나 샤를로트는 알폰소에게 인간으로서도 썩 상종하고 싶은 상대가 아니었다.

억지로 염문을 만들어 결혼한 것도 모자라 걸핏하면 패악을 부려대는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샤를로트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부정할 길 없이 심장이 뛰어 인상을 찌푸리고 만다.

상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지척에서 시선 한 번을 더 맞대고 싶어 괜히 손목을 붙든다.

샤를로트가 아델린과 자신의 사이를 의심하는 것을 알았을 때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못한 것은 비단 반지의 일이 기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델린을 의식하며 화를 내는 샤를로트를 보고 있노라면 꼭 그녀가 자신을 두고 질투하는 것만 같아서.

자신과는 상종도 하기 싫다며 매번 대화를 피하던 샤를로트가 아델린이 다녀갔을 때만큼은 먼저 자신을 찾아오곤 했기에.

화를 내는 샤를로트를 마주하며, 속이 문드러지는 감각 속에 환희를 느꼈다.

‘샤를로트는 체면을 많이 신경 쓰는 사람이니까.’

그녀가 자신의 아내로 있는 이상 결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그게 구속이지, 무엇이 더 구속이겠는가?

알폰소의 팔이 조금 더 단단히 품 안의 여체를 끌어안았다.

‘내 아내.’

나의 샤를로트.

그녀가 이혼을 입에 담았을 때는 그대로 눈앞에 있던 테이블을 쪼개 버릴 뻔했다.

샤를로트는 그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의 아내여야만 했다.

그것이 알폰소가 그어놓은 유일한 일선이었다.

설령 제 얼굴 보기가 역겨워 나란히 설 때마다 인상을 쓴다고 해도 좋다.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도 좋다.

전생에 지독하게 쌓였던 집착은 이번 생에 이르러 더욱 거대한 욕망이 되었다.

한 번 샤를로트를 잃을 뻔했기에, 그리고 이번 생에서 샤를로트와 온건히 쌓아 온 애정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물론 샤를로트가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겠지만.’

이제 알폰소는 샤를로트를 잘 알았다.

그녀는 보기보다 무른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의 곁이 질렸다고 해서, 목숨까지 바쳐 살려 놓은 알폰소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이야기다.

‘버리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면 더욱 그렇겠지.’

일평생 욕망이랄 것 없이 살아왔던 까닭일까.

처음으로 가져 본 욕망은 그 무엇보다도 짙고 습했다.

그러니 샤를로트가 자신을 두고 올곧은 사람이라고 할 때마다 말을 잃을 수밖에.

“으음……. 알폰소……?”

끌어안는 힘이 강했던 탓인지, 샤를로트가 부스스 눈을 떴다.

아직은 잠에 취해 상대를 겨우 알아보는 수준인 듯했지만.

“더 주무십시오. 아직 밤이 깊습니다.”

“으응…….”

알폰소가 샤를로트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자, 샤를로트가 잠투정을 하듯 웅얼거리며 알폰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당신도 더 자요…….”

목덜미에 곧장 와 닿는 숨결이 아직은 낯설다. 품 안의 바르작거림이, 등을 끌어안는 손길이,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까지도.

그토록 반목했던 상대가 조금의 경계심도 없이 제 품으로 들어올 때마다 알폰소는 뻐근한 충족감을 느끼곤 했다.

벅찬 감정에 손끝이 저려오는 감각.

형용하자면 아마도 사랑일까.

보다 정교한 표현을 쓰자면 사랑받는다는 감각일 것이다.

제게 안겨드는 샤를로트를 볼 때나 그녀가 먼저 입을 맞춰 올 때, 혹은 옷을 골라주겠다는 샤를로트에게 손을 붙잡힐 때도 늘 이런 기분을 느끼곤 했으니까.

그리고 비로소 알폰소는 제 욕망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깨닫고 말았다.

‘샤를로트가 다른 이를 사랑해도, 내 아내이기만 하면 상관없다니.’

죽기 전의 알폰소라면 그로써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이 감각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불안 없이 안겨 있을 수 있다는 것.

의심 없이 사랑받을 때의 충만감.

어느새 다시 깊이 잠들어 고르게 숨을 내뱉는 샤를로트를 내려다보던 알폰소가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샤를로트.”

듣는 이 없으나, 허공에 흩어져도 좋을 고백이었다.

* * *

“……그래서, 결혼식을 다시 올리기로 했다고?”

“그래. 몇 달 뒤면 곧 봄이잖아.”

샤를로트가 느슨히 미소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옷차림은 어느새 두터워져 있었다.

샤를로트가 되살아난 이후 시간이 유수처럼 지나 어느새 창문에 서리가 끼는 계절이 된 까닭이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든다.

개중에는 샤를로트와,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과의 관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주인 오빠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에두아르트의 면이 살지 않겠지.”

샤를로트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청년, 퀸시가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퀸시의 인상은 몇 달 전에 비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없어진 눈 하나 대신 안대를 착용한 까닭에 인상은 조금 더 날카롭고 사나워졌으며, 무결하고 고귀해 보이던 느낌 또한 사라졌다.

그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오히려 강퍅함과는 거리가 멀어져 있었고, 도리어 포용력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단순히 외양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그 사이에 노하의 전 가주 도미닉이 죽고 그가 새롭게 가문의 수장이 된 까닭일지도 모른다.

퀸시는 대답 대신 찻잔을 내려놓는 샤를로트의 왼손 약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분홍빛이 도는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작은 다이아몬드로 감싸듯 배열해 장식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퀸시에게도 이미 익숙한 외양이었다.

“라베루즈의 반지인가?”

“아, 좀 요란하게 팔았지. 신문에도 났잖아.”

무슨 이유인지 한동안 잠적하던 라베루즈의 장인이 다시 줄을 잡았다는 헤드라인으로, 라베루즈는 새롭게 제작한 프리미엄 브랜드의 반지를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바로 샤를로트 노하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의 반지.

그것이 알폰소와 샤를로트 사이에 오간 약혼반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한 알폰소가 샤를로트에게 다시 청혼하기 위해 이 반지를 제작했다는 사실 또한.

“알폰소가 식을 다시 치르자고 하면서 선물해줬어. 아무래도 우리 결혼이 급하게 치러진 감이 있잖아.”

엄밀히 말하자면 계약 결혼이었지만, 그것까지는 비밀이고.

샤를로트가 반지를 매만지며 빙긋 웃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야.”

계약 결혼을 완벽히 끝내고, 새로운 결혼 생활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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