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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115화 (118/122)

이것은 환상인가? 아니면 진실인가?

어느 쪽도 확실치 않았다.

그럼에도 알폰소는 샤를로트의 앞에 고개를 떨어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샤를로트의 앞에서 스스로를 잃곤 했으므로.

생전의 기억을 되찾은 직후에도, 가브리엘의 설명을 들은 이후에도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평정은 샤를로트의 앞에서 너무도 손쉽게 허물어졌다.

알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샤를로트를 끌어안은 손은 제 목숨줄을 움켜쥐기라도 한 것처럼 단단했다.

울음소리 한 번 없이 흐느끼는 사내의 물기 어린 음성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대체, 왜…… 왜 그런 겁니까. 왜 나 따위를 위해서…….”

기실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는 가브리엘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와 같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샤를로트가 자신을 되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제물 삼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샤를로트가 죽었다는 말보다도 더욱 끔찍한 종류였다.

가능하다면 당장 자신을 죽여 샤를로트를 살려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샤를로트의 말들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알폰소.

그제야 그는 샤를로트가 자신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그 선명한 호의와 기묘한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샤를로트는 스스로 겁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죽음에 초연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시간을 돌아가도 나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똑같이 할 거예요. 멍청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사과는 하지 않을 거예요.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샤를로트는 알폰소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 모든 대화가 바로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하여, 알폰소는 차마 울 수조차 없었다.

샤를로트를 살리기 위해 죽겠다는 말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것만큼 샤를로트가 낸 용기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 모든 다짐은 샤를로트를 만난 순간 놀라울 정도로 무색해져 버렸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분명 나를…… 싫어했잖습니까. 그런데 왜…… 왜 당신이…….”

알폰소는 샤를로트를 안고 흐느꼈지만, 샤를로트는 도리어 웃음을 터트렸다.

채도 높은 여름날 와르르 터지는 소낙비처럼 경쾌하고 유쾌하게.

“그게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니까요.”

그리고 더없이 선명하게.

전생과 이번 생의 기억이 모두 있는 알폰소에게는 자못 낯설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웃음이었다.

“알폰소, 기억해요?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기 전에 했던 말.”

“……결혼하기 전에 했던 말이라면.”

“행복하게 살라고 했잖아요. 결혼하고, 사랑도 하고, 아이도 낳고.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이 행복하게.”

그제야 알폰소는 샤를로트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떠올렸다.

데솔리에의 일이 마무리된 후, 에두아르트 공저에 왔던 샤를로트가 떠나기 전에 한 말이었다.

“나는 당신에게는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뭘 줄 수 있겠어요? 당신은 돈도 많고, 지위도 높고, 명성이라면 차고 넘치게 있죠.”

하지만 샤를로트는 악녀라는 오명에, 노하라는 배경까지 가졌다.

게다가 성품도, 가치관도 알폰소와는 판이하기까지.

“그러니 별수 없잖아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면, 목숨 정도는 줄 수밖에.”

그로써 알폰소를 살릴 수 있었다.

충분한 속죄였고 충분한 사랑이었다.

“나는 만족해요. 더는 살지 않아도 좋아요. 조금이라도 더 살기를 바랄 때도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어리석은 소망이죠. 내가 살아 있다 보면 어떻게 당신을 불행에 빠트릴지 모르는데.”

서둘러 사라져 주는 게 당신에게도 좋은 일 아니겠느냐며 샤를로트가 멋쩍게 웃었다.

그제야 알폰소는 샤를로트가 하려는 말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낯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저 앞에 있는 게 세계수죠? 당신은 저 열매를 가지러 온 거고요.”

“……샤를로트.”

어떻게 알았냐는 말은 필요치 않았다.

땅과 하늘조차 모호한 이 공간에서는 기묘하리만치 속내를 숨길 수가 없었으므로.

“나를 살리지 말고 돌아가요. 그게 당신에게도 좋은 일일 거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내 죽음을 당신이 배상할 필요는 없어요. 전부 내 선택이었고, 내 속죄였으니까.”

“샤를로트!”

“시간은 많은 것을 지워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 쉽게 잊을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술식이 지워줄지도 모르죠.”

건조하게 이어지는 말들에 알폰소의 낯이 와락 일그러져들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잊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놓아줄 생각도.”

“알폰소,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나는-”

“내게 그따위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더 대화할 이유가 없다며, 말을 씹어 뱉은 알폰소가 샤를로트를 지나쳐 세계수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짙은 노기에 주춤했던 샤를로트가 한 박자 늦게 알폰소에게로 달려갔다.

“알폰소! 내 말을 좀 들어요. 내가 틀린 적이 있나요? 이건 어리석은 선택이에요!”

“나는 당신처럼 명민하지 못해 우둔한 길밖에는 걷지 못합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그럼 나더러 당신이 나 때문에 또다시 불행해지는 걸 지켜보라는 건가요?”

앞서 가던 알폰소의 걸음이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울음 섞인 목소리는 느낄 수 있었다.

“알폰소, 제발……. 나는, 당신이 또 그런 일을 겪는다면…….”

그렇다면 정말 다시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더는 견딜 수도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 줄 수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들이 오로지 제 욕심 하나로 스러졌음을 대체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그러니 차라리 잘되었다고, 이대로 눈을 감으려고 했는데…….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젖어드는 샤를로트의 뺨에 익숙한 온기가 닿았다.

시선을 드니 어느새 그녀의 앞으로 돌아온 알폰소가 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과 일그러진 낯.

그는 괴로움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뗐다.

“샤를로트, 나는…… 내 잔에 독이 들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그런데 왜 그걸 마신 거예요!”

“내게는 죽음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당신이 준 잔을 거절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이어진 알폰소의 말에 샤를로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내가, 준 잔이라고요?”

“차를 가져온 하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거짓이었겠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차에 담긴 독이 샤를로트의 뜻이라고 믿었다.

알면서도 마셨다.

샤를로트를 사랑하는 것이 숱한 괴로움을 낳을 줄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했듯.

“어쩌면 당신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을 선택한 건 나였습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불행이라면 나의 비극은 여름밤보다도 낭만적일 터.

“내 본성은 바르지 못합니다.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당신을 어딘가에 가두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나를 경멸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에 기뻐할 족속입니다.”

지독한 집착은 진창과도 같고, 저열한 욕망은 오물과도 같다.

“그러니 당신은 스스로를 경계할 것이 아니라, 나를 꺼려야 함이 옳습니다. 내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나는…… 나는 그래도 상관없어요. 당신이라면…… 내가 불행해도 좋아요.”

“나 역시 그렇습니다.”

알폰소가 젖은 샤를로트의 눈가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러니 부디 내게 불행할 기회를 주십시오.”

내게 당신을 사랑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샤를로트의 뺨을 타고 멎었던 눈물이 다시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알폰소는 그런 샤를로트를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길고 긴 재회였다.

* * *

죽음으로부터 돌아오는 감각은 이제 익숙했다.

유리되어 있던 몸과 정신이 이어지고,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던 몸의 신경이 서서히 돌아오는 느낌.

숨을 들이마시는 것과 함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가 느리게 뇌리를 메운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니까?”

“샤를…… 야만…….”

잠에서 깬 것처럼 의식은 빠르게 돌아왔다.

다들 기억 속과 같았으므로, 제 앞에 있는 이들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알폰소.

가브리엘.

그리고.

“……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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