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베흐느의 제단이 세계수에 닿는 열쇠였다.
그 사실을 밝혀낸 가브리엘은 알폰소와 함께 곧장 황궁 지하로 향했다.
다른 이였더라면 상당히 오래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여기 있는 것은 주느비에브 황가를 친척으로 두고 있는 에두아르트 공작이었다.
게다가 소피아의 도움까지 빌린다면 지하로 가는 것은 제집 문을 열듯 손쉬운 일일 터.
그리하여 샤를로트의 시신을 지키는 것은 퀸시의 몫이 되었다.
“……샤를로트.”
샤를로트와 퀸시, 그 둘만이 남은 방 안.
퀸시는 잠에 든 것처럼 눈을 감은 샤를로트의 위로 조금 전 보았던 장면을 덧그렸다.
죽은 샤를로트의 손에 입 맞추고 떠나던 알폰소의 모습.
소란 대신 첨예한 침묵을 칼날처럼 벼리고 있던 사내.
그 낯 위로 어떤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던 까닭일까, 숨을 거둔 것은 샤를로트였으나 도리어 알폰소의 낯이 더 죽은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샤를로트의 손을 바스러지기 직전의 낙엽처럼 주워들고, 그 위에 입 맞추던 순간.
눈을 감은 사내의 낯은 고배를 삼킨 듯 일그러져 있었다.
고통과 비탄, 참담함과 처절함.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뒤엉킨 감정들 속에 알폰소는 몸을 일으켰다.
그 찰나의 균열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그 모습을 보고서야 퀸시는 샤를로트의 말들과, 가브리엘의 설명을 다시금 떠올렸다.
-나, 에두아르트 공작을 사랑하게 됐어.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야.
-부인께서는 스스로를 제물로 공작 각하를 되살려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는 소망을 비셨습니다. 그리고 각하께서 행복해지고 술식이 완성되면, 예정대로 부인의 존재가 완벽히 사라질 예정이었습니다.
퀸시는 가브리엘의 말을 신뢰할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시간을 되돌렸다는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고, 심지어 그게 알폰소를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현실성이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너라면 정말로 했겠지, 샤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퀸시는 샤를로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악녀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잔정이 많고 무르지만,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집요한 성격.
그 마음이 오롯이 사랑에 쓰였으니 어디 실패할 수가 있었겠는가?
샤를로트라면 목숨보다 더한 것을 주어서라도 기어이 알폰소를 살려내고 말았을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고작 그런 사랑에 스스로를 태우라고 샤를로트를 키운 게 아니었으니까.
-퀸시 오빠, 나랑 사탕 먹자. 미셸린 언니가 숨겨 놓은 걸 찾았어!
-이것 봐, 이젠 필기체도 잘 쓰지? 속기도 가능하다고.
-춤 선생이 나만큼 진도가 잘 나가는 학생은 없대. 오빠랑 몰래 왈츠 연습을 한 게 도움이 됐나 봐!
눈 감으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리는 노을 같은 소녀.
어디에서도 상처받지 않기를, 그리고 괴로울 일 없기를 바라며 혹독하게, 또 다정하게 키웠다.
어머니 없이 자란 것은 샤를로트 혼자뿐이 아니다.
퀸시는 샤를로트보다 몇 년 일찍 세상에 나와 본 경험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약자에게 무정하고 타인에게 비정한지 알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 약점을 잡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시.
그래서 샤를로트만큼은 자신보다 순탄히 살기를 바랐다.
자신처럼 외롭거나 괴롭지 않게. 탐욕스럽게 타인을 짓밟고 부족함 따위는 느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고고하고 오만하게.
그런데 사랑에 목숨을 바쳤다고 하니 믿을 수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알폰소의 균열을 본 순간 퀸시는 제 부정 따위가 하등 쓸모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또한 샤를로트가 어째서 알폰소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가끔은 불가항력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퀸시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 부분에까지 퀸시의 생각이 미쳤을 즈음,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음? 아직 계셨습니까?”
“……내가 할 말을 하는군, 가브리엘.”
퀸시의 말에 문을 열고 들어온 당사자, 가브리엘이 가볍게 으쓱했다.
“따라오지 않으시기에 시신을 수습해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내보내야 하니 준비에 시간이 좀 걸려서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러는 너야말로…….”
퀸시의 시선이 가브리엘을 가볍게 훑었다.
선명한 피비린내와 더불어 천 따위로 대강 동여맨 손에 선명히 번진 붉은색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세계수를 찾는다고 하더니, 같이 간 놈은 어디 가고 너 혼자 이 꼴로 돌아온 거지?”
“별것 아닙니다. 제단을 써 보려고 한 것뿐이니까요.”
처치를 위해 방으로 돌아온 것이라며, 가브리엘이 두고 간 제 물건들 사이에서 약병을 꺼내 손 위로 대강 뿌렸다.
그러자 손은 다친 적이 없다는 듯 순식간에 말끔히 아물었다.
가브리엘이 단순히 허풍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시였다.
지켜보고 있던 퀸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검술 대회에서 샤를로트를 살린 의사가 너였군.”
“맞습니다. 그건 좀 심각하긴 했습니다만, 이 정도 상처는 손쉽게 치료할 수 있죠.”
그가 손수건으로 멀끔해진 손을 슥슥 닦으며 말을 이었다.
“라베흐느의 제단에 제물용 칼까지 있으니, 아마 세계수를 찾으려면 칼로 피를 내면 되지 않을까 싶어 손을 찔러 보았습니다.”
“그럼 에두아르트 공작은?”
“그는……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가브리엘은 라베흐느의 제단으로 갔을 때를 회상했다.
피를 내면 될 거라고 생각해 호기롭게 손을 찔렀는데, 전혀 반응하지 않았던 때.
-……아무래도 피 정도로는 제물을 대신할 수 없는 모양이군요. 제물을 대신할 뭐라도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이 이렇게 말하며 라베흐느의 칼을 내려놓자, 줄곧 지켜보고 있던 알폰소가 대뜸 그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의 손목 정맥을 찢었다.
-가, 각하? 뭘 하시는……!
그러나 대답을 들을 길은 없었다.
그 순간 알폰소의 피가 떨어진 제단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그대로 알폰소를 집어삼켰으므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 짐작이 맞는다면 그는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갔을 겁니다. 아마도 그 제단은 특정 조건이 충족될 때만 열리는 통로일 테니까.”
“그럼…… 정말 샤를로트를 살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인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세계수가 있다면 가능합니다.”
“살린 이후에는?”
그 말에, 태연히 손을 닦던 가브리엘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살린 이후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되짚어 보니 의아해서 말이다. 너는 샤를로트를 살릴 방법이 있다고 했지. 하지만 샤를로트를 살려낸 이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군. 아마도 의도적이었겠지만.”
가브리엘의 관심사는 오직 술식의 완성에 있다.
그렇다면 세계수를 써서 죽은 샤를로트를 살려낸 이후, 술식이 완성된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퀸시는 의문을 품었다.
퀸시의 품에 있던 단도가 가브리엘의 목을 겨누었다.
“대답해라, 가브리엘. 샤를로트가 되살아난 뒤 술식이 완성되면, 그때도.”
샤를로트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건가?
* * *
땅과 하늘의 구분이 없는 공간과, 사방을 채운 환한 빛.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나무.
알폰소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게 세계수로군.”
자신이 제단을 사용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을.
눈앞의 나무에게서는 이질적이면서도 친근한 감각이 느껴졌다.
얼핏 장엄해 보이지만, 달리 보면 제 정원의 화초처럼 느껴지는 소박함이 있다.
이 세계의 진리를 담고 있다는 이명이 아니었더라도 이 나무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터.
‘이 세계수의 열매만 구해가면 된다.’
그러면, 샤를로트를 구할 수 있다.
생각보다 쉽게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생각에 알폰소의 몸을 에워싸고 있던 긴장의 끈이 툭 풀렸다.
그는 나무에게로 다가갔다. 혹시라도 열매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하나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열매로 손을 뻗은 순간.
“알폰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알폰소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기에.
“세상에, 죽어서도 당신을 볼 수 있다니 놀랍군요. 이제 정말로 당신도 행복해진 거겠죠? 그런데 표정이…… 알폰소?”
뒤를 돌아본 순간 낯이 주체할 길 없이 일그러지고, 그런 그에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것만큼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샤를로트.”
그녀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