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몇 번을 죽어야 그녀가 더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을까?
한 잔의 독배로는 이 굴레를 끊어내기 부족했던 걸까.
그래서 자신은 죽지도 못하고 이딴 꿈이나 꾸고 있나?
현실에서는 미소는커녕 늘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샤를로트가, 꿈에서나마 제게 호의 어린 얼굴을 하는 게 보고 싶어서?
‘……아니, 그런 것을 바라 본 적은 없다.’
맹세컨대 그가 바랐던 것은 제게 다정한 샤를로트라거나, 이런 허무맹랑한 꿈 따위가 아니었다.
늘 보이는 날카롭고 차가운 낯이어도 좋다. 제게 화를 내고 독설을 퍼부어도, 값비싼 선물들이 전부 벽난로에 불타도 좋았다.
그저 샤를로트에게 내민 손이 거절당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기뻐 칠 주야를 꼬박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아둔한 마음이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어, 스스로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마음.
끝내 불행해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으로 그녀를 좇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독이 든 잔을 집어 드는 순간에조차 그는 기꺼웠다.
‘……적어도.’
이걸 마시고 나면 더는 이 마음에 괴롭지 않아도 되겠구나.
자신을 싫어하는 샤를로트라면 제 죽음을 기뻐할 테니, 적어도 그녀가 진심으로 반길 만한 것을 하나쯤은 선물할 수 있는 셈이다.
제가 죽어 사랑하는 이가 기쁠 수 있다면 죽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
‘어차피 소피아도 이미 죽어버렸으니.’
제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브누아의 황권은 차고 넘치도록 강화되었으며, 에두아르트의 내정도 충분히 정리된 현재.
알폰소는 더 이상 책임감에 매여 삶을 영위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죽음을 택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어려웠으리라.
그렇게 알폰소의 삶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아니, 내렸다고 생각했다.
돌연 황궁에서 정신을 차리고, 물밀듯 밀려들어오는 기억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이건 꿈이 아니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분명해졌다.
이곳은 꿈 따위가 아니라 알폰소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시간 속이며, 믿기지 않으나 지금 이 기억들은 분명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시간을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정황상 샤를로트 또한 그것에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대체 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왜 이제 와서야 생전의 기억이 돌아온 거지?
그리고 샤를로트는 왜…….
‘……혼란스럽군.’
모든 것이 뒤엉킨 가운데 그는 간신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냈고, 곧장 제 생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을 찾아갔다.
과거를 기억하는 듯 보이던 샤를로트와 유난히 비밀스러운 대화를 자주 나누던 의사, 가브리엘.
만약 샤를로트의 비밀을 아는 이가 있다면 분명 그자일 터였다.
그렇게 현재.
“바른대로 답해라. 샤를로트와 무슨 관계냐.”
알폰소가 가브리엘의 목을 벽에 짓눌렀다.
일말의 자비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손길에, 가브리엘의 낯이 설핏 희게 질렸다.
‘기억이 돌아왔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다른 사람 같을 줄이야.
기존의 알폰소가 단단한 쇳덩이 같은 사람이라면 이 남자는 날카롭게 벼려진 날붙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샤를로트와 결혼한 이후 3년, 끝내 자살을 택한 남자와 샤를로트의 안배하에 평온한 길을 걸어온 알폰소가 결코 같은 사람일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사실까지는 가브리엘이 알 수 없는 일.
‘돌겠군.’
알폰소의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개안하려던 진리안이 다시 흐려지고 말았다.
가브리엘의 능력이라면 이 위기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 그렇게 알폰소에게서 빠져나가고 샤를로트의 상태도 되돌릴 수 없다면?
‘이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 것이다.’
다시 술식이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알폰소의 상태를 평화롭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가브리엘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찰나의 고민 끝에 그는 알폰소가 최대한 바깥 상황을 알지 못하도록 붙잡아 놓고, 그를 진정시키자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가 첫 마디를 내놓으려 입을 뗀 순간.
“말씀드리겠습니다, 각하. 저는-”
“각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벌컥, 문이 열리고 다급히 들어온 이가 있었다.
그 정체는 루드빅 바텔레미.
“마, 마님께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셨습니다!”
그의 이어진 외침에, 가브리엘을 붙들고 있던 알폰소의 손이 허망하게 툭 풀렸다.
가브리엘과 알폰소. 그 둘의 발밑이 나란히 꺼지는 순간이었다.
* * *
그 뒤는 모든 것이 감아둔 태엽을 놓친 오르골처럼 흘러갔다.
알폰소는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홀린 듯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린 걸음이었다. 그러나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걸음을 옮길수록 짙어지는 피비린내와 죽음의 그림자.
스산하게 술렁이는 소리 탓에 걸음이 도저히 멈추질 않았다.
불안한 듯 웅성거리는 인파를 지날 즈음에야 겨우 그를 붙들어 세우는 손이 있었다.
“각하, 그쪽이 아닙니다! 마님은 노하에서 모셔 갔습니다. 이쪽입니다!”
그제야 알폰소는 길을 찾았다.
루드빅의 안내를 따라가 휴게실로 보이는 방 문을 여니, 드레스가 피로 물든 채 창백한 낯으로 쓰러진 샤를로트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샤를로트를 안고 있는 퀸시 또한.
언제나 단정한 낯을 하고 있던 퀸시는 알폰소를 보자마자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대뜸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대체 어디 있다 지금 나타난 거냐!”
“……이거 놓으십시오. 샤를로트는,”
“샤를은 네깟 놈을 지키겠다고 대신 칼도 맞았는데, 너는 샤를로트가 이렇게 되도록 대체 뭘 하고 있었냔 말이다!”
“놓으라고 말했습니다. 샤를로트를 의사에게 보여야 합니다. 서둘러야-”
“의사?”
비탄과 분노로 일그러진 퀸시의 낯 위로 지독한 비소가 올라왔다.
“의사를 뭐 하러 찾지? 샤를로트는 이미 죽었는데.”
“……뭐?”
“샤를로트는 이미 죽었다. 손쓸 틈도 없었어. 피를 토하자마자 심장이 멎었단 말이다!”
그 사실을 다른 사람이 눈치채기 전에 발 빠르게 자리를 옮겨왔지만 그런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날 리는 만무할 터.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감각에 알폰소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에두아르트 공작. 아무리 샤를로트가 최근 칼에 맞았다고 한들 그렇게 곧장 죽을 만큼 허약하지 않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애가……. 차라리 내가 그 잔을 마시게 내버려 두었어야지, 샤를…….”
“그거 좋은 의견이군요.”
그리고 그때,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평소에도 이질적이었으나, 어느샌가 한층 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보이는 금안을 가진 사내.
가브리엘이 몹시 신경질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 거기 계신 분의 진심을 조금 더 일찍 알아주셨더라면 상황이 지금보다는 나았을 텐데요.”
“……뭐냐. 넌 누구지?”
퀸시가 인상을 쓰며 물었으나 가브리엘은 태연했다.
“연금술사입니다. 거기 계신 부인과는 구면이고.”
상황이 틀어질 대로 틀어져서 더럽게 짜증이 난 상태이기도 했다.
‘원래라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대로라면 술식을 완성하기는커녕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브리엘의 눈앞에 새로운 길이 생기기도 했으니.
심호흡을 하듯 가볍게 숨을 몰아쉰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일단 상황부터 설명하고 시작하죠.”
왜 부인께서 거기 누워 계시는지 말입니다.
* * *
가브리엘은 현재까지의 일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왜 그녀가 갑자기 쓰러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알폰소가 죽기 전으로 시간이 돌아간 것인지 등등.
한참의 설명이 지난 후에야 차갑게 굳어 있던 알폰소의 입술이 열렸다.
“……그러니까, 샤를로트가 나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다고.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가면서까지.”
“믿기지 않겠지만 그렇습니다. 술식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고, 그 여파로 수명이 다한 겁니다. 사실 아직 부인의 존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
“말도 안 되는 짓이군. 이걸 지금 믿으라는 건가? 시간을 되돌리다니…….”
가브리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퀸시의 말이 불쑥 끼어들었으나 가브리엘은 태연했다.
“믿든 믿지 않으시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이 모든 걸 설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게, 부인을 살릴 방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