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는 샤를로트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도저히 귀를 신뢰할 수가 없어 다만 의아해진 얼굴이었다.
샤를로트의 입에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다니.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원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샤를로트가 제게만 유달리 너그러운 이유는 자신이 그 이상한 내기의 대상이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그녀는 계약 결혼 기간이 끝나면 언제든 자신을 떠날 생각인 게 분명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고백이라니?
알폰소가 혼란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자, 샤를로트가 미간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런 반응을 보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론 나는 썩 좋은 상대가 아니죠. 뭘 바라고 하는 말은 아니니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누가 당신에게 좋은 상대가 아니라고 했습니까?”
“……당신이요?”
알폰소는 과거 자신이 샤를로트를 두고 신랄하게 평가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제 머리를 한 대 후려쳤다.
“맙소사, 알폰소!”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 머리든 예전에 했던 말이든.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하지만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는걸요. 탓할 생각 없어요. 변명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 누가 변명을 한다고…….”
빌어먹을.
알폰소는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 표정 따위도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너무 당황한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싫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니까요.”
“지금 싫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알폰소의 언성이 높아지자, 샤를로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그녀는 제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화가 난 듯 보이는 그 익숙한 얼굴 아래로 언뜻 목덜미가 붉다는 사실도.
“샤를로트, 당신이야말로 거짓말하는 것 아닙니까?”
“……기껏 고백했는데 거짓말이라니, 너무한 것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날 사랑할 이유는 조금도 없지 않습니까.”
“왜 없어요? 당신은 올곧고 신뢰할 만한 사람인데요. 누구라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걸요.”
“그 반대입니다. 나는 강퍅하고 지나치게 고지식합니다.”
“하지만 다들 나 같은 사기꾼과 겸상을 하느니 차라리 지독하게 정직한 당신과 같은 상을 쓰겠다고 할 텐데요.”
“당신은 사교적이고 쾌활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나보다는 당신을 선호할 겁니다.”
“적어도 나는 아니에요. 알폰소, 나는 세상 누굴 줘도 당신을 고를 거예요.”
몇 번의 시간을 되돌아가도, 몇 번이나 선택의 기로에 놓여도 샤를로트가 선택할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준 사람.
그리하여 지난 생, 시리게 고독하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
제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자신과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
알폰소의 낯이 버석하게 갈라졌다.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샤를로트. 정말 날 사랑합니까?”
“나는 부정한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멀리 있어서 지금은 못 보는 것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가까이 있잖아요.”
“계약 기간이 끝나면 떠난다고 했잖습니까.”
“당신의 행복을 위해 떠나 주려고 했죠. 당신이 날 원할 리 없으니까.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재혼을…… 알폰소? 알폰소!”
태연하게 말하던 샤를로트의 눈이 순식간에 찻잔 받침만 해졌다.
잠자코 샤를로트의 말을 듣고 있던 알폰소가 돌연 품에서 단도를 꺼내 스스로를 겨누었던 것이다.
“알폰소! 미쳤어요? 갑자기 왜 이런 짓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현실일 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꿈에서 깨는 데에는 통증이 효과적이라고 들었습니다.”
“방금 머리 때려 봤잖아요!”
“그다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맙소사, 차라리 머리 한 대 맞고 정신이 나갔다는 게 더 그럴싸하겠네요!”
“그럼 내가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 겁니까?”
알폰소의 말에 샤를로트는 처음으로 입을 멈추었다.
환각, 환각이라.
“……그래요. 환각 같아요.”
눈 뜨면 사라질 백일몽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겠지.
언젠가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챙그랑.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대신 그는 샤를로트를 깊이 끌어안았다.
그녀가 설령 환각이 아니라 바람결에 흩어질 잿더미라고 해도 결코 놓치지 않을 것처럼.
“샤를로트. 당신의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설령 이것이 내 망상에 불과하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다른 이의 아내가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니 제발.
“나를 영영 떠나지만 마십시오.”
그것이 알폰소가 두려워하는 단 한 가지이자, 그가 검술 대회 우승을 조건으로 샤를로트에게 빌고자 했던 소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샤를로트를 알지 못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데면데면한 관계라고 해도 좋다. 그저 얼굴 보는 것으로도 이 저열한 욕망은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
샤를로트가 여전히 그의 곁에 있다면.
너무 원해서 도리어 풀어놓을 수밖에 없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양껏 끌어안아 보아야 나무에 힘껏 매달린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처음부터 제가 가져갈 수 없는 품이었으니까.
“떠나지 않을게요.”
하여 샤를로트는 웃는 낯으로 거짓을 말했다.
알폰소에게는 거짓을 말한 것이 손에 꼽는 그녀였지만, 이번 거짓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쉬웠다.
거짓이되 진심이었으므로.
“사랑해요, 알폰소.”
그로부터 며칠 뒤, 술식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샤를로트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 * *
샤를로트가 쓰러진 당일.
그날은 검술 대회의 피로연이 열린 날이었다.
그리고 샤를로트가 제 끝을 예감한 날이기도 했다.
“콜록, 콜록!”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어깨가 기침 탓에 발작적으로 흔들리자, 옆에 선 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여기 오는 건 무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인.”
“콜록, 시끄러워. 오늘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니까.”
“그래도 그 몸 상태로 무슨 일을 한다고…….”
“그래서 널 데려온 거잖아, 가브리엘. 투덜댈 시간 있으면 약이나 줘.”
샤를로트가 숙였던 몸을 바로 세우자, 가브리엘이 한숨을 내쉬며 작은 약병을 건넸다.
한 모금조차 되지 않는 적은 양의 약을 입에 털어 넣자 창백했던 샤를로트의 낯에 겨우 혈색이 돌아왔다.
알폰소에게 고백한 이후 고작 며칠 사이.
샤를로트의 몸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가브리엘의 약을 매 시간마다 먹어 주고 있는데도 완연한 병색을 숨기기 힘들어진 것이 그 증거였다.
술식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인. 이 약은 치료가 아니라 병색을 숨겨 줄 뿐입니다.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가브리엘은 술식의 완성이 눈앞에 놓이자, 가발을 뒤집어써 가면서까지 한시도 샤를로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술식이 완성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모양인지.
물론 샤를로트 역시 몸 상태를 숨기려면 가브리엘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기에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몸 상태를 숨기는 수준의 얘기가 아니다.
샤를로트는 모든 것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녀는 무리인 줄 알면서도 오늘 피로연에 참석했다.
샤를로트에게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할 과업이 있었으니까.
샤를로트는 옆에 잠시 내려놓았던 잔 두 개를 집어 들고,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방을 나섰다.
연회장의 홀로 다가가자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니, 표정만큼은 익숙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그가 저렇게 차가운 얼굴로 샤를로트를 본 것은 처음이니까.
하여 샤를로트는 평소보다 싱그럽게 미소 지어 주었다.
“간만이야. 낯선 얼굴이네, 퀸시.”
“……샤를로트.”
퀸시의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오자, 샤를로트가 빙긋 웃으며 가져온 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우리, 잠시 얘기 좀 할까?”
샤를로트의 왼손에 들린 잔은 독이 든 잔이다.
그녀는 이 피로연에서 퀸시를 죽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