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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106화 (109/122)

눈앞의 모든 것이 마냥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샤를로트와 죽음이라니.

지난 며칠간 알폰소의 뇌리에 뿌옇게 붙어 다니던 악몽이 눈앞에 자리를 잡은 것만 같았다.

거세게 뛰는 심장이 흉부 안쪽을 무두질하고, 굳어버린 사고와 버거워진 숨 따위가 어깨를 쥐어 흔드는 것만 같았다.

이런 와중에도 미소 짓는 샤를로트에게, 알폰소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당신은…….’

대체 언제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지?

샤를로트가 쓰러진 순간, 알폰소는 지난 며칠 동안 그를 집요하게 괴롭혀 왔던 그 불안의 정체를 맞닥뜨렸다.

어째서 샤를로트가 ‘그런 말’을 한 건지.

덕분에 아무리 심장이 뛰고 숨통이 막혀도 알폰소의 손끝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샤를로트가 심어둔 불안에 시달린 까닭에 도리어 이 상황이 소스라칠 만큼 놀랍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눈앞에서 죽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라는 샤를로트의 당부대로 된 셈.

샤를로트가 대체 어디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알폰소는 미처 가늠할 수가 없었다.

‘퀸시의 수에 어느 정도 당해주라고 한 것도 이럴 줄 알았기 때문인가.’

알폰소가 경기 중에 마비가 된 듯 보인 것은 사실 거짓이었다.

샤를로트의 말을 신뢰하는 알폰소였으나,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다.

그는 버나드와 가까워질 때마다 모래바람을 일으켜 마비가루를 흩날려 버렸고, 대신 샤를로트의 조언을 따라 마비가루에 당한 척 연기를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샤를로트의 말을 그대로 따라 마비 가루에 정통으로 당해 주었더라면.

‘샤를로트가 경기장으로 난입하더라도 움직일 수 없었겠지.’

그리고 샤를로트가 바랐던 것은 어쩌면 그런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그녀가 독이 묻은 칼을 대신 맞기 수월할 테고, 알폰소가 끼어들 틈도 없을 테니까.

모든 정황이 지나치게 명확해서 숨이 막혔다.

제가 언제 이런 결과를 바랐느냐고 화를 낸다면 샤를로트가 대답할 말조차 선명하게 떠올랐다.

-대신 당신은 무사히 살아 있잖아요. 그럼 된 거죠.

샤를로트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을 것이다. 그렇게 또 알폰소의 말문을 막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산뜻하게 미소 지을 때면 알폰소가 대개 말을 잃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이지 뻔뻔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타인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도덕적 관념도 희박하고, 무자비하며, 제멋대로인 데다 모질기까지 한 인간.

끝이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는, 말로에 기다리는 것은 오직 파멸뿐인…….

‘교활한 악녀.’

생각이 그에 닿는 순간 알폰소의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져 내렸다.

언젠가 그가 샤를로트를 두고 가늠했던 결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교활한 인간은 필히 자멸한다.

이기적인 사람이 혼자 무너지고, 악의에 찬 사람은 자신 외에 꼭 한 명을 더 데리고 추락하는 반면.

교활한 사람은 주변을 전부 끌어안고 자멸한다는 점에서 특히 질이 나쁘다고.

그러니 그런 인간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단언했었는데.

빌어먹게도 알폰소의 판단은 이번에도 옳았다.

샤를로트가 파멸이라면 그 역시도 필히 같은 궤적을 밟게 될 것이었으므로.

알폰소는 쓰러지듯 걸어 샤를로트의 앞으로 갔다.

샤를로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파리해진 낯 위로 검은 피가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의사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상태는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상처는 지혈했지만, 독이 퍼지는 걸 막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의사를 데려와라.”

“다른 의사에게 보여도 같은 말을 할 겁니다. 이 독의 해독제를 찾지 못한다면 오늘을 넘기지 못하실-”

“다른 의사를 데려오라고 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이를 악문 알폰소의 안광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그렇잖아도 바로 직전에 버나드를 잔인하게 추궁한 광경이 모두의 뇌리에 박혀 있던 까닭에, 의사는 순식간에 겁에 질렸다.

“그, 그것이…….”

의사가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낯선 말소리가 끼어들었다.

“공작께서 보기보다 성정이 난폭하시군요. 무능이 죄는 아닐 텐데요.”

알폰소의 차가운 시선이 끼어든 이에게로 향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성인 남자 정도로 보이는 키를 가진 사람.

“넌 누구지?”

“의사입니다. 거기 계신 부인과는 구면이고요.”

얼굴을 가린 후드 사이로 금안이 언뜻 빛을 냈다.

“그러니 자리를 좀 비켜 주시죠.”

부인께서 하신 모든 일을 허사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남자가 차갑게 덧붙였다.

* * *

시간을 거슬러 올라, 실비아가 절뚝이며 샤를로트를 찾아온 순간.

“주, 주인님께서 버나드 듀랑에게 독을 주셨어요. 반드시 에두아르트 공작을 죽이라고……. 그, 그래서 제가 해독제를 빼돌렸어요.”

샤를로트는 가짜 해독제를 건네는 실비아를 보며 생각했다.

‘드디어 왔구나.’

마침내 퍼즐이 완성되었다고.

샤를로트에게는 해결해야 할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퀸시로부터 알폰소를 지키며 검술 대회 우승을 따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가브리엘을 다시 제 앞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것.

첫 번째는 그나마 해결할 방법이 없진 않았지만, 두 번째는 조금 까다로웠다.

‘가브리엘을 다시 낚아올 수 있는 시기는 검술 대회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가브리엘의 노트도 돌려주고, 파스칼을 이용하는 카드도 이미 써버린 지금.

샤를로트에게 걸 수 있는 패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그녀의 목숨 하나뿐.

‘술식이 완성되기 전에 제물인 내가 죽으면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가겠지.’

그리고 가브리엘은 이 술식을 완성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러니 만약 술식이 완성되기 직전, 가브리엘의 앞에서 그녀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분명 무시하지 못하고 나를 살리러 올 거야.’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검술 대회의 결승전을 반드시 보러 올 테고, 퀸시 역시 반드시 검술 대회의 결승전에서 수를 쓰려고 할 테니까.

그러니 샤를로트는 그 수를 이용해서 퀸시가 노리던 알폰소가 아닌, 제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결승전에 난입해 알폰소 대신 칼에 찔리거나, 대신 독에 당하는 식으로.

‘그럼 퀸시로부터 알폰소를 구할 구하고, 가브리엘도 유인할 수 있겠지.’

가설은 완벽했다. 실패한다면 제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 매달려 온 일도 허무하게 끝나버릴 수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목숨을 거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건 목숨, 무엇이 더 두렵겠는가.

샤를로트를 정말로 두렵게 하는 것은.

‘더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해 모든 걸 버릴 각오를 해야 하는 거로군.’

오로지 제 욕심 때문에 알폰소를 살릴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이가 들었더라면 이기심으로 모든 걸 망치려고 한다며 손가락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악녀인걸.’

샤를로트가 완벽히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인간이었더라면 악녀라고 불릴 일도 없었을 터.

그녀는 차근차근히 모든 것을 준비했다.

-칼에 찔렸을 때 살 수 있을 만한 부위 말입니까? 음, 아무래도 몸 중심선은 피해야겠죠. 되도록 옆구리에 맞아야 합니다. 이런 건 사실 각하가 더 잘 아실 텐데요.

결승전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아르노에게 급소를 피하는 방법을 묻고.

-마님, 말씀하셨던 감초 사탕입니다. 이걸 먹으면 혀가 검어진다고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더군요.

독에 당한 척을 해야 할 때를 대비해 혀를 검게 만들고, 검은 피처럼 보이는 액체가 담긴 캡슐을 어금니 안쪽에 숨겼다.

그리고 마침내 결승전 당일이 되어 실비아가 다녀간 직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에두아르트의 기사들에게 달려갔다.

“마, 마님? 왜 그렇게 사색이 된 얼굴로-”

“당장 경기를 중지시켜야 해요, 날 도와줘요!”

“예? 설마.”

“상대가 맹독을 바른 검을 들고 있어요! 자칫 당하기라도 하면 끝장이에요! 어서요!”

당연히 실비아가 준 해독제는 진작 버렸다.

실비아의 말은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해독제를 들고 전전긍긍하길 바랐겠지.’

하지만 샤를로트는 이미 처음부터 제 몸을 내던질 계획이었다.

그리고 계획이 성공한다면, 샤를로트는 원했던 모든 것을 얻게 될 터였다.

하여 샤를로트는 의식을 잃기 직전 흐린 시야로 보이는 알폰소에게 미소 지어 주었다.

‘걱정 말아요.’

모두 괜찮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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