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의 예상대로, 알폰소는 큰 어려움 없이 결승까지 왔다.
그나마 걱정거리가 있었다면 결승 전에 퀸시가 손을 쓸 가능성이었는데, 다행히 손을 다친 이후로는 별다른 낌새가 없었다.
물론 중간에 알폰소가 대전 상대로 쟝-자크를 만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기권하겠습니다. 저기서 지면 아르노 경이 석 달 열흘을 놀려댈 겁니다.”
라며 기권하는 덕분에 결승전까지 가는 길은 더욱 원활했다.
그렇게 현재 검술 대회에 선수로 남아 결승전을 치르게 될 사람은 단 두 명.
게다가 개중 한 명이 그 유명한 에두아르트 공작이라는 사실에 결승전을 치르는 경기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에두아르트 공작이 정말로 결승전까지 오다니, 대단하잖아!”
“난 예상하고 있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전쟁영웅 나리 아니신가.”
“그건 전쟁에서 이겨서 얻은 이름이지, 칼질을 잘해서 얻은 명성은 아니잖나. 게다가 부상을 당해서 줄곧 왼손만 쓰던데!”
“왼손으로 그 쟁쟁한 실력자들을 전부 손쉽게 이긴 건 보통 일이 아니긴 하지. 나는 분명 에두아르트 공작이 오늘도 시원시원하게 이길 거라 보네!”
대부분은 에두아르트 공작이 그간의 경기에서 보여준 대단한 검술 실력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는 다른 한 명을 거론하기도 했다.
“여태까지 이긴 건 반은 요행이었지! 대진운이 그렇게 유리했는데. 한 번은 자기 가문 기사를 만나서 기권승도 하지 않았나!”
“이번 상대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걸? 제국 최고 용병단에서도 나날이 주가를 올리고 있는 대단한 실력자라던데!”
“게다가 에두아르트 공작은 부상을 입었으니,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겠지!”
이러한 이유로, 관중석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둥둥둥!
곧 경기가 시작됨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알폰소는 왼손으로 가볍게 검을 휘둘러 보며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듯, 눈을 굴리는 모습에 세검을 든 상대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여유로워 보이시는군요, 공작님. 아무래도 당신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제 명성이 부족했나 봅니다.”
“……명성이라. 내가 긴장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게 그쪽의 명성은 아닐 텐데, 버나드 듀랑.”
“하긴, 무엇을 가져다 두어도 에두아르트의 지고한 이름에는 미치지 못하겠지요.”
알폰소의 무심한 대꾸에 버나드가 빙긋 미소 지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러운 태도였다.
‘샤를로트의 말대로군.’
버나드 듀랑, 그가 어떤 자인지는 알폰소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샤를로트가 그에 대해 일장 읊어준 내용이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의뢰인으로부터 뒷돈을 어지간히 받아먹는 모양이에요. 청부업은 익숙하다는 거죠. 분명 퀸시에게도 돈을 받았을 거예요. 대놓고 드러내진 않겠지만.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 끝까지 발뺌할 거라고, 샤를로트는 말했다.
-경기한 걸 보니, 대진표를 조작해서 손쉽게 올라온 모양이에요. 어차피 당신이 질 리 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경기해요.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만일 퀸시 노하가 뒤에서 손을 썼다면, 허투루 내보내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죠. 퀸시가 정정당당하게 당신을 이기려고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히 퀸시라면 뭔가 함정을 숨겨 두었을 것이다.
이중, 삼중으로라도.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 절벽에서 뛰어내리게 하고, 절벽 아래를 시퍼런 날붙이로 메워 두는 것이 퀸시였다. 그러니 퀸시가 수를 쓰기로 작정한 판 위에 섰다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방법은 요원했다.
-그러니까 일단은 당해줘요. 무슨 수를 쓰든.
-……정말 당해주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요. 일단은. 어느 정도는 장단에 맞춰줘요.
지나치게 날을 세우고 있으면 도리어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럴 바엔 적당히 당해주는 것이 낫다고, 샤를로트는 말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카강!
경기가 시작한 직후 날붙이가 날카롭게 맞붙었다 떨어지며 쇳소리를 내길 몇 번.
알폰소는 샤를로트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몸이 둔해져가는군.’
버나드와 검을 맞댈 때마다 몸이 조금씩 굳어가며 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비향? 아니, 가루 같은 것을 뿌렸을 수도 있겠군.’
향은 날아가기 쉬우니, 움직일 때마다 버나드의 움직임을 따라 마비가루가 흩뿌려지게끔 손을 써 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다른 때였더라면 곧장 마비가루를 쓰지 못하도록 손을 썼겠지만, 샤를로트의 당부가 발목을 잡았다.
‘일단은 당해주라고, 했었지.’
어차피 짜인 판 위에서 놀아나는 거라면, 상대가 적당히 긴장을 풀게끔 목 아래 칼이 들어오기 직전까지 당해준 뒤 상황을 역전시키자는 뜻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현명한 당부였으나, 알폰소는 어딘지 불안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샤를로트라면 내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는 없겠지만…….’
그녀가 최근 보여준 행보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특히,
-내가 당신 앞에서 죽더라도 너무 놀라거나 탓하지 말아요.
이 말이.
하지만 알폰소에게는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점점 움직임이 느려지는 알폰소를 보며 음흉하게 미소 지은 버나드가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벌써 지치기라도 하셨습니까, 공작님?”
카앙!
두 개의 검이 허공에 큰 궤도를 그었다.
그리고, 알폰소의 몸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저만큼 마비가루를 들이마셨으면 회생이 안 되겠군.”
눈에 띄게 굳어 버린 알폰소를 내려다보며, 퀸시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본인의 계획대로 판이 굴러가고 있음에도 썩 유쾌하지만은 못한 얼굴.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잠시 턱을 괸 채 경기장에서 알폰소가 버나드에게 점차 밀리는 것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드제, 버나드 듀랑에게 약을 얼마나 줬지?”
“넉넉하게 주라고 말씀하셔서, 정량의 배 이상 주었습니다.”
“그 정도를 줘도 정작 쓰이는 건 1/4도 채 되지 않을 거다. 공중에 흩뿌려지는 게 워낙 많으니…….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생각보다 효과가 빨리 왔군.”
알폰소의 예상대로 퀸시가 쓴 것은 마비가루였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검을 맞대는 알폰소가 계속 그것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는 구조.
물론 버나드는 해독제를 복용한 상태였고 말이다.
덕분에 경기장에서는 척 보기에도 몸이 뻣뻣하게 굳은 알폰소가 열세인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왼손을 쓰는 것도 모자라 몸이 굳기까지 했으니 버나드의 맹공을 견디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점점 한쪽으로 기우는 전세에 관중석에서 함성과 야유가 교차하는 와중, 절뚝이는 그림자 하나가 퀸시에게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주, 주인님. 명령하신 대로 샤를로트 아가씨께 다녀왔습니다.”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자, 그 아래 깡마르고 군데군데 흉이 남은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샤를로트의 직속하녀였던 실비아의 얼굴이었다.
“내가 시킨 건 잘했나?”
“예, 아가씨께…… 주인님을 배신한 것처럼 말하고 해독제를 드리고 왔습니다.”
알폰소가 미처 알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버나드의 검에 무색무취의 독이 발려 있다는 것이다.
저 검으로 상처를 입히기라도 하면 곧바로 독이 알폰소의 몸을 타고 번질 테고, 저렇게 몸이 마비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독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워질 터.
실비아가 받은 명령은 샤를로트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독의 해독제를 주는 것이었다.
‘물론 가짜지만.’
하지만 샤를로트에게는 그 사실을 알아낼 방법이 없다.
가끔은 독이 또 다른 독의 해독제로 쓰이기도 하고, 오로지 독을 제조한 사람만이 해독제의 진위를 알 수 있기도 하니까.
알폰소가 독에 당하면 샤를로트는 해독제를 두고 갈등하다, 끝내 가짜 해독제를 쓰거나 노하로 돌아오게 될 터.
“모든 게 순조롭군.”
퀸시가 원했던 그림이 차근히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퀸시의 얼굴은 썩 밝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샤를로트가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리 없는데.’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이 너무 순탄했던 것이다.
하다못해 알폰소에게 각종 해독제라도 먹여 두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손을 쓰지 않았다고?
퀸시가 의아함과 알 수 없는 불안에 미간을 찌푸렸을 즈음.
경기장에서는 알폰소가 대기실 입구까지 몰려, 완전한 열세에 처했다.
“이거 공작도 별것 아니군요. 잘 가십시오!”
호쾌하게 외친 버나드의 세검이 허공을 가른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