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는 과거로 돌아온 이래, 어쩌면 이 시간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자신 혼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샤를로트가 제 목숨을 던져 가면서 빌었던 소망은 어디까지나 알폰소를 되살려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일 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되돌려 달라는 조건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사라진 시간을 기억할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도 그럴 수 있겠지.
그리고 샤를로트처럼 사라진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둘뿐일 것이다.
첫 번째는 샤를로트에 의해 되살아나게 된 알폰소.
하지만 알폰소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확인했다.
그러니 남은 이는 오직 하나.
술식을 쓴 장본인, 가브리엘뿐이다.
하지만 알폰소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가브리엘 역시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는데.
샤를로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당신도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군.”
“제 술식이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도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샤를로트의 날카로운 반응에도 눈썹 한 번 움직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의 반응 따위는 그에게 어떤 감흥도 줄 수 없다는 듯.
“시간을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여전히 알아가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가브리엘의 얼굴은 지극히 무기질적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눈동자조차 제대로 볼 수 없게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질적인 일이다.
“이제는 얼굴을 가리지 않는 건가?”
“당시 얼굴을 가린 것은 절 찾아온 사람이 다시 저를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느리게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하지만 부인께서는 그런 것이 썩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이런 식으로 저를 찾아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는 그림이라니.
허탈한 듯 웃은 가브리엘의 손에는 듬성듬성 지워진 그림이 들려 있었다.
결국 그가 샤를로트의 함정에 고스란히 걸려들었음을 자백하는 것이었다.
“지워진 그림을 보고 눈치챘습니다. 이런 일을 꾸미실 분은 부인밖에 없으니까.”
“눈치를 챘다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가브리엘이 간단히 대꾸하며 그림을 도로 품에 넣었다.
“단지 마음이 조금 바뀌었을 뿐.”
눈꺼풀에 가려져 있었던 이질적인 금안이 다시 샤를로트에게 향했다.
가끔은 마주할 때마다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했던 눈동자였으나, 이상하게도 이제 샤를로트는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얼굴을 보았기 때문인가.’
목소리 등으로 짐작은 했지만 가브리엘은 홍안의 청년이었다.
많이 쳐줘야 퀸시 정도의 나이일까.
상당한 장신에, 다소 몽환적인 느낌이 드는 미형의 얼굴.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가 지독하게 색소가 없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창백한 낯과 희기만 한 머리칼이 그러했다.
물론 알폰소 역시 은발이니 그보다 옅은 흰 머리도 그리 낯설지는 않지만, 가브리엘의 희끗한 인상과 알폰소의 강직한 인상은 여러모로 거리가 멀었다.
알폰소가 빙하 같은 인상을 준다면 가브리엘은 그야말로 흩날리는 눈발처럼 느껴졌으므로.
빙하를 찾아가는 것은 가능해도 흩날린 눈을 뒤쫓을 수는 없다.
하여 샤를로트는 불현듯 직감했다.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면 다시 만나는 것은 요원했겠군.”
“그랬을 겁니다. 애석하게도 부인의 속내를 읽는 것은 제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샤를로트가 다른 사람들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시간을 돌아와, 다른 이들보다 알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에게는 그런 지식이 통하지 않는다.
“부인께서 제게 그림을 팔아 저를 꾀어내려 한 것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지나칠 수 없는지 알고 계시다는 것은, 생팔에 있는 제 수기장을 발견하셨다는 뜻이겠죠.”
어쩌면 그걸 이용해서 제게 거래를 시도할 수도 있었을 테고.
가브리엘이 덧붙인 말에 샤를로트가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렇게 전부 짐작했고, 처음에는 다시 만날 생각도 없었다면서. 왜 마음을 바꾼 거지?”
“간단합니다. 술식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으니까요.”
가브리엘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직후 줄곧 샤를로트를 쫓았음을 이야기했다.
“부인께서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부인께 써드린 술식은 미완성이었습니다. 또한 제가 일평생을 바쳐 만들어 온 것이기도 합니다.”
샤를로트는 그제야 가브리엘이 술식에 대해 말했던 것들 중, 미완성이라는 이야기가 끼어 있었음을 떠올렸다.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미완성이기 때문에 술식이 어떤 결과를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샤를로트는 그저 가능하다는 이야기에만 눈이 팔려 있었다.
그녀는 알폰소를 확실히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감당할 자신이 있었고, 가브리엘은 샤를로트에게 확실히 살릴 수 있음을 말해 주었으니까.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제 목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술식이 완벽히 완성될 수만 있다면 죽은 이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샤를로트가 제 목을 내어놓게 된 것이었다.
‘그땐 정말 반미치광이였군.’
지금의 샤를로트라면 하지 않았을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아니, 어쩌면 똑같이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금 더 신중하게 확인했겠지.’
가브리엘에게 어째서 그런 술식이 있는 것이며, 또 성공 여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반추하자니 과거 자신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기분이다.
샤를로트가 상념에 잠긴 사이, 가브리엘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저는 이 술식이 완성되는 것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완벽한 술식을 만드는 데 자료로 쓰이게 될 겁니다.”
“한마디로 연구를 완성시키기 위해 나를 만나러 왔다는 뜻이군.”
가브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긍정이었다.
‘술식을 써준 값이라도 받으려고 온 건가 했더니.’
돈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연구에만 미쳐 있었을 줄이야.
생각해 보면 어디 가서 사람을 살리는 술식을 실험해 보겠는가?
게다가 술식을 실험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말이다.
어떻게 보자면 가브리엘에게는 샤를로트가 그를 찾아와 준 것이 천운처럼 느껴졌으리라.
샤를로트는 헛웃음을 짓다가, 뒤이어 발작적인 기침을 터트렸다.
한참 동안 이어진 기침이 한결 잦아들기까지, 가브리엘의 금안이 샤를로트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예상대로 상태가 상당히 나쁘시군요. 이 정도면 주변인에게도 들켰을 것 같은데.”
“다행히 아직은 한 명에게만 들켰어.”
“부군께서는 모르시고요?”
“당연하지. 그는 몰라야 해. 곧 죽을 사람을 옆에 두고 있는 것도 기분 나쁘잖아.”
샤를로트는 말을 마치고 기침을 갈무리한 뒤에야 다시 허리를 세웠다.
그녀는 일견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잘됐지.’
혹시라도 가브리엘이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서 왔다면 그를 설득하는 데에만 상당히 시간을 쏟았을 것이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알고도 제 발로 찾아와 줬다는 점이 퍽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러니까 이유야 어쨌든, 당신은 나를 도와주려고 왔다는 거잖아? 그럼 한 가지만 묻지.”
호기롭게 말을 던진 것치고, 샤를로트는 다음 말을 내뱉기까지 상당히 주저했다.
잠깐의 머뭇거림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가브리엘, 내가 살 방법은 정말 없을까?”
몹시 간절한 목소리로.
* * *
“각하.”
지고한 에두아르트의 영광된 첫 번째 기사, 루드빅 바텔레미는 고민 끝에 입을 뗐다.
이것은 그가 세 시간 동안 서른 번 정도의 고민을 거친 끝에 뱉는 직언이었다.
“그렇게 마님이 신경이 쓰이십니까?”
그 말에 시종일관 창문 쪽을 바라보던 알폰소가 루드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내가 샤를로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던가?”
“말씀은 하지 않으셨죠. 그런데 마님이 외출하신 뒤로 계속 창밖만 바라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비가 와서,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싶어서 그렇다.”
“마님께서 어디로 외출하시는지 알려주지 않으셔서는 아니고요?”
정곡을 찔린 알폰소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