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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100화 (103/122)

샤를로트는 가브리엘의 노트를 전부 필사한 뒤,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가브리엘을 찾으려면 동생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어.’

가브리엘의 노트는 얼마나 꺼내 본 건지, 닳고 닳아 있었다.

동생은 더 이상 만질 수 없으니 노트라도 쓰다듬어 보려 한 것일까.

해질 대로 해어진 노트는 가브리엘의 미련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러니 가브리엘이 이곳에 있다면, 그의 미련을 자극해서 그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하지만 어떻게 가브리엘의 미련을 자극할 수 있지?’

방법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노트에서 이런 구절을 찾았으므로.

[파스칼은 기회가 된다면 황궁 곳곳을 그려 보고 싶다고 했다. 특히 황궁 원형경기장 옆의 꽃 담장을. 풍문으로는 그 담장의 꽃무늬가 시간별로 다른 꽃처럼 보인다는데, 정말 그럴지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꽃 담장.

황궁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라베흐느의 유산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담장이라기보다는 높다란 벽 구조물이었다.

제국의 초대 황제는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라베흐느의 유적 위에 황궁을 세웠는데, 그때 모두 철거하고 딱 하나 남겨놓은 것이 바로 꽃 담장이었다.

어떻게 세웠는지는 몰라도 돌벽에 불과할 담장에 무늬 같은 것이 아른거려 꼭 꽃무리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빛을 반사하는 원리로 만들어져 해의 위치에 따라, 그리고 달빛에 따라 그 문양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자세한 것은 샤를로트도 알지 못했다.

‘난 그런 것에 딱히 관심이 없으니까.’

그녀가 아는 것은, 빛의 반사율에 따라 그런 오묘한 문양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이제는 소실된 바람에 초대 황제가 꽃 담장을 남겨두기로 결정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가브리엘의 형제인 파스칼이 그 벽을 꼭 보고 싶어 했다는 것도.

바로 거기서 샤를로트는 실마리를 잡았다.

‘만약 가브리엘이 파스칼 때문에 검술 대회를 보러 왔다면, 꽃 담장도 반드시 보고 싶어 할 거야.’

꽃 담장은 황궁의 원형경기장 옆에 있다.

그리고 황궁의 원형경기장 일대는 오로지 검술 대회 시기에만 개방된다.

그것도, 개인전을 치를 때만.

단체전은 사냥터에서 치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가브리엘이 내 예상대로 파스칼이 가보길 원했던 장소들을 방문하고 있는 거라면.’

분명 그는 개인전이 열리는 시기에 맞추어 꽃 담장을 보러 올 것이다.

노트를 이토록 닳게 만들 정도의정도로 짙은 미련이라면 쉽게 놓칠 리 없을 테니까.

그리고 샤를로트는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바로, 화가를 한 명 고용해서.

‘축제나 검술 대회처럼 규모 큰 행사가 열리면 그림을 팔러 나오는 무명 화가들이 있지.’

보통은 개인작을 팔기보다 축제의 풍경이나 기념할 만한 장소들을 그려서 판다.

그러니 개중 한 명을 고용해 꽃 담장을 그리게 한 뒤, 그 그림들을 꽃 담장 앞에서 팔게끔 하는 것이다.

‘파스칼은 화가였으니까.’

죽은 동생이 직접 그리길 원했던 장소에서, 그 장소를 그린 그림을 판다는데 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적어도 샤를로트가 보기에는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다행히 그녀가 그 계획을 짰을 때는 아직 개인전이 열리기 전이었다.

하여 샤를로트는 계획대로 무명 화가를 섭외해, 꽃 담장 앞에 세워 두었다.

알폰소의 첫 개인전 경기가 있던 날 경기를 직관하지 못한 이유였다.

‘원래는 내가 지켜볼 생각이었지.’

갑작스럽게 등장한 퀸시 때문에 그러지 못했지만.

걱정할 건 없다.

샤를로트는 일이 어그러질 때를 대비해, 미리 화가에게 말을 전달해 두었으니까.

-금빛 눈을 가진 남자가 그림을 사가거든 시킨 대로 하고, 내게 편지해요.

라고.

그리고 마침내 편지가 온 것이다.

[……하여, 정오 무렵에 남자 손님이 그림을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처음에는 성별을 구분하지 못했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얼핏 금빛으로 빛나는 눈을 본 것 같아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

성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푹 눌러쓴 로브와 남자 목소리.

그리고 금빛 눈까지.

‘이건 틀림없어.’

가브리엘, 그가 샤를로트의 덫에 걸린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가브리엘이 샤를로트의 덫에 걸려 그림을 샀다고는 해도, 그대로 떠나 버리면 그만이 아니냐고.

어떻게 그림 하나로 가브리엘을 찾아갈 수 있느냐고.

하지만 그건 발상부터가 잘못된 생각이었다.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니지.’

가브리엘이 날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개인전이 열리기 전, 샤를로트는 화가에게 특수한 약품을 하나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이걸 물감에 섞어서 그림을 그려 줘요. 혹시 모르니 넉넉하게 세 장 정도. 그리고 내가 말한 금빛 눈의 남자가 있거든 이걸 넣어서 그린 그림을 팔아줘요.

-이, 이게 뭡니까?

-별 건 아니에요.

독이니 뭐니 별의별 것을 다 넣던 예전에 비하면 정말 별것 아닌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휘발되는 약품일 뿐이에요.

간혹 햇빛을 만나면 휘발되는 물질들이 있다.

샤를로트가 건넨 약품 또한 그러한 계열로, 이걸 물감에 섞어서 그림을 그리면 일정 시간이 흐른 뒤 그림은 듬성듬성하게 지워져버린다.

어제 산 그림이 갑자기 반쯤 사라져 버린다면 구매한 사람은 당연히 판매자를 찾아올 수밖에 없을 터.

‘빠르면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가브리엘은 다시 꽃 담장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샤를로트는 그 기회를 잡아야 했다.

알폰소가 부상으로 외출을 자제하고 있는 것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알폰소가 다음 개인전을 치르기까지는 아직 사흘 정도 남았지.’

그 안에 가브리엘과의 만남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녀는 펜을 들어 편지에 답장을 적었다.

[그 손님이 그림을 다시 그려 달라며 찾아오거든, 재료가 떨어져 집으로 가지러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이 주소로 그를 데리고 와요.]

모든 준비는 끝났다.

‘연금술사…… 가브리엘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까?’

오래 기다린 재회가 코앞이었다.

* * *

붉었던 머리가 희게 세고, 고왔던 손발이 부르트도록 온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샤를로트는 매일같이 신을 찾았다.

신전을 등에 업고 있는 가문에 일평생 적을 두었음에도 신앙심이라고는 가져본 적 없는 그녀였으나, 제 탓에 죽은 알폰소를 떠올릴 때면 다리 부러진 이처럼 엉금엉금 기어 주신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더는 대답하지 않는 이 대신 신에게 용서를 빌고, 알폰소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나는 사후세계 따위는 믿지 않으니 제발 알폰소를 돌려달라고.

움켜쥘 것이 제 왼손과 오른손밖에 없던, 절망에 몸부림쳐 봐야 두 손을 맞잡고 허덕이는 것이 고작이던 기억. 목이 쉬도록 기도를 올리고 용서를 빌다 까무룩 잠이 들면 그대로 아침 햇살을 맞곤 했었다.

이렇게 돌이켜보자면 맨정신으로 주신상을 찾았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정신이 멀쩡할 때는 허울뿐인 신이 아니라 진짜 신을 찾아다녔으니까.’

진짜 신.

죽은 이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게 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알폰소를 살려줄 수만 있다면 샤를로트는 악마라도 제 평생의 신으로 여길 수 있었다.

그렇게 샤를로트의 생명에 걸린 불씨마저 희미해질 즈음 설산 아래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연금술사 가브리엘.

‘그때는 우연이었지.’

아직도 가브리엘을 만났던 일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만약 과거로 돌아와 두 번째로 얻은 삶이 아니었더라면 꿈을 혼동했노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샤를로트는 작은 별장의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밖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렇잖아도 심란한 속내를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서 있는 곳은 화가에게 보낸 답장에 적어 두었던 주소에 있는 별장이었다.

그리고 가브리엘을 만나기 위해 샤를로트가 옮겨 온 곳이기도 했다.

‘만약 가브리엘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제가 직접 되짚어 주어야겠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빗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질 즈음.

창밖에서 마차 멈추어 서는 소리가 들리고, 머잖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아마 샤를로트가 고용했던 화가가 마침내 가브리엘을 데리고 온 것일 터.

“들어와요.”

샤를로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가에 선 그대로 말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로 상념을 거두어야 할 때가 왔다는 뜻이다.

그제야 샤를로트는 몸을 돌렸다.

“데리고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이제 그만-”

그리고 문가에 선 남자를 본 순간,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천천히 로브의 후드를 내렸다.

웃음기 없는 창백한 낯에, 이질적으로 빛나는 금안.

“간만에 뵙습니다, 부인.”

가브리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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