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하나…… 서른둘…… 빌어처먹을 서른셋…….”
해가 지도록 토끼뜀 바퀴 수를 세는 아르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에두아르트 공작저.
샤를로트는 연무장을 열심히 기고 있는 아르노를 지켜보다가, 서른네 바퀴쯤에서 커튼을 쳤다.
촤악!
커튼의 아일렛이 스치는 소리가 사나웠다.
커튼을 친 사람의 표정 역시.
싸늘하게 식은 낯을 한 샤를로트가 입을 열었다.
“알폰소.”
“……예.”
소파에 앉아 있던 알폰소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대답했다.
“환자니까 봐주는 거지만, 저기서 뛰어야 할 사람은 사실 당신이라는 거 알고 있죠.”
“……압니다.”
“정말이지, 아무리 정신이 팔렸다고 해도 손을 날려먹으면 어떡해요! 그것도 검 쓰는 손을!”
아닌 게 아니라, 알폰소의 오른손에는 붕대가 부목과 함께 칭칭 동여매어져 있었다.
손목이 나간 상태에서 검을 휘둘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의사는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향후 한 달에서 두 달간은 오른손을 쓰지 말라고 권고했다.
문제는 알폰소가 고작 개인전 하나를 치렀다는 것이다.
결승까지 감안한다면 앞으로 치러야 할 경기는 못해도 서너 번.
샤를로트는 알폰소가 부상에도 경기를 강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함을 금치 못했다.
“앞으로 경기는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어요!”
“……잊은 것 같은데, 나는 좌수검도 쓸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오른손 시원하게 날려버리지 그랬어요? 어차피 왼손으로 쓸 수 있는데 뭐 하러 오른손을 달고 있어요, 불편하게!”
괜히 말 한번 꺼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알폰소가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며 변명했다.
“그,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은 없잖습니까.”
“아, 그럼 크게 다쳤으면 오른손이 아니라 목이 날아갔겠네요? 그땐 나무라 봐야 들을 사람도 없겠고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결국 알폰소는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그제야 샤를로트는 한숨을 내쉬고는, 알폰소의 곁으로 왔다.
붕대 감긴 손을 매만지는 손길에는 죄책감이 스며 있었다.
사실 그녀가 줄곧 화를 낸 것 또한 미안함의 연장선이었다.
퀸시의 말을 귀담아 듣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알폰소가 이런 일을 겪을 이유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미안해서 그래요. 나 때문에 다친 거나 다름없잖아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상이 깊지 않으니까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거죠. 치명상이라도 입었으면 당신은 분명 나를 원망했을걸요.”
“그렇게 들으니 당신 생각을 하긴 했을 것 같습니다.”
알폰소의 대답에 샤를로트가 픽 웃었다.
“거봐요. 누구나 죽을 때는-”
“여기서 죽기라도 하면 당신을 다시 못 볼 테니까.”
누구나 죽을 때는 탓할 곳을 찾기 마련이라고 말하려던 샤를로트의 입이 우뚝 멈추었다.
정확히는, 굳어들었다.
그녀는 알폰소의 이런 직설적인 화법에 유독 약한 사람이었다.
알폰소가 그 사실을 알고 일부러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는 사실까지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지만, 어쨌든.
저도 모르게 낯을 붉힌 샤를로트가 손을 뗐다.
“……당신은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요.”
“말했잖습니까. 내게는 죽음이 그다지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그러니 신경 쓸 게 있다면 당신뿐입니다.”
알폰소의 말에 샤를로트의 얼굴이 뚱해졌다.
“그것참 내가 좋아할 것 같은 말이군요.”
“칭찬입니까?”
“비꼰 거예요. 스스로를 좀 더 신경 쓰도록 해요.”
“그러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좀 더 신경 써 준다면.”
덧붙는 조건에 샤를로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무슨-”
“그보다 샤를로트.”
그러나 알폰소가 한발 빠르게 말을 잘랐다.
“오늘 승리는 축하해주지 않는 겁니까?”
“……축하라니요?”
“지난번에는 축하해주지 않았습니까. 경기장에서.”
경기장과 축하라는 조합에, 의아해하던 샤를로트의 낯이 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알폰소가 축하를 명목으로 그녀에게 키스했던 것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 그건 당신이 일방적으로 한 거였잖아요!”
“맞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축하해주면 기쁠 겁니다.”
“다쳐온 사람이 축하는 무슨!”
“죄와 공은 서로를 덮을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벌을 충분히 받았으니 상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
샤를로트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 남자…….’
평소에 고지식하게 원칙을 따져 대더니, 덕분에 이런 논쟁에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알폰소의 말이라면 고양이가 멍멍 짖는다는 것도 믿을 샤를로트였기에, 그녀는 더더욱 이런 논쟁에서 취약했다.
결국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샤를로트가 뾰족하게 되물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옳다고 쳐요. 그런데 내가 충분히 벌하지 않았다고 한다면요?”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만큼 벌하십시오.”
대신 상도 함께.
속삭이듯 덧붙인 말이 흘러나온 직후, 샤를로트가 알폰소에게 입 맞추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눠 봐야 알폰소에게 말려들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짐작한 까닭이었다.
경기장에서도 입술을 잠시 맞대는 수준의 짧은 입맞춤에 불과했으니, 이번에도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하기도 했고.
“……!”
그러나 그런 샤를로트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알폰소는 고작 그 정도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깊어지는 입맞춤과, 그런 알폰소를 도저히 밀어낼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서야 샤를로트는 한발 늦게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알폰소에게 말렸던 것은 이미 한참 전이었다는 사실을.
* * *
모두가 깊게 잠든 새벽.
샤를로트는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알폰소가 곧게 누워 잠들어 있었다.
의사가 처방한 약에 들어 있는 수면제 때문이었다.
‘내가 알폰소와 같은 침대를 쓰게 될 줄이야.’
샤를로트와 알폰소는 당연하게 침실을 따로 쓰고 있었다.
알폰소의 침실인 명목상의 부부 침실이 존재하기는 해도 저택이 워낙 넓다 보니, 주인 내외가 각자 침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알폰소가 부부 침실로 오는 대신 서재에 딸린 방에 있는 침대를 줄곧 사용했기에 샤를로트가 부부 침실을 독차지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샤를로트가 자진해서 손님용으로 두었던 침실 하나를 차지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알폰소가 오른손을 다치면서 그의 수발을 샤를로트가 직접 드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신이 이렇게 된 데에는 내 탓이 크니, 내가 당신 수발을 들어줄게요. 오른손을 다쳤으니 불편하잖아요.
명목상으로는 알폰소가 다쳤으니 돕겠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아서였다.
‘퀸시가 또 음식에 독을 탈지도 몰라.’
노하에서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단연 독살이었다.
과거 알폰소도 그렇게 죽었고.
그때도 퀸시는 음식에 독을 탔었다.
‘이번이라고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혹은 다친 틈을 타서 알폰소에게 살수를 보낼 수도 있고. 방식은 다양했다.
그리고 샤를로트는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알폰소를 지키겠다고 찰싹 붙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잠도 같이 자게 된 것이었다.
본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샤를로트를 보다 못한 알폰소가 권유했다.
-불편하게 졸고 있지 말고 이리 와서 편히 주무십시오. 나는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무, 무슨 소리예요. 주인이 침대를 써야죠. 난 괜찮아요.
-정 그렇다면 같이 자는 것으로 합시다. 침대는 넓으니 그리 불편하진 않을 겁니다.
이성은 거절해야 한다고 외쳤으나, 거절하기에는 침대가 너무 편안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잘 수는 없겠지만.’
샤를로트는 매일 몰래 약을 먹어야 했다.
악화된 몸의 상태가 드러나지 않게 가려주는 약으로, 시기를 조금이라도 잘못 맞춘다면 알폰소의 앞에서 피를 쏟게 될지도 모를 터.
따로 방을 쓸 때라면 몰라도, 알폰소와 같은 침대를 쓰게 된 이상 그가 잠든 동안에 약을 먹어야 했다.
‘마침 처리할 일도 있고…….’
샤를로트는 자신의 침실로 건너가 약을 삼키고, 책상의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가브리엘의 노트.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과가 있었는지 한번 볼까.”
가브리엘을 잡을 방법이 담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