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는 그 말을 끝으로 왔던 그대로 떠나 버렸다.
호위가 있고 없고는 그녀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의 품속에는 늘 스스로를 찌를 수 있는 단도가 있었고, 퀸시는 샤를로트를 결코 해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샤를로트가 떠나고, 퀸시 홀로 남은 방.
달칵 소리와 함께 밖을 지키고 있던 드제가 방 안으로 들어와 꾸벅 인사했다.
“주인님, 명령하신 대로 아가씨가 경기장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결국 에두아르트로 갔다는 거군.”
그 빌어먹을 에두아르트.
‘대체 샤를로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퀸시는 도저히 샤를로트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라고 해서 에두아르트에 사람을 붙이지 않았겠는가?
알폰소와 샤를로트 사이는 그렇게 가깝지 않았다. 결혼 전에 이렇다 할 만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샤를로트의 외로움을 달래줄 만큼 알폰소가 다정한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무슨 짓을 했기에 제가 공들여 키운 샤를로트를 날름 훔쳐갔단 말인가?
-퀸시, 나는 더 이상 네가 필요하지 않아.
그 말을 하는 샤를로트를 본 순간 퀸시는 가슴 안쪽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퀸시가 알아 온 샤를로트가 아니었다.
퀸시가 키워 온 샤를로트라면 절대로 먼저 그를 놓겠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샤를로트는 정말로 퀸시를 끊어낸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먼저.
그 사실에 배신감이 홧홧하게 퀸시의 뱃속을 할퀴었다.
샤를로트가 노하를 등지고 집을 나갈 때에도 들지 않았던 감각.
어차피 샤를로트는 제게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감정이다.
퀸시의 턱 안쪽에 힘이 들어가, 턱선이 도드라졌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노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적당히 말로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이래서는 안 되겠군.
드물게 언짢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낯을 건조하게 쓸어넘긴 퀸시가 몸을 틀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드제. 포섭한 놈에게 수단을 가리지 말라고 전해라.”
“정말 에두아르트 공작을 죽이시려는 겁니까?”
“그래. 에두아르트는 살려두면 쓸모가 더 있을 테니 되도록 목숨을 붙여둘 생각이었다만…….”
목숨은 붙여 두고 불구로 만들거나, 혹은 그 못지않은 수준에서 해를 가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만 해도 샤를로트는 자신이 주변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노하로 돌아올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샤를로트와 대화해 본 지금, 퀸시는 고작 그 정도로는 샤를로트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폰소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샤를로트의 눈은 진실한 빛으로 충만해 있었으므로.
그리고 퀸시는 그런 샤를로트의 눈을 잘 알고 있었다.
-난 오빠가 제일 좋아. 노하에서 오빠랑 계속 같이 살고 싶어.
어릴 적, 샤를로트가 노하의 악녀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기 이전.
퀸시가 잠에서 덜 깬 샤를로트의 머리칼을 빗어주는 것이 매일 아침의 일과였던 시절.
사교계 데뷔를 앞둔 샤를로트는 드레스가 반쯤 뒤집어져 종아리가 드러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다 불쑥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에 퀸시는 태연히 책 정리를 이어가며 대답했다.
-그럼 아버지께 잘 보이거라, 샤를. 네가 노하의 이름을 써야 계속 같이 지낼 수 있을 테니.
-그래야지. 물론 그럴 거야. 하지만 노하에 남더라도 결혼하면 같이 살 수는 없잖아.
-그렇겠지. 결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아니니.
-그게 싫다는 거라고. 오빠랑 노하에서 계속 같이 살 방법은 없을까?
철부지 어린애의 소망이었으니 현실성은 없었다.
귀족들은 누구나 결혼을 하고, 특히나 도미닉이 노하를 거느리고 있는 한 샤를로트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할 테니까.
그러나 그 말에 퀸시는 일순 손을 멈추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샤를로트의 낯 위로 쏟아지는 하오의 햇살이 무슨 빛깔이었는지 목격하고 만 것이다.
아몬드 같은 소녀의 눈매에 담긴, 제 것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녹안.
그 다정한 빛깔.
수레국화가 만개한 여름날 풋내처럼 한껏 미소 지은 소녀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계속 우리 둘만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낯에 만연한 호의를, 퀸시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어쩌면 일생에 처음으로 가져 본 애착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감정이 그의 안에 싹튼 순간이었으므로.
돌이키자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오래 신어 길이 든 신발에도 애착은 드는 법이니까.
손수 키운 동생 하나쯤 진심으로 아끼는 게 뭐가 놀랍겠는가.
하여 퀸시는 샤를로트를 악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샤를로트에게 감히 청혼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탐욕스러운 도미닉이 샤를로트를 쉽게 정략혼으로 팔아버리지 못하도록.
어느 순간부턴가 샤를르토는 더 이상 퀸시를 예의 그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봐야 샤를로트는 퀸시의 옆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에두아르트 공작을 죽이고, 샤를로트를 노하로 데려온다. 원치 않으면 강제로라도.”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 못 쓰게 된 신발이라도 신발장에는 넣어둘 수 있겠지.
아무렴 버리는 것보다는 마음이 안온하리라.
“샤를이 너무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렇게 뇌까리며, 경기장 쪽을 바라보는 퀸시의 녹안이 서늘하게 빛났다.
* * *
샤를로트가 퀸시와의 대화를 마치고, 경기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경기가 끝났을 즈음이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에두아르트 진영의 대기실을 찾아갔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인파를 헤치는 걸음은 글자 그대로 대중없는 모양새였다.
“알폰소! 알폰소는 어디 있죠?”
퀸시에게 보인 여유로운 모습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객기였다.
샤를로트는 퀸시가 한 짓을 듣자마자 당장 경기장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니까.
퀸시가 무슨 수작을 꾸몄으리라 짐작하는 것과, 그걸 직접 듣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설마 크게 다치지는 않았겠지?’
알폰소의 실력이라면 정말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지만, 이미 한번 겪어본 상실은 이성보다 본능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게다가 하필 자신이 경기장에 없던 지금 이런 일이 생기다니.
불안이 목을 졸랐다.
덕분에 샤를로트는 금방 에두아르트의 대기실까지 다다랐지만, 문고리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아 더듬거리며 온 체중을 실어 문을 밀어야 했다.
문틈이 벌어지자마자, 방 안쪽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란이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치료부터 해야 합니다, 각하!”
“마님은 저희가 찾아오겠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리고,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소란은 그대로 뚝 그쳤다.
막 경기를 마친 직후였는지 겨우 보호구만 벗은 차림인 알폰소와, 그런 그를 뜯어말리기 위해 들러붙은 기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놀라서 굳어 있는 것 역시 전부.
다른 기사들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니, 들어올 수 없다고 하는 게 좋을까.
그녀를 알아본 알폰소가 곧장 샤를로트를 끌어안고 말았으니까.
놀란 샤를로트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폰소?”
대답은 없었으나 그의 기분은 알 수 있었다.
퀸시의 말대로라면 알폰소는 경기장에서 샤를로트가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보았을 테니까.
맞닿은 심장은 쉼 없이 달려온 샤를로트의 것 못지않게 다급히 뛰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신경 쓰지 말라는 샤를로트의 당부를 조금도 지키지 못했다는 방증.
그리고 동시에, 그가 살아 있음을 선명하게 알려주는 지표.
‘알폰소는 멀쩡해.’
품에서 희미한 피비린내가 나기도 했고, 소란이 그치기 전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알폰소가 완벽히 멀쩡한 몸은 아닌 듯했지만.
적어도 샤를로트가 오는 내내 지우지 못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제야 이성이 돌아오고, 샤를로트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너지려는 샤를로트의 몸을 알폰소가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긴 재회였다.
* * *
안타깝게도 포옹은 그리 길지 못했다.
대기실에 흐르던 정적을 참지 못하고 아르노가 끼어들어 이렇게 질문한 탓이었다.
“저, 돈독하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혹시 박수 좀 쳐도 되겠습니까? 각하를 모신 이래 이렇게 감격스러운 장면은 처음이라…….”
아르노는 솔직한 감격의 대가로 연무장을 토끼뜀으로 50바퀴 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