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석의 광경을 목격한 순간 피가 차게 식었다.
‘저게 샤를로트일 리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여기에 샤를로트가 있을 리 없다.
그녀는 오늘 황궁에 다른 볼일이 있어 직관은 힘들겠다는 말을 전했었으니까.
‘하지만 저게 진짜 샤를로트라면?’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어도 여자가 입은 드레스가 화려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 샤를로트는 수행원 하나 없이 외출했다.
-사람도 많은 황궁이잖아요. 호위까지 데리고 다니면 너무 유난스러워 보이니 혼자 다녀올게요.
라며, 호위를 데려가라는 알폰소의 권유도 한사코 만류하고서.
그러니 만약 샤를로트가 말한 다른 볼일이 일찍 끝났더라면, 그녀가 알폰소의 경기를 지켜보러 관중석으로 왔을 수도 있을 터.
저기서 끌려가는 여자가 정말로 샤를로트가 아닐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알폰소는 그대로 차게 얼어붙어 버렸다.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샤를로트가 누차 했던 당부까지도 전부 잊어버리고서.
“경기 중에 한눈을 팔면 안 되지. 공작이라고 안전한 곳에서 호의호식하다 보니 그런 기본적인 것도 잊어버렸나?”
그리고 브뤼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일부러 노하의 악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알폰소를 흔들기 위해서였으니까.
-경기장에 오르거든 적당히 샤를로트 노하, 내 동생의 이야기를 꺼내라. 관중석에 내 동생이 있다고 짚어 주기만 하면 다른 건 어련히 알아서 진행할 테니까.
알아서 한다는 게 이런 뜻일 줄은 몰랐군.
적당히 주의나 돌리려는 줄 알았더니, 샤를로트 노하를 직접 끌고 갈 줄이야.
‘검을 맞대보니 확실히 알겠다. 내 원래 실력으로는 이자를 이길 수 없다.’
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브뤼노도 잘 알았다.
그리고 눈앞에 선 알폰소의 검에는 감히 그가 범접할 수 없는 숙련도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귀족으로 태어나서 고상한 칼질이나 했을 인간 아닌가.
전쟁터에 오래 나가 있었다고 한들 총사령관인 그가 직접 검을 쓸 일이 몇이나 있었겠는가?
“이런 난전판에, 당신같이 젠체하는 인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채앵!
브뤼노가 휘두른 대검이 알폰소의 검 위로 맞부딪쳤다.
조금 전 경기 시작 직후와 비슷한 그림이 그려졌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큭!”
버거워하기는커녕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브뤼노의 대검을 받아냈던 알폰소의 검이, 대검에 실린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부자연스럽게 꺾였다.
정통으로 받아내지 않고 검면을 따라 힘을 흘려냈어야 했는데, 알폰소가 한눈을 파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고 온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만 탓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들 엄두도 내지 못할 대검이 강한 힘으로 내리찍었으니, 그걸 고스란히 받아낸 손목이 멀쩡할 리는 만무했다.
‘젠장.’
알폰소는 손목에 순간 가해지는 끔찍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시선으로 잠시 놓쳤던 관중석을 다시 훑을 뿐.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붉은 머리 여자는 사라져 있었다.
‘관중석 밖으로 끌려나간 건가?’
만약 그 붉은 머리 여자가 샤를로트가 맞는다면, 호위 한 명 없는 상태였을 테니 끌고 가는 힘을 막기란 어려웠을 터였다.
샤를로트가 별일이 있겠느냐며 호위를 한사코 거절하기에 하는 수 없이 내버려 두었는데.
‘그 결정을 이토록 후회하게 될 줄이야.’
식은땀이 알폰소의 이마를 적셨다.
낭패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손목에 가해진 끔찍한 통증도 한몫했다.
‘아무래도 손목이 나간 것 같은데.’
하필 나가도 검을 쥐는 오른쪽이라니.
다른 때였더라면 무리하기보다는 신중하게 검을 다루는 쪽을 택했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서둘러 경기를 끝내고 샤를로트가 무사한지 확인해야만 했다.
알폰소는 통증을 무시하고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그토록 덤덤하던 그마저 식은땀 맺힌 이마를 찌푸리게 될 만큼 강렬한 고통이었으나 알폰소는 무시했다.
브뤼노가 한 가지 잘못 판단한 것이 있다면, 알폰소가 실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착각이었다.
그는 본인이 지휘하는 대부분의 전투에 직접 참전했다.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부상도 허다하게 입었다.
옆구리가 뚫린 직후에도 겉으로는 멀쩡한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갑옷을 입는 그를 보고 아르노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정도였으니까.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의 알폰소에게 몸의 상처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쓸 거리가 아니었다는 사실 정도.
‘샤를로트에게 한 소리 듣겠는데.’
그토록 당부했는데 다쳐 오다니, 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았느냐고 화를 낼까.
아니면 어젯밤처럼 자신이 다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끌어안아 줄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군.’
어느 쪽이든 좋았다.
부디 그녀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알폰소는 심호흡을 하고 검을 들었다.
손목의 통증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게 된 지 오래.
이윽고, 검이 첨예하게 경기장의 기류를 갈랐다.
* * *
와아아아!
유난히 뜨거운 경기장의 함성이 울렸다.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경기장 근처의 건물들도 그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에 힐끗 창밖을 돌아본 붉은 머리칼의 여자, 샤를로트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날 이렇게 끌고 온 이유가 뭐야. 퀸시?”
그러자 맞은편에 선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느리게 시선을 굴렸다.
지독하리만치 무기질적인 녹안은 드물게 온기를 띠고 있었다.
“끌고 오다니. 간만에 보는데 퍽 섭섭한 말을 하는구나.”
“별로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을 협박해서 데려왔으니 끌고 온 거나 다름없지.”
“그런가.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더라면 정말로 사람을 시켜서 널 끌고 올 걸 그랬군.”
그게 훨씬 편했을 텐데.
중얼거리는 퀸시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그는 조금 전, 알폰소의 경기가 시작하기 직전 어디론가 향하는 것으로 보이던 샤를로트를 붙들었다.
-간만이구나, 샤를. 얘기 좀 할까.
-……퀸시? 제정신이 아닌가 본데, 이거 놔.
-되도록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란다. 사랑하는 네 남편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알폰소를 이용한 퀸시의 협박은 샤를로트에게 아주 잘 먹혔다.
빌어먹게도.
차갑게 식은 퀸시의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아직도 에두아르트 공작, 그 작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샤를로트?”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지. 난 그를 사랑해.”
“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니 신혼이 퍽 즐거운가 보구나. 그도 널 그만큼 사랑해주는 모양이지?”
퀸시의 질문에 샤를로트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런 신변잡기식 질문은 됐어. 용건이나 말해.”
“그래, 우리 사이에 더 말을 돌릴 필요는 없겠지.”
그는 뱀의 입이 벌어지듯 느리게 미소 짓더니, 말했다.
“노하로 돌아와라, 샤를로트.”
“……정말 한 치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이네. 더 들을 가치도 없겠어.”
자신은 이만 가보겠다며 샤를로트가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어진 퀸시의 말에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지금 에두아르트 공작이 경기를 하고 있던가? 부디 그가 경기에 잘 집중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내가 그를 위해 퍽 재밌는 걸 준비했거든.”
“……뭐? 무슨 짓을 한 거야!”
“별 건 아니란다. 연극이지. 붉은 머리칼의 귀부인이 누군가에게 붙들려 가는 연극.”
지금쯤 경기장에서는 샤를로트처럼 꾸며진 여자가 사람들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브뤼노에게도 그 사실을 넌지시 귀띔해 두었으니 알폰소가 분명 그 모습을 목격하리라.
“거리가 있으니 경기장에서 그 귀부인이 누군지 알아보기는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정신이 팔리기라도 한다면-”
“그만!”
결국 샤를로트의 낯이 와락 구겨졌다.
퀸시가 뭔가 방해 공작을 쓸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치졸한 수라니.
샤를로트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알폰소라면 분명 그 장면을 외면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샤를로트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은 퀸시가 그런 추잡한 수를 썼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네가 비열하고 졸렬한 인간이라는 것은 잘 알겠어. 그런데, 그걸 왜 나에게 얘기하는 거지?”
알폰소를 함정에 빠트려 놓고 자신에게 대화를 하자고 한 퀸시의 의중을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다는 점이 샤를로트를 불안하게 했다.
그 사실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퀸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네게 말해주어야지, 샤를.”
이 모든 게 전부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