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알폰소가 첫 개인전을 치르는 날이었다.
“각하, 마님 말씀 기억하시죠? 절대로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방어구에 뭔가 수작을 부려 놓은 건 아닐까?”
“저는 물도 의심스럽습니다.”
에두아르트의 기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며 대기실을 북적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덩치 커다란 것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여간 산만하지 않아서, 알폰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샤를로트의 조언이라면 내가 제일 많이 들었을 거다. 그러니 적당히들 하고 가라.”
“에이, 그래도 마님 말씀 한 번이라도 더 기억나게 해드리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르노 경의 말이 맞습니다. 저도 마님께서 조언해주신 덕분에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다른 때였더라면 기사들을 말렸을 쟝-자크마저 저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두아르트의 기사들은 다 같이 단체전을 마친 이후 개인전 역시 참가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딱히 순위를 노리지 않고, 참가에 의의를 두며 즐기기로 했다.
개중 가장 먼저 개인전을 치른 것은 쟝-자크였는데, 그는 경기 중에 손을 크게 다칠 뻔했다.
그것이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칠 뻔’한 사건에서 그친 것은 어디까지나 샤를로트의 조언 덕분이었다.
-쟝-자크 경, 경기에서 이 건틀릿을 끼는 게 어때요?
-건틀릿은 불편하고 무거워 대인 경기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추천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알폰소와 얘기를 해 봤는데, 퀸시라면 경들에게 큰 부상을 입히려고 들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퀸시의 목표는 알폰소겠지만, 다른 에두아르트의 기사들 역시 그의 노림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거라고 샤를로트는 말했다.
-나는 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니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전 상대가 대검이나 철퇴 같은 걸 들고 나올 수도 있잖아요.
자칫 잘못했다가는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는 상대에게 손이 으스러질 수도 있으니 보호구를 끼라는 뜻이었다.
에둘러 말했지만 이 정도면 다소 직접적인 권유였다.
다른 기사였더라면 몸을 좀 더 보호하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해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쟝-자크는 다행히 샤를로트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단체전을 겪은 뒤 그녀의 조언을 신뢰하고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존심을 운운하며 객기를 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여 그는 불편을 감수하고 건틀릿을 끼고 나갔는데, 샤를로트가 말한 대로 상대가 철퇴를 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집요하게 손을 공격하려고 들어서 난감했지.’
물론 쟝-자크 역시 상당한 실력자였으니 결국 경기에서 이기기는 했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와 별개로, 어떻게든 자신의 손을 아작내겠다는 의지로 덤비는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마 건틀릿이 없었더라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되었을지도 모를 일.
그 뒤로 쟝-자크는 샤를로트의 말이라면 뒤구르기 다섯 번, 앞구르기 열 번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마님의 조언은 정말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현명하신 분입니다.”
“샤를로트는 현명한 사람이지. 언제부터 너희가 그렇게 샤를로트의 말을 맹신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만.”
짐짓 진중한 표정으로 샤를로트를 칭찬하는 쟝-자크의 말에 알폰소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처음 결혼할 때는 다들 썩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 있더니, 결혼하고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듯 샤를로트에게 신뢰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는 건지.
이제는 도리어 자신에게 샤를로트를 믿어야 한다며 권하는 모습을 보자니 퍽 우스웠다.
물론 마음에 드는 변화였다.
‘샤를로트는 좋은 사람이니까.’
결국 이렇게 되는 거지.
자신도, 다른 이들도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샤를로트는 1년짜리 계약이 끝나면 에두아르트를 떠날 사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을 만큼 에두아르트에 헌신적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아마 그녀가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면 결혼 때보다 더한 비난이 쇄도하겠군.’
웃어야 할지, 찡그려야 할지.
알폰소는 무심코 어젯밤을 떠올렸다.
보기보다 한참은 말랐던 여자를 퍽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던 밤.
길었던 포옹은 샤를로트의 당부로 끝을 맺었다.
-퀸시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못해도 당신에게 부상을 입히고 싶어 하겠죠.
샤를로트는 그렇게 말하며, 알폰소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 않고 그를 방해할 수 있을 만한 치졸한 방법이 스무 가지 정도 떠오른다고 덧붙였다.
-경기를 단순한 대련이나 전투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단체전은 사람들의 시선이 직접 닿지 않는 곳에서 열렸으니 여태 실감이 되지 않았겠지만, 개인전은 직관하는 시선이 백 개가 넘게 있잖아요. 그럼 자연스럽게 관중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테죠.
에두아르트의 약점이라고 하면 그것밖에는 없었다.
쟝-자크는 물론 알폰소까지 모두가 전장에서만 싸웠지 이런 검투를 겪어본 적이 없는 까닭에, 주위의 반응에 다소 취약하다는 것.
관중석에서 야유만 던져도 손에 힘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샤를로트는 그런 점을 가장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중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대가 뭐라고 도발하든 절대로 주의를 돌려서는 안 돼요.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이었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기본적이었기에 간과하기도 쉬운 말이었다.
때마침 들려오는 북 소리에 알폰소는 상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생각에 잠길 때가 아니라, 경기장으로 올라가야 할 때였으므로.
“다녀오마.”
“손 조심하십쇼!”
“마님의 조언을 잊지 마시고요!”
한 마디씩 던지는 기사들을 뒤로한 채 알폰소는 경기장으로 올랐다.
“와아아아!”
“에두아르트다! 에두아르트!”
귀를 먹먹하게 하는 함성 소리와, 고막을 찢는 듯한 북 소리.
그제야 그는 샤를로트가 단단히 당부한 이유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이라면 정말 집중하기 힘들겠군.’
하지만 집중이 안 된다고 질 실력이었더라면 샤를로트에게 소원을 들어달라는 조건 따위는 걸지도 않았으리라.
구경거리가 되는 감각이 썩 유쾌하진 않았으나 그는 그런 사소한 것에 세울 자존심 따위는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알폰소는 대검을 들고 나온 상대를 보며,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팔 소리가 울리고, 심판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터졌다.
“경기, 시작!!”
챙!
그 직후 검날이 맞붙었다가 떨어졌다.
대검을 쓰는 알폰소의 상대, 브뤼노가 알폰소에게 곧장 달려든 것이다.
상대를 파악해 보기 위해 한번 검을 맞대어 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순서.
브뤼노가 제 몸만 한 대검을 한 손으로 붕붕 휘두르며 이죽거렸다.
“고매하신 에두아르트의 공작님이라고 해서 얼마나 대단하신지 구경 좀 하려고 했더니, 이거 그냥 기생오라비군. 이런 힘으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힘은 모르겠고 기생오라비라, 확실히 그쪽보다 내 외모가 나은 것 같긴 하군.”
“뭐, 뭐라고?”
브뤼노는 척 보기에도 우락부락한 몸에, 험악한 인상이었다.
알폰소는 그런 브뤼노를 가볍게 훑으며 말했다.
“몰랐는데 아내가 내 얼굴을 퍽 좋아해서 말이지. 기생오라비라는 말도 듣기 나쁘지 않군.”
“하, 이 더러운 귀족 놈이 감히 날 농락해?”
“사실을 말했을 뿐.”
알폰소가 한 말에 거짓은 없었다.
최근 알게 된 것 중 샤를로트가 알폰소의 얼굴을 퍽 좋아한다는 사실도 있었으니까.
그녀가 이따금 알폰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에 알게 된 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모르는 브뤼노에게는 그저 알폰소가 이죽거리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도발은 이만하면 됐고.’
브뤼노는 확실히 힘이 좋았지만, 힘만으로 검투 결과가 결정되진 않는다.
알폰소가 다시 검을 치켜들었을 즈음.
씩씩대던 브뤼노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이봐, 공작님. 그렇게 사랑하시는 아내가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나?”
“허튼 수작 마라. 내 아내는 일이 있어 오늘 경기에는-”
“아니, 저길 보라고. 저기 저 적발 여자. 그 유명한 노하의 악녀가 아닌가? 가만 두면 끌려가게 생겼는데?”
적발 여자.
그 말에 알폰소의 낯이 차게 식었다.
눈앞에 상대를 두고 고개를 돌리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브뤼노의 말에 그는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
붉은 머리 여자가 보였다.
거리 때문에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그녀가 발버둥 치며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