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트가 참전한 첫 번째 단체전은 여러 가지 의미로 소란을 일으켰다.
우선은 에두아르트의 실력을 내심 얕보던 이들의 생각을 단숨에 바꾸어 주었으며, 또한 고위 귀족인 에두아르트 공작이 직접 참가했다는 것이 여러모로 의미가 컸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베르망두아가 사람들을 여럿 경기장에 매복시켜 두었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밝혀지면서 유랑 검사 집단인 베르망두아의 실체 또한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유랑 검사들이라고 해서 내심 동경했는데, 그저 살인자 집단이었을 뿐이라니!”
“그런 놈들을 한 놈도 죽이지 않고 쓰러트렸다는 게 대단하지 않나?”
“역시 명문가는 다르다는 거지!”
베르망두아가 노린 것은 두 가지였다.
운 좋게 알폰소를 죽일 수 있다면 죽이고, 그러지 못하더라도 사람을 죽이게끔 만들어 에두아르트를 실격 처리하는 것.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이런 난감한 경우의 수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들이 모두 패배하고, 심지어는 한 명도 죽지 않아 에두아르트는 무사히 우승하며, 도리어 베르망두아의 실체가 드러나고 마는 경우.
알폰소와 루드빅은 베르망두아의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물론 제압하는 과정에서 피가 적잖이 나긴 했지만.
루드빅이 전투가 끝나고 하나하나 응급처치를 해준 덕분에 죽은 이는 없다고 했다.
왜 거점에 알폰소 혼자 나타났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쨌든 이토록 다사다난해도 승리는 승리.
에두아르트는 당장 연회라도 벌일 분위기가 되었다.
“아니, 그깟 경기 좀 이겼다고 음식을 몇 개나 만드는 거야? 뭐, 나야 좋지만.”
“내버려 둬라, 아르노. 주방장이 근래 이럴 일이 없었다고 슬퍼했다더라.”
사실 정작 경기에 나갔던 이들은 별생각이 없었던 터라 조금 얼떨떨해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검술 대회를 아예 우승한 것도 아닌데 무슨 축하를 이렇게나?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에두아르트의 사용인들이 ‘축하할 만한 일’에 목이 말라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토록 기다렸던 결혼식도 안 하셨는데!’
‘각하께서는 가뜩이나 부산 떠는 걸 싫어하시니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즐기겠어!’
에두아르트 공작저는 말하자면 늘 평화로운 곳이었다.
이렇다 할 연회를 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모실 주인이라고는 한 명뿐인 데다 뭔가를 즐기는 성격도 아니니.
좋게 말하자면 조용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
뭔가 변화가 있고 바쁜 일이 생겨야 일이 즐거울 것 아닌가?
겸사겸사 맛있는 것도 좀 먹고 말이다.
그나마 최근에 알폰소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결혼식 준비를 하게 되지 않을까 나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치르지 않았다.
하여 사용인들은 연회의 ‘연’만 나와도 눈에 불을 켜고 건수를 잡으려 하게 된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기사들이 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에두아르트 공작저에는 간만에 포식의 장이 열렸다.
그렇게 모두가 즐겁게 웃고 떠드는 와중.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 * *
“콜록, 콜록!”
샤를로트의 어깨가 거칠게 흔들렸다.
발작적인 기침이 멎자, 샤를로트의 입을 가렸던 손이 피로 물든 것이 드러났다.
‘몸이 그새 더 안 좋아졌어.’
알폰소가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졌다는 걸까.
기뻐할 일이지만 이러다가는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다.
‘더는 의원이 준 약으로 버티기가 힘드니…….’
샤를로트는 베호닉에서 올라오기 전에 의원에게 약을 대량으로 얻어 두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에두아르트에 올라온 이상 의원을 볼 수는 없을 테니까.
샤를로트가 아무리 은밀하게 의원을 부르고, 함구하라고 명령한다고 해도 에두아르트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전부 알폰소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지.’
온 사방이 감시자들이라는 뜻이다.
예전이었더라면 실비아를 통해서 의원을 몰래 데려왔을지도 모르겠지만…….
‘실비아는 아마 죽었겠지.’
퀸시의 명령대로 첩자 짓을 하며 열심히 소식을 물어 날랐는데, 샤를로트가 그 뒤통수를 치고 떠나 버렸으니.
슬프지는 않다. 유감스럽다는 생각이 들 뿐.
샤를로트는 본디 타고나기가 그렇게 비정한 인간이었다.
‘알폰소의 일에 이토록 연연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샤를로트는 손을 씻은 뒤 수건에 물기를 닦고, 서랍으로 다가갔다.
자물쇠로 잠가 둔 서랍을 열자 손때 묻은 낡은 노트가 드러났다.
가브리엘의 노트였다.
첫 장을 열자 심각한 악필로 채워진 종이가 보인다.
그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파스칼을 위해서라도 해야만 해.]
하지만 비장한 첫 문장과 다르게, 노트에 쓰인 내용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파스칼’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뿐.
‘파스칼이라는 건 그 형제겠지.’
폭발 사고로 죽었다는 가브리엘의 형제.
아마도 그에 대한 기억이 하나라도 더 남아 있을 때 그를 추억하기 위해 발버둥 치듯 남긴 기록 같았다.
하여 샤를로트가 그 기록에서 건질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녀가 무신경하게 스쳐지나간 기록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악필을 알아보기가 어려워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샤를로트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바로 검술 대회에 대한 언급.
[파스칼이 내년에는 검술 대회에 가 보자고 했다. 옆집 아르고가 가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 듯했다. 아니면 검술 대회는 핑계고, 그저 수도에 가 보고 싶었던 것이거나.]
생팔은 물류가 많이 오가는 도시라 시골이라고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어폐가 있었지만, 그래도 수도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아무래도 검술 대회는 황궁의 경기장에서 열리기도 하니 더욱 호기심이 일었을 터.
[황궁을 그려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으니, 아마 가더라도 검보다는 목탄을 들겠지. 네가 가지 못하면 나라도…….]
검술 대회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 끝이 난다.
그저 파스칼을 그리워하는 형제의 마음만이 느껴질 뿐, 크게 대단할 것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갔었지.’
그런데 이것이 만약 단서가 될 수 있다면?
공작저로 돌아오는 동안, 샤를로트는 가브리엘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만약 자신이 본 사람이 정말로 가브리엘이 맞는다면, 어떻게 그를 만날 수 있을지.
그의 행적을 추적할 방법에 대하여.
그러다가 문득 노트의 내용이 떠오르면서, 이런 가설이 생각난 것이다.
‘가브리엘은 연구자였어. 사실 떠돌아다니는 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가브리엘의 연구실에 있던 그 많은 연구 도구들.
그걸 다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과연 녹록한 일이겠는가?
생각해 볼수록 가브리엘이 떠돌아다닌 이유가 묘연했다.
일단 샤를로트가 만났을 때 가브리엘은 설산 아래에 정착해 살고 있었으니까.
-충분히 떠돌아 다녔으니, 이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 말은 곧 유랑한 이유가 존재하고, 당시에는 그 이유가 충족되어 정착해 살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유랑한 이유는 어쩌면.
‘파스칼을 위해서일지도 몰라.’
노트에 적힌 검술 대회 부분 중 마지막 문장.
[네가 가지 못하면 나라도…….]
가브리엘은 어쩌면 파스칼이 생전에 가보고 싶어 했던 곳들을 대신 직접 방문하는 것으로 형제의 소원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 노트에 적힌 내용을 이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목표는 검술 대회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 가브리엘을 찾는 것.
‘그 이후까지는 내 몸이 못 버틸지도 몰라.’
샤를로트는 노트를 펼쳐 놓고 한 줄씩 베껴 적으며 내용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트 필사가 거의 끝날 즈음.
‘이거라면…… 먹힐지도 몰라.’
그녀는 제법 괜찮은 계획을 하나 떠올렸다.
* * *
그 시각, 노하 저택.
“주인님, 이번에 포섭했던 크라온 용병단과 툴루즈 가의 일원들을 전부 처리했습니다.”
“수고했다, 드제. 베르망두아는?”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보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아마 사흘 내로 죽을 겁니다.”
“그래, 붙잡힌 놈들은 조금 더 신중해야지. 괜히 급하게 움직였다가는 꼬리가 밟힌다.”
그렇게 말하는 퀸시의 목소리는 느긋했으나, 그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까드득, 퀸시의 손 안에서 주사위 두 개가 마찰하며 이가 갈리는 듯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에두아르트 공작을 죽일 기회는 또 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