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적인 금색.
평범한 금안을 가진 사람은 있어도, 저토록 기이하게 빛나는 금안은 흔치 않다.
자못 맹금류의 동공을 떠올리게 하는 선명한 노란색.
샤를로트는 두 번의 생을 살면서 그런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딱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
‘가브리엘!’
연금술사, 설마 그가 여기에 있는 건가?
어쩌면 자신이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샤를로트는 홀린 듯이 방향을 바꾸어 인파 속을 파고들었다.
주변에서 눈살을 찌푸리든 말든 미친 듯이 사람을 헤쳐 가며 자신이 조금 전 보았던 이를 뒤쫓았다.
조급해진 머릿속은 끊임없이 가브리엘에 대한 정보를 되짚었다.
‘가브리엘은 계속 떠돌아 다녔다고 했어.’
수도에 머무른 기간이 있었다고도 했으니, 어쩌면 진짜 가브리엘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도 자신처럼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이 시간대의 가브리엘일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살려줄 수 있을까?’
헛된 희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놓을 수가 없었다.
알폰소를 살리기 위한 술식을 발동하기 전, 가브리엘은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
술식 자체의 크기도 상당했던 터라 준비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고, 덕분에 샤를로트는 가브리엘과 자잘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사실 대화라고 해 봐야 술식에 대한 질문을 하고 가브리엘이 그에 답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가브리엘. 만약 내가 제물이 된다면, 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건가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자의 온전한 신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부인은 술식이 완성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겁니다.
제물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라고, 가브리엘은 말했다.
어쩐지 조금은 씁쓸하게.
그에 샤를로트는 삶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리고 답했다.
-적어도 장례를 치를 일은 없겠군요. 잘됐네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쪽이 훨씬 깔끔하지 않은가.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만약 샤를로트가 술식이 발동된 그 순간에 죽었더라면 아마 이런 미련 따위는 갖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알폰소를 다시 만난 순간에조차 샤를로트는 미련이 없었다.
당시의 샤를로트에게 이 시간대의 알폰소는 그저 타인일 뿐이었다.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어떤 말로를 맞게 될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는 낯선 사람.
그는 분명 샤를로트가 사랑했던 이와 같은 사람이었지만, 엄밀히 말해 완벽히 같을 수는 없었다.
이 시간대의 알폰소는 샤를로트와 함께했던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는 샤를로트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
샤를로트와 함께 지냈던 그 모든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그 둘이 같을 수 있을까.
-차라리 잘됐어. 이대로 그는 그의 삶을 살면 되겠지.
라고 말하며, 샤를로트는 새롭게 돌아온 삶을 스스로에게서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하여 욕심내지 않을 수 있도록.
하지만 어느새 이 삶은 샤를로트에게 지나치게 가까워져 버렸다.
알폰소는 샤를로트와의 기억이 없음에도 그녀에게 다가오기를 서슴지 않았다.
덕분에 외면하고 싶어도 샤를로트는 알폰소가 제 기억 속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도둑 누명을 쓴 자신을 두둔하고 나선 알폰소를 볼 때나, 제 것이라며 선물을 한 아름 보내는 그를 보았을 때 등등.
어느새 알폰소는 샤를로트에게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조금 까칠하고 제멋대로이지만 잔정이 많은 소피아를 볼 때면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거품을 물어 가며 샤를로트와 알폰소의 결혼을 반대하던 루드빅이었지만, 이제는 쭈뼛거리며 “마님,” 하고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스워 웃음이 나곤 했다.
집사인 레안드로도, 하녀장도, 다른 가신들도 모두 샤를로트에게 친절했다.
물론 예전에도 깍듯하기야 했지만.
지금은 뭐랄까.
-……알폰소, 다들 나를 좀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것 같아요.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이 베호닉에서 무엇을 했는지 다들 알고 있으니까.
-그걸 다들 안다고요? 반지에 대한 건 기밀 아니었어요?
-물론 반지 이야기는 가신들에게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반지만 찾아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샤를로트가 알폰소에게 헌신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이전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알폰소를 위해 베호닉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마저 드러난 지금, 샤를로트를 적대하는 이는 에두아르트의 역적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샤를로트는 처음으로 사용인들에게서 신뢰받는 주인이 되어 보았다.
어차피 돈을 주고 부리는 입장에서 신뢰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의외로 그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정말로.’
정신을 차려 보니 멀리 떨어트려 두었던 삶이 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미련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 시간은, 이 삶은 내가 아니라 알폰소를 위한 거지.’
그러니 언감생심 이 삶을 욕심내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주 작은 미련일 뿐이다.
정말로, 제 죽음을 피할 수가 없겠느냐고 딱 한 번 입 밖에 내어볼 정도의 미련.
샤를로트는 하염없이 자신이 본 그림자를 뒤쫓았다.
그러나 아무리 나아가도, 금안의 사내는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잃은 것처럼 샤를로트가 고개를 돌린 순간.
“-트, 샤를로트!”
팔이 덥석 붙들렸다.
사람들 사이를 훑던 샤를로트의 시선은 그러고도 한 박자 늦게 제 팔을 붙든 사람을 향했다.
“……알폰소?”
그녀는 알까.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척 보기에도 그녀는 여유가 없었다.
희게 질린 낯에, 차가워진 손끝. 알폰소를 보고도 불안한지 시종일관 사람들 사이를 훑는 시선까지.
어쩌면 악몽의 그림자를 쫓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혹은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몽롱해 보이기도 했다.
만일 알폰소가 관중석으로 향하던 와중 어디론가 정신없이 가는 샤를로트를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한동안은 계속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녔을 터.
천만다행으로 샤를로트는 알폰소를 보자 금세 평소대로 돌아왔다.
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퍼뜩 깨달은 것이다.
스치듯 본 금안 하나에 올가미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홀린 듯이 돌아다니고 말았다.
그녀는 정말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알폰소를 보고는 놀람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거예요?”
“당신을 쫓아왔습니다. 어디론가 급히 가기에 따라와 보았는데, 이렇게 멀리 올 줄은 몰랐지만.”
“아, 잠깐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샤를로트의 낯빛은 썩 밝지 못했다.
꿈에서 깨어난다고 해서 그 여파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듯, 조금은 혼란스러운 얼굴.
알폰소로서는 처음 보는, 그리하여 그를 언짢게 만드는 얼굴이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드는 거지.’
아는 사람을 보았다는 말은 거짓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보통 이런 인파 속에서 볼 만한 것은 사람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샤를로트를 이토록 동요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 사실이 못내 언짢아, 알폰소는 샤를로트의 차가운 손끝을 가볍게 쥐어 당겼다.
“나는 기껏 숲에서 구르며 승리를 쟁취해 왔더니, 당신은 내겐 관심도 없으니 퍽 아쉽습니다. 축하는 해주지 않는 겁니까?”
“아, 맞아.”
그제야 샤를로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당신 승리했죠, 맞아요. 내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축하한다는 말도 못 했네요. 그보다 몸은 괜찮은 거죠?”
“물론입니다. 조금도 다치지 않았으니까.”
“피를 뒤집어쓰고 나와서 정말 깜짝 놀랐다고요. 처음에는 당신인 줄 알아보지도 못했어요.”
혼자 나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소피아 전하가 아주 펑펑 울더라며 샤를로트가 너스레를 떨었다.
조금 전 보인 동요가 민망해 나름대로 노력해 본 것이었으나, 알폰소는 어딘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축하는 그게 다입니까?”
“……성의가 없게 느껴졌나요?”
“그럴 리가. 단지 내가 기대하는 게 있었을 뿐입니다.”
“기대라니, 무슨-”
무슨 기대를 했느냐고 샤를로트가 물으려는 찰나.
알폰소가 가볍게 그녀에게 키스한 뒤 떨어졌다.
“축하해줘서 고맙습니다, 샤를로트.”
“……이건 내가 축하한 게 아니라 축하를 강탈한 거 아니에요?”
“어쨌든 받았으면 된 거 아닙니까.”
샤를로트가 인정할 수 없다며 붉어진 얼굴로 날을 세웠다.
첫 번째 경기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