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10분 정도밖에는 남지 않은 상황.
관중석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영 힘을 쓰지 못할 줄 알고 기대도 안 했던 에두아르트가 생각보다 선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열광한 것이다.
“저들이 그간 승전보를 울려왔던 바로 그 기사들이라면서!”
“역시 대단하군! 이런 경기를 내 어디 가서 보겠나!”
“기사님들은 이런 경기에는 나오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기사들은 대부분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내던지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자칫하면 명예가 실추될 수 있는 검술 대회 따위에 나오겠는가?
툴루즈 가문에서 출전한 이들 역시 제대로 된 기사 작위를 받은 이는 하나도 없었기에 호기롭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이유로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말이다.
게다가 지금 숲에서 구르고 있는 이들이 다른 가문도 아닌 에두아르트의 기사들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을 자극했다.
“에두아르트 정도 되는 가문이 이런 경기에 나올 필요는 없을 텐데.”
“폐하께서 신분 고하 없이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대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더군. 그걸 몸소 보여주기 위해 출전한 게 아니겠는가?”
“그저 보여주기든, 아님 진정으로 어울리려는 생각이든 머리 위에서 구경이나 하는 귀족 나리들보다는 훨씬 호감이군그래!”
사람들은 강자에게는 늘 너그럽다.
그런데 그게 이런 경기 따위에는 나올 일도 없을 귀족이라니,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있나.
에두아르트에 돈을 걸었던 이들이 앞장서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다른 이들 역시 그 흐름에 휩쓸려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하다못해 소피아 역시 조금 전까지 그렇게 불안해하던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에두아르트의 기사들이 저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요! 이러다 정말로 이기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이겨야죠. 제가 걱정 말라고 했잖아요.”
샤를로트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소피아는 그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영상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샤를로트는 표정과 달리 속마음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뭔가 이상해.’
지금 영상구에서 나오는 장면은 아르노와 쟝-자크가 쓰러진 툴루즈 가문 사람들을 회수해 나무에 묶어놓고, 뒤늦게 달려온 크라온 용병단을 때려잡는 장면이었다.
알폰소와 루드빅이 찢어져 나온 이후로 에두아르트 측의 영상은 오직 아르노와 쟝-자크만을 내보내고 있었으니.
쉽게 말하자면 둘로 나뉜 이후 알폰소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런 경기에서는 그렇게 낙천적인 생각만을 가질 수는 없었다.
퀸시가 무슨 수를 써 두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단순히 아르노 경과 쟝-자크 경이 선전하고 있으니 그 장면을 내보내는 거라면 좋겠지만.’
경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까지 에두아르트가 선점한 거점은 오직 하나.
다른 하나를 선점하지 못하면 경기는 무승부로 돌아간다.
물론 그러더라도 큰 피해는 없겠지만, 그러면 에두아르트 팀은 단체전을 최소 4번 치러야 한다.
‘우승을 세 번 거두어야 개인전으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
치르는 경기의 수가 늘어날수록 퀸시가 마수를 뻗어 올 가능성은 높아진다.
당연히 위험도 올라갈 테고.
그러니 되도록 연승을 거두어 3번 안에 마무리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문제는 다른 거점에는 아직 베르망두아의 깃발이 꽂혀 있고, 심지어는 알폰소가 오래도록 화면에 잡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샤를로트의 오랜 경험상, 이런 경우 좋은 결과를 본 적이 없었다.
‘불안하다.’
무승부가 나도 좋으니,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샤를로트가 저도 모르게 입 안쪽을 깨물었을 즈음.
둥둥둥!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여유를 부릴 틈은 없다.
‘제발, 제발……!’
샤를로트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말씀드리는 순간, 거점에 누군가 등장했습니다! 초록 옷일까요? 아니면 파란 옷일까요!]
영상에서 들려온 사회자의 목소리에 샤를로트가 반짝 눈을 떴다.
소피아 역시 손에 땀을 쥐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보자, 분할된 화면 중 베르망두아의 깃발이 꽂힌 거점에 고정된 영상이 보였다.
아무도 없는 공터나 다름없던 공간에, 누군가가 나타나는 것도.
“붉은 옷인가?”
“아니, 저건 옷 색이 아니라 피잖아!”
“저, 저 피는 다 뭐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군중이 술렁이기 시작했지만, 영상은 아무 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다가온 이가 품에서 깃발을 꺼내, 초록 깃발 대신 꽂는 것을 보여줄 뿐.
“파, 파란 깃발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뒤로, 경기의 끝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경기가 종료된 시점에 파란 깃발이 두 개! 두 개 거점을 모두 점령했습니다! 이번 경기는 에두아르트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진행자의 말과 함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깃발을 꽂은 에두아르트의 기사가 투구를 벗었다.
조각 같은 얼굴과 함께 땀에 절어 흐트러진 은발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신분의 증명이 있을까.
사람들은 강자에게도 열광하지만, 멋진 외모 따위가 열기를 더욱 북돋아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폰소가 투구를 벗은 것은 일종의 화룡점정이나 다름없었다.
제 것인지, 혹은 상대의 것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는 피를 뒤집어쓴 채 등장한 의문의 사내가 수려한 외모의 에두아르트 공작이었다니!
“오늘부터 나는 에두아르트에만 돈을 걸겠어!”
“자네 미쳤나? 나도 걸어야 하네! 내 몫을 남겨둬!”
“고위 귀족 나리들은 다 젠체하는 샌님들인 줄만 알았는데 말이야!”
여론은 완전히 에두아르트에게 호의적으로 기울었다.
이 열기는 샤를로트가 노렸던 바로 그것이기도 했다.
‘에두아르트의 인기가 좋아지면 자연스럽게 황제의 인기도 올라갈 테지.’
그러면 황제인 브누아는 더더욱 에두아르트를 가까이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브누아와 에두아르트의 사이는 가깝지만 이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 제 동생조차 정략결혼으로 팔아넘기기를 주저하지 않는 황제가 사촌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아낄 리 있겠는가?
토사구팽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그래서 샤를로트는 일부러 에두아르트의 인기를 치솟게 만든 것이다.
멀리하기보다는 가까이하는 게 이득이라는 판단이 서면, 제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에두아르트를 팽하지는 못할 테니까.
‘여기까지는 의도한 대로 됐어.’
그리고, 소피아 역시 감격의 눈물을 쏟고 있었다.
“정말, 정말 에두아르트가 이겼어요! 흐어엉! 이겼어!”
“여기 손수건으로 눈물 좀 닦으세요.”
“흐으엉, 고마워요!”
소피아는 이제 아예 손수건에 얼굴을 박고 울고 있었다.
그 뒤로 ‘패앵’ 하고 코 푸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샤를로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도 벅차게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으니까.
‘알폰소.’
그가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투구를 벗은 알폰소가 영상구를 올려다보았을 때.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저 눈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어떤 빛깔을 띠는지 그녀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샤를로트는 빠르게 박스석을 빠져나갔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럽지는 않던데, 다치지는 않았겠지?’
알폰소가 피를 워낙 많이 뒤집어쓰고 있었던 탓에 그가 다쳤는지조차 불분명했다.
게다가 함께 갔던 루드빅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샤를로트를 조금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검술 대회를 앞두고 속성 강의를 해 주느라 며칠 가깝게 지냈더니, 이제는 다른 기사들에게도 퍽 정이 들었다.
깐깐하지만 잔정이 많은 루드빅도, 망나니처럼 보이지만 사려 깊은 아르노도, 딱딱해 보이지만 사실은 제일 말랑한 성격인 쟝-자크도 누구 하나 다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처음 에두아르트에 들어올 때는 마뜩잖다는 눈빛을 보내던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샤를로트를 향한 시선이 퍽 부드러워져 있음을 그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게 변화라는 거겠지.’
얼른 모두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다.
그렇게 샤를로트가 관중석을 지나던 찰나였다.
오직 대기실만을 향해 달리던 샤를로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어?”
군중 속에서 무언가를 스치듯 발견한 탓이었다.
방금 인파 사이로 사라진 사람.
“그 사람, 눈이…….”
분명히 이질적인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