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자크는 그제야 상황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경기장의 지도를 먼저 받은 거로군.’
아마 이 팀은 돈보다 정보를 주겠다는 조건으로 매수한 모양이다.
그리고 얻어낸 정보를 이용해 먼저 거점을 차지하고, 함정을 펼쳐 에두아르트 팀이 근처에 오지 못하고 애먼 자리만 빙빙 돌도록 유인한 것이다.
마치 불을 놓듯이 함정을 피해 달아나면 또 다른 함정을 열고, 또 다른 함정을 여는 방식으로 말이다.
툴루즈 가문은 분명 명문 기사 가문이었지만 명문이라는 말에 비해 그 기세나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꽤 오랫동안 조롱거리가 되어 온 상황.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검술 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다고 여겼나 보군.’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얻는 명예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기사가 기사도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사로서 자부심을 지닌 쟝-자크에게는 툴루즈 가문이 다소 안타깝게 보였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쟝-자크의 생각이고, 그의 옆에 있는 기사는 아닌 것 같았지만.
뚜둑, 뚜둑.
시원하게 손을 꺾은 그가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놈들 전부 때려잡고 저기에 깃발 꽂으면 된다는 거지?”
으흐흐.
마치 먹이를 보는 듯한 아르노의 웃음소리가 경기장에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영상구 너머에도.
아르노와 쟝-자크가 툴루즈 가문의 기사들과 검을 맞대기 시작하자, 관중석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더 이상 도망칠 길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툴루즈 가문의 기사와 대장이 이를 악물고 배수진을 펼쳤던 것이다.
게다가 검집에 얻어맞았던 기사가 화살을 맞았던 동료를 데리고 돌아와 전투에 합세하자, 경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저 기사 화끈하잖아!”
“이름이 아르노 조엘이라고?”
“나 얘기 들은 적 있어! 에두아르트 가에서도 광견이라 불린다던데? 다들 눈만 마주쳐도 슬슬 피한다고!”
물론 이건 헛소문이다. 에두아르트의 가신들은 이래봬도 아르노를 상당히 아꼈다.
아르노가 하는 행동이 광견이나 다름없다는 것에 동의는 하겠지만.
샤를로트는 영상구를 보며 픽 웃었다.
‘뭐, 명성은 이런 식으로 만드는 거니까.’
에두아르트의 기사들은 잘 모르는 샤를로트가 보기에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단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아 명성이 없을 뿐.
다른 기사들은 실력이 좋으면 대개 금세 유명해지곤 하는데, 그들이 드러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그들이 실력을 자랑할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10년간 전장에 나가 있었는데 대체 어디서 무예를 뽐내겠어?’
전장에서 들려오는 것은 누가 잘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이겼느냐뿐이다.
그리고 승전보는 모두 총사령관이었던 알폰소의 이름을 달고 나가고.
그러니 그 휘하 기사들은 상대적으로 묻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에두아르트 내부에 있었다.
바로 그들의 주인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 스스로 강하다는 자각이 별로 없다고 해야 하나.
-각하도 못 이기는 실력을 어디에 뽐내겠습니까? 저는 됐습니다.
-각하와 하는 대련이 아니라면 저는 내키지 않습니다.
밖에 나가서 무력을 보여주어야 명성이든 뭐든 생길 텐데, 다들 이렇게 말하며 사양하기 바쁘니 말이다.
물론 그들도 어디 가서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절대적인 강자 알폰소가 존재하는 이상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사라면 누구든 한 번쯤 겪는 단계인 우월감에 도취되거나 할 틈이 없다는 이야기다.
‘사실은 저렇게나 강한데 말이지.’
2명이면 어떻고 4명이면 어떻단 말인가.
쪽수에서 밀리는 일이 발생하면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 쪽이 더 세면 돼요.
-……더 세지 못하면?
-소피아 전하는 연인하고 헤어져야겠죠.
그 말에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피아 황녀의 불같은 성격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겠군.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던 것 같은데.
‘괜한 기우였지.’
아르노와 쟝-자크가 저렇게 잘하고 있으니, 알폰소 쪽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샤를로트는 한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소피아도 내내 마음을 졸이더니, 에두아르트의 약진을 보고 마음을 얼추 놓은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 에두아르트의 깃발이 거점에 꽂힙니다! 툴루즈와 에두아르트의 치열한 접전! 그 승리는 에두아르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와아아아!!”
진행자의 말에 관중들이 환호하고, 때마침 영상구에는 거점에 깃발을 꽂고 투닥거리는 두 기사의 모습이 잡혔다.
주변에 널브러진 툴루즈 가문의 기사들도 함께.
첫 번째 거점에 에두아르트의 파란 깃발이 펄럭이는 순간이었다.
* * *
그 시각, 숲의 반대편에서는 파란 옷을 입은 두 기사가 나무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아르노와 쟝이 잘해주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들은 잘하고 있을 거다. 우리가 해야 할 것에만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알폰소의 말에 재깍 대답한 루드빅이 힐끔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 정도 그들을 따라오나 싶던 영상구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과연 마님의 말대로군.’
샤를로트가 가장 우려한 것. 그것은 영상구를 조작하는 행위였다.
-분명 경기장 안에는 사각지대가 존재할 거예요.
-영상구의 범위가 닿지 않는 곳 말입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범위에서 빼 버린 곳이라고 해야겠죠. 아마 경기가 시작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영상구가 더는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특히 알폰소를.
경기장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영상구가 찍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러니 의도적으로 알폰소를 영상구에서 제외해 버리고, 손을 쓰려 들 것이다.
-체스로 쳤을 때 첫 번째가 룩, 두 번째가 비숍이라고 한다면 세 번째 패는 퀸일 거예요.
퀸은 체스에서 가장 강한 말이다.
또한 비장의 무기이기도 하다.
-알폰소를 직접 죽이거나, 못해도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게 방해하려 들겠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서.
-그러니 도리어 앞선 두 개의 패보다 간단할 수도 있어요. 사각지대에서 죽이겠다고 대놓고 덤빌 수도 있을 테니까.
샤를로트의 경고를 귀담아 들은 루드빅은 조금 전부터 줄곧 긴장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그는 자부했다.
그런데 앞서가던 알폰소의 말이 돌연 속도를 늦추더니 완전히 정지했다.
“각하? 무슨 일입니까.”
“경기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그제야 루드빅이 제 허리춤에 달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시간은 일각 정도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리 여유롭진 않습니다. 빨리 끝내야겠는데요.”
“그래, 서둘러야겠군.”
알폰소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검을 뽑았다.
“각하, 검은 갑자기 왜-”
의아함에 질문하던 루드빅의 입이 우뚝 멈추었다.
알폰소가 검을 뽑자마자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싸는 기척을 느낀 것이다.
그것도 적은 수의 기척이 아니었다.
‘못해도 열!’
바짝 긴장한 루드빅의 검집에서 빠르게 검이 뽑혀 나오고, 나무 사이에서 다각다각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왔다.
녹색 옷과, 허리에 짤랑이는 유랑 검사의 표식.
“베르망두아……!”
루드빅이 인상을 찌푸리자, 다가온 이가 빙긋 미소 지었다.
“이거, 귀한 분들을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 같은 길거리 왈패가 고매하신 기사님들과 검을 나눌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글쎄, 왈패들이라고 하는 게 좋겠군. 제법 많은 수가 온 것 같으니.”
“하하. 다들 그 유명하신 에두아르트 공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아서 말이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그 유명한 에두아르트 공작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
유랑 검사 집단 베르망두아.
이들은 말이 좋아 유랑 검사지, 사실은 그냥 범죄자였다.
적당히 자유로운 유랑 검사라는 말로 포장을 해두고 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할 뿐.
그들이 실질적으로 하는 일은 청부 살인이었다. 유랑을 빙자해 의뢰를 받고 사람을 죽이러 다니는 전문가 집단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검술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주요 고객층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일 뿐.
그들은 우승 따위에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월척이 들어왔단 말이지.’
눈앞의 저 잘난 사내를 죽이는 것만으로도 베르망두아 전원이 한평생 떵떵거리며 먹고살 수 있는 돈을 주고, 그가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게 하기만 해도 그 1/3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이건 반드시 먹는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베르망두아에서도 특별히 실력이 걸출한 이들뿐.
제아무리 에두아르트 공작이라고 해도 멀쩡히 살아나갈 길은 없었다.
못해도 크게 다쳐 경기를 포기하게 될 터!
“너무 원망은 마십시오. 저희가 악의로 이러는 건 아니니까요.”
“죽은 이는 원망을 못 하는 법이지.”
알폰소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이 빛살처럼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