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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84화 (87/122)

분명 심상찮은 요구가 나오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소원을 들어달라니.

그 별것 아닌 말에 심장이 왜 그렇게 철렁했을까.

샤를로트는 자신이 일순 표정을 살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곧장 태연을 가장했지만 눈앞에서 일어난 일은 이미 알폰소에게 전해졌을 터.

“……그건,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샤를로트는 애써 말을 돌리고 책상에서 내려왔다.

좋은 밤 보내라는 말을 하고 어떻게 침실까지 돌아왔는지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알폰소가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리고 실패했다는 것도.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건가.’

회상을 마친 샤를로트는 화병을 안은 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폰소와 대화를 마친 다음 날 소피아를 만났고, 또 그 다음 날인 오늘이 되었으니 이틀이 지난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샤를로트는 아직까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했다.

바로 그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또한 샤를로트가 오늘 하루 종일 꽃꽂이를 한 원인이기도 하고.

알폰소의 요구사항은 명확했다.

검술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면 소원을 들어달라.

하지만.

‘알폰소의 소원이 뭔지 모르잖아.’

무슨 소원을 빌고 싶은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당연히 알폰소는 알려주지 않았다.

-당신 말마따나 내가 우승을 할 수 있을지도 명확지 않은데 벌써 소원을 알려주는 것은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핑계는 좋지만, 분명 소원을 숨기기 위해서이겠지.

그리고 샤를로트는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자꾸만 주저하게 되는 걸까.

알폰소가 내게 해가 되거나, 무리한 부탁을 할 것도 아닐 텐데.

‘왜…….’

온 집 안의 화병을 전부 바꾸는 동안 샤를로트는 저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게 마지막 화병이지.’

알폰소의 집무실에 놓는 화병.

샤를로트는 어깨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이 없는 집무실은 주인의 성격대로 다소 고루하리만치 정돈되고 무거운 느낌을 주었다.

유일하게 트여 있는 것이 책상 뒤편으로 난 커다란 유리창 정도.

노을이 창으로부터 길게 쏟아져 방을 밝히고 있었다.

‘여기에 화병을 하나쯤은 놓고 싶었지.’

알폰소가 마침 외출하고 없으니, 돌아오기 전에 살짝 놓고 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화병을 누가 놓았는지, 알폰소가 모를 리는 없겠지만.

괜히 생색을 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또 괜한 칭찬을 들으면 부끄러울 것 같고…….’

어쩐지 그날 밤 이후로는 알폰소를 마주하는 것이 조금 껄끄러워진 기분이었다.

하여 원래대로라면 알폰소의 집무실에 화병을 제일 먼저 놓을 생각이었는데.

-이거, 2층 계단에 놔줘.

-이번 화병은 각하의 집무실에 두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응, 그런데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하려고.

-그 말씀만 벌써 다섯 번째인 건 알고 계신 거죠……?

이런 과정을 겪다 보니 가장 나중이 되어 버렸다.

돌이키자니 조금 멋쩍어 샤를로트는 화병을 내려놓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냥 대충 해도 될 걸, 쓸데없이…….”

“당신이 한 겁니까?”

“헉!”

그리고, 바로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그 바람에 샤를로트의 어깨가 크게 튀고, 내려놓던 화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나 샤를로트가 애써 한 꽃꽂이가 망가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를 등 뒤에서 단단히 받치고, 꽃병을 잡은 손이 있었으니까.

“미안합니다. 이렇게까지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알폰소.”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얼굴이 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샤를로트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 수 있는 얼굴이.

샤를로트는 저도 모르게 풀어진 얼굴을 했다가, 그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닫고 서둘러 낯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놀랐잖아요! 왜 이렇게 인기척도 없이 다녀요?”

“당신이 생각에 잠긴 것 같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샤를로트는 그제야 자신이 화병을 놓기 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떠올려냈다.

“……그때부터 날 보고 있었어요?”

“보고 있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을 뿐입니다.”

알폰소의 말에 샤를로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그거죠. 다음부터는 그냥 알려줘요. 사람 민망하게 놀래지 말고.”

“다음부터는 그러겠습니다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요?”

“혹시라도 내가 당신 고민을 방해했다가, 당신이 마음을 바꾸면 안 될 테니까.”

샤를로트는 그제야 알폰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검술 대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샤를로트는 조금 더 고민해 보겠다며 자리를 피했었으니까.

“아직도 고민 중인 겁니까?”

“……그래요.”

“시간은 남았으니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검술 대회 공고는 이제 막 돌았잖습니까.”

알폰소의 말은 옳았다.

검술 대회까지는 2주가량이 남았으니, 샤를로트에게 아직 시간은 많이 있었다.

단지 그녀가 이런 고민을 안고 있는 것이 불편할 뿐.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고 하면 알폰소가 이해해줄까.

아니, 우스운 가정이다.

‘이건 어차피 승낙해야 하는 일이야.’

그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질질 끌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리석은 고민이다. 답지 않은 고민이고.

그냥 결정을 내리자.

샤를로트가 그렇게 다짐한 찰나.

“그보다 손을 다친 것 같은데. 조심하십시오.”

알폰소의 손이 샤를로트의 손을 감쌌다.

어제와 달리 꽃꽂이를 하느라 군데군데 베인 흔적이 있는 손이었다.

하지만 단도를 다루면서도 다치지 않는 손이 꽃꽂이 좀 했다고 다쳤을 리 없다.

샤를로트가 고민에 잠겨 한눈을 파느라 손을 베인 것이었다.

“실수한 것뿐이에요. 그리 아프지도 않고요.”

“그래도 치료는 제때 해야 좋습니다. 의원에게 보이는 것이-”

“정말 괜찮다니까요!”

의원이라는 단어에 지레 놀란 샤를로트가 황급히 손을 뺐다.

저도 모르게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뱉어 놓은 스스로가 도리어 놀라고 말았다.

“……미, 미안해요. 실수였어요.”

“괜찮습니다.”

“내가 의원을 좀 꺼려요. ……좋지 못한 기억이 있어서.”

좋지 못한 기억 따위는 없지만 샤를로트는 거짓을 말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알폰소는 샤를로트의 말을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를 꺼리는 게 아니라면, 내가 치료해주어도 괜찮겠습니까?”

“치료를 당신이 한다고요?”

“나도 타인에게 내보이기 꺼리는 상처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전장에서 지내다 보니 피가 조금만 나도 혹여 곪을까 치료를 하는 습관이 들었다면서, 알폰소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간단한 처치를 할 수 있는 소독솜과 거즈, 붕대 따위가 보였다.

그는 샤를로트를 앉혀 놓고 손의 상처를 꼼꼼히 치료해 주며 말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거든 내게 오십시오. 의원은 아니어도 웬만한 상처는 돌볼 줄 압니다.”

“……이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닌데.”

“샤를로트, 당신은 스스로를 조금 더 신경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을 신경 쓰는 나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면.

덧붙는 말은 덤덤했다.

샤를로트의 손을 치료하는 손길은 조심스러웠으며, 오가는 말들은 황혼 저물듯 그저 고요할 따름.

알폰소는 샤를로트를 두고 다정하고 섬세하며 사려 깊다고 했지만 샤를로트가 볼 때 그건 알폰소에게 붙어야 할 말들이었다.

고작 작은 상처 하나를 지나치지 못하는 다정함.

그걸 돌보는 섬세함과 이후의 상처도 쉽게 지나치지 말라는 사려 깊은 말들까지.

알폰소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런 수식어에 어울리겠는가?

하여 샤를로트는 제 손바닥 따위에 시선을 고정하는 사내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며,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말았다.

‘대체 누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습게도 그제야 샤를로트는 자신이 왜 그의 요청에 대답할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이 사람에 대한 마음이 커지는 게 두려웠구나.’

이 마음이 커지는 만큼 살고 싶다는 욕망도 억누르지 못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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