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역시 자신이 평소답지 않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귓가에 맥박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손끝에 닿는 연한 살갗은 뜨거웠고, 또한 작았다.
작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것이 과연 올바를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는 그리 느꼈다.
‘작군.’
얼굴도, 머리도, 눈과 코, 입술까지 모든 게 그랬다.
샤를로트와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었던 적이 있었나?
알폰소의 손은 샤를로트의 뺨을 감싸고도 남아, 그녀의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손끝에 걸리는 머리칼의 감촉은 강물에 손끝을 담갔을 때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부드럽게 살갗을 훑는 느낌.
잠자리에 들기 전 찾아온 까닭에 샤를로트에게서는 목욕을 마친 이후면 으레 나는 향유 냄새가 났다.
동요하는 눈동자는 비 맞은 버드나무 같았으며, 그를 부르는 샤를로트의 목소리는 짓무른 자두처럼 시었다.
오감이 전부 샤를로트에게 쏠려 있었다. 이토록 선명하게 그녀의 존재를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샤를로트의 존재가 선명해질수록 원초적인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그 더운 살갗에 숨을 묻고 싶다거나, 그 팔을 제 어깨에 두르게 해 무게감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었다.
머리칼 끝에 입을 맞추고,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붉어진 얼굴을 보고 싶었다.
스스로를 잃는 기분이라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과거의 알폰소 리누스 에두아르트였더라면 이런 욕망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을 테니.
‘언제부터였던가.’
이러한 욕망을 처음 느낀 것이.
반추하노라면 아마도 생팔에서였던 것 같다.
휘청이는 샤를로트를 보고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녀를 당겨 안았던 순간.
가지로부터 나뭇잎을 우드득 뜯어내듯 거침없었던 갈취자의 손길은 욕심껏 샤를로트를 품으로 끌어 왔다.
빈 품을 가득 채우는 뜨끈한 부피감.
어딘가 그릇된 감각이 빠듯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샤를로트가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라거나, 아르노를 부르는 샤를로트의 목소리에 울컥 부아가 치밀었던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제대로 된 인간이었더라면 분명 샤를로트의 안위를 제일 먼저 생각했을 텐데.
‘내가 아버지를 많이 닮긴 했나 보군.’
이본느에게는 안타깝게도 알폰소는 그녀의 예언대로 자랐다.
제 아비와 다를 바 없는 욕망을 지닌 인간으로.
그 사실에 신음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한번 눈 뜬 욕망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샤를로트와 시선을 맞대는 순간이라거나, 그 미소를 마주하는 숱한 순간들에.
알폰소는 그때마다 경건함이나 올곧음과는 거리가 먼 감각이 뇌리를 아득하게 채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이따금 견디지 못하고 손을 뻗고 마는 것이다.
그래, 꼭 지금처럼.
“솔직하게 말하자면, 뭘 해야 당신이 더 수치스러워질지 궁금합니다.”
“……날 싫어하지 않는 게 맞아요?”
샤를로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그 부조리가 우스워 알폰소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게 아니라면 당신은 내색하는 법이 없잖습니까.”
“세상에 소문을 내야겠어요. 에두아르트 공작은 부인의 수치를 감싸줄 줄 모르고 부추기는 무뢰한이라고.”
“그 말에 틀림이 없으니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정말…….”
샤를로트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낯은 여전히 붉었다.
‘정말 이런 건 내 취향이 아니란 말이야.’
그녀는 누군가를 당황시키는 쪽이었지, 당황하는 쪽이 아니었다.
당연히 마주하는 상황에서 여유를 잃는다면 그건 샤를로트가 아니어야 했다.
뻔뻔함은 샤를로트의 장기였으니까.
그러니 아마 다른 때였더라면 여느 때처럼 태연하게 굴 수 있었을 것이다.
알폰소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더라면.
‘왜 저런 표정을 하는 거지.’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취향을 잘 알았다.
그건 결코 자신이 될 수 없었다.
과거 샤를로트는 이런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꽃꽂이를 하던 중 꽃이 다 떨어져 정원을 지나던 찰나였다.
-각하, 궁금한 게 있습니다. 각하는 취향이라는 게 있으십니까?
-아르노 경은 예의와 상식이라는 게 있으십니까? 각하께 무슨 그런 질문을,
-아니, 궁금하잖아. 나는 각하께서 뭘 가리는 걸 본 적이 없단 말이야. 브로콜리도, 피망도, 치커리도 다 드시던데.
-그냥 경이 편식을 심하게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맞긴 한데, 각하께서 딱히 뭘 좋아한다고 말씀하시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너는 있냐?
그 말에 아르노와 대화를 나누던 상대, 쟝-자크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쟝-자크는 아르노를 핀잔하기는 해도 아르노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고민해준다는 점에서 그와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거봐! 그러니까 궁금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각하, 취향이라는 게 있으십니까? 이상형 같은 거 말입니다.
다른 때였더라면 평소처럼 아르노가 헛소리를 하는구나 생각하고 지나쳤을 테지만, 이상형이라니.
이건 샤를로트도 궁금했다.
‘알폰소한테 이상형이라는 게 있으려나?’
그래서 그녀는 답지 않게 담벼락에 찰싹 붙어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분 건지.
평소였더라면 아르노의 헛소리를 무시했을 알폰소는 쟝-자크처럼 고민에 잠겼다.
-취향이라면, 있는 것 같다.
-오오! 뭡니까!
-좋은 사람.
-…….
아르노의 표정이 순식간에 불충해졌지만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쟝-자크마저 아르노의 심정에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각하, 좋은 사람이란 너무 포괄적인 개념이 아닙니까? 조금 더 명확히 말씀해주시는 게.
-그게 전부인데 뭐라고 하겠나. 좋은 사람. 그게 다다.
기혼자한테서 무슨 이상형을 찾느냐며, 알폰소는 두 사람을 핀잔하고 사라졌다.
아르노는 원했던 대답이 따로 있었던지 적잖이 투덜거렸으나 샤를로트에게는 저 말이 그 어떤 설명보다도 명확하게 다가왔다.
‘좋은 사람이라면, 결코 나는 아닐 테니까.’
굳이 따지자면 ‘나쁜 사람’ 축에 속하는 샤를로트로서는 가망조차 없어지는 말이었다.
그런 알폰소의 취향이 시간을 돌아왔다고 해서 달라졌을 리는 없고.
‘평가가 조금 나아졌다고는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알폰소처럼 올곧은 인간의 눈에 자신은 여전히 교활하고 뻔뻔해 보이겠지.
분명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왜 당신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을까.’
알폰소의 마음보다, 이런 행동에 흔들리는 자신이 더 괴로웠다.
‘이래선 안 돼.’
욕심을 가져선 안 된다.
알폰소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래야 했다.
샤를로트는 마음을 다잡고 알폰소를 밀어냈다.
“……아무튼, 그래서 검술 대회에 나가 주겠다는 거죠?”
알폰소는 샤를로트의 뺨을 감쌌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도로 샤를로트에게로 돌렸다.
“아직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내 판단이 옳다면서요?”
“그렇다고 내가 반드시 응해주어야 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예상치 못한 답변에 샤를로트가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당신 사촌동생의 일인데도요?”
“내가 브누아의 말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
“대체 무슨 대화예요, 이게?”
브누아처럼 소피아를 정략결혼 시키는 데 동의하진 않지만 소피아를 위해 나설 생각도 없다니?
샤를로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자, 알폰소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검술 대회에 에두아르트 공작이 참가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 부탁이기도 하고, 소피아의 문제이기도 하니 한 번쯤 나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 맞죠?”
“단지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수지요?”
샤를로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가 기껏 대회에서 우승해서 소피아를 위한 소원을 빈다면, 나는 무얼 얻습니까?”
“……소피아 전하의 행복?”
“당신은, 소피아가 아니라 내 행복을 빌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물론 그렇긴 한데.
샤를로트의 기민한 감이 불길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꼭 알폰소가 아니더라도 앞에 사설이 길어지면 뭔가 심상찮은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거예요?”
“별것 아닙니다.”
알폰소는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내가 우승하거든 당신이 내 소원 하나를 들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