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82화 (85/122)

결국 그녀는 안전한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소피아 황녀를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물론 예전이라고 해서 소피아의 죽음을 방관하려 한 건 아니다.

그녀가 죽으면 알폰소가 힘들어할 테니까.

하지만 예전이었더라면 샤를로트는 소피아에게 좀 더 안전한 도주를 권하거나, 다른 방법을 떠올려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브누아의 허락을 받아내지 않고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룰 수 있을 만한 방법을 말이다.

그건 분명 소피아의 사랑을 이루어 줄 수는 있겠지만, 소피아가 아끼는 현재의 삶을 지킬 수는 없을 터.

샤를로트는 결국 그녀답지 않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텐데.”

성격 많이 변했네, 참.

샤를로트는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저질러 버린 걸.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퀸시로부터 알폰소를 지키고, 검술 대회 우승을 하게 만든다.”

그러려면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사실 그게 문제였다.

그건 다름 아닌 알폰소와 관련된 문제였으니까.

* * *

찰칵.

가위 날이 맞물리고, 꽃대의 끝이 잘려 나갔다.

화원에 앉아 알맞게 다듬은 꽃을 화병에 꽂는 샤를로트의 옆에 선 아르노가 아리송한 표정을 했다.

“마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밖에 계셔도 되는 건지…….”

“베호닉에서야 내가 방에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에두아르트에서도 그럴 수는 없잖아요. 보는 눈이 몇인데. 그리고 생각보다 몸이 괜찮아졌어요.”

베호닉에서 줄곧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낸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된 듯했다.

‘좀 쉬면 나아질 것 같기는 했지.’

과거로 돌아온 직후에도 그랬다.

피를 토하고 쓰러졌지만, 일주일 정도 푹 쉬자 몸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좋아졌었다.

지금도 같은 원리로 몸이 회복된 것 같았다.

‘물론 건강이 악화되기 전처럼은 어렵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겉으로 들킬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었다.

덕분에 알폰소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에두아르트로 돌아와서도 전처럼 생활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르노는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치료가 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조심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꽃꽂이 좀 한다고 크게 악화될 건강도 아니라는 거죠. 알폰소에게 건강이 나빠진 걸 들킬 일은 없으니 괜찮아요.”

“……생팔에서 소득이 없었던 겁니까?”

“실질적인 소득은, 글쎄요.”

그 기록은 가브리엘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샤를로트는 화병에 마지막 꽃을 꽂고,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도와주고 비밀을 지켜주어서 고마워요, 아르노 경.”

아르노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울 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각하를 위해서였으니. 각하를 위해서라도 건강을 챙기십시오.”

“물론 그렇게 할게요.”

샤를로트는 화병을 끌어안고 몸을 일으켰다.

에두아르트에서 그녀의 소일거리는 집 안 곳곳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랬다.

그녀는 손으로 하는 일들을 제법 좋아했고, 그런 의미에서 꽃꽂이는 그녀의 시간을 소비하기에 더없이 좋은 활동이었으니까.

계절별로 다른 꽃과 장식들을 놓는 것은 그녀의 작은 취미였다.

그리고 샤를로트가 생각이 많을 때면 늘 하는 일이기도 했고.

길어지는 복도 그림자를 따라 걷는 샤를로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이름만이 선명했다.

‘알폰소.’

시간을 돌아온 이래로 단 한 번도 머릿속에서 지워본 적이 없는 이름.

다른 때였더라면 알폰소를 어떻게 떠나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샤를로트가 지금 하는 고민은 술식과는 관련이 없는 고민이었으니까.

소피아에게 검술 대회 이야기를 하기 전날 밤.

샤를로트는 알폰소를 찾아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피아에게 검술 대회에 알폰소를 내보내겠다는 계획을 얘기하기 전, 알폰소에게 먼저 밝히는 게 순서였으니까.

생팔에 몰래 다녀왔던 밤 이후 샤를로트는 알폰소와 한 가지 약속을 더 했다.

“뭘 하든 캐묻지 않을 테니, 뭔가 하기 전에는 꼭 내게 말해주십시오. 이것만큼은 나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범법행위를 저지를까 봐 그러는 건가요?”

“부부 사이에는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된다고 누가 그러던데.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샤를로트는 궤변이라고 말했지만 알폰소는 강경했다.

“어쨌든 지금은 내가 당신 남편이 아닙니까. 그런데 일개 기사보다 당신의 일을 더 모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계약 관계라고는 해도 나는 당신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싶지 않습니다.”

긴 말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른 사람이 나보다 당신에 대해 많이 아는 게 싫어!”가 되겠지만, 어쨌든 모든 말은 포장하기 나름인 법.

그런 의미에서 알폰소는 말을 포장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고, 알폰소가 해가 밤에 뜬다고 해도 믿을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강경한 논리에 얼떨떨하게 설득당했다.

‘생각해보면 알폰소는 늘 자신이 할 수 있는 도리를 지키려고 했으니까.’

결혼 이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달 선물을 보낸 게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 고지식하고 올곧은 면모를 생각하면 꽤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여 샤를로트는 마침 밤늦게까지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던 알폰소를 찾아가, 검술 대회에 대한 계획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소피아를 위해 검술 대회에 나서달라는 겁니까.”

“그래요. 솔직히 내키지 않겠지만, 그리고 퀸시를 생각하면 위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게 가장 괜찮은 방법 같아요.”

“당신이 허투루 판단할 리 없으니, 당신 판단이 옳을 겁니다.”

혹시라도 알폰소가 질색하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지 걱정했는데, 알폰소는 생각보다 쉽게 샤를로트의 말을 수긍했다.

“……나를 그렇게 믿는 건가요?”

“당신은 소피아를 위해 생팔까지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샤를로트는 순식간에 양심이 아파졌다.

“하지만 꼭 생팔의 일이 아니더라도 당신을 신뢰했을 겁니다. 당신은 내 생각보다 훨씬 잘해주고 있으니까.”

“……별로 대단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데요.”

“반지의 일을 해결한 것도 그렇지만, 당신이 보여준 관용이 있지 않았습니까.”

알폰소는, 처음 샤를로트에게 내렸던 평가를 전면 철회했노라고 덧붙였다.

“당신은 내가 평가한 것보다 다정하고, 섬세하며, 사려 깊습니다. 당신의 냉소 아래 상냥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나직한 중저음이 밤이 물든 고요한 서재를 울렸다.

그 고저 없는 목소리에 샤를로트의 속내는 바람 맞은 풍등처럼 소란해졌다.

“그, 그런 말을 어떻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할 수가 있는 거죠?”

“그저 평가를 전하는 것에 동요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당신이 놀라운데.”

알폰소가 손을 뻗어 샤를로트의 뺨에 손등을 댔다.

샤를로트가 줄곧 알폰소의 책상에 올라타 있었고, 알폰소는 그런 그녀의 바로 앞에 앉아 있었기에 그들 사이의 거리는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만큼 가까웠던 것이다.

뺨에 닿는 손등이 차가웠다.

그만큼 손등에 느껴지는 뺨의 열기는 선명하리라.

“……내 말이 당신을 부끄럽게 만든 겁니까?”

“그, 그래요. 누구나 그런 말을 듣는다면 부끄러워할 거라고요.”

아닌 게 아니라 샤를로트는 정말로 부끄러웠다.

살면서 상냥하다거나, 사려 깊다는 말은 처음 들어 봤으니까.

그대로 있다간 쿵쿵대는 심장소리마저 전부 들킬 것만 같다.

샤를로트는 눈을 질끈 감고는 알폰소의 손을 밀어냈다.

알폰소의 손은 쉽게 밀려나나 싶더니, 그대로 돌아와 다시 샤를로트의 뺨을 매만졌다.

그러니까, ‘매만졌다’.

조금 전은 손등이었지만 이번에는 손바닥이 닿았다.

알폰소의 엄지가 천천히 샤를로트의 살갗을 쓸었다.

그 별것 아닌 접촉이 왜 이리도 예민하게 느껴지는지.

“당신이 이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당신을 수치스럽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말에 샤를로트의 입술이 뾰족해졌다.

“흥, 그래서 이제 만족스럽나요?”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의아함에 샤를로트가 눈을 반짝 떴다.

그제야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붉어진 얼굴. 살짝 찌푸려진 미간.

오롯이 그녀만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나는 당신을 대할 때면 늘 스스로를 잃는 기분이라.”

그것은 샤를로트의 얼굴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