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는 대답 대신 알폰소의 표정을 물끄러미 살피더니 되물었다.
“화가 난 건가요?”
“대답이나 하십시오. 왜 말도 없이 생팔에 갔는지.”
음, 화가 났구나.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미간 주름만 봐도 그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아차린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녀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해요. 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왜 내게 당신이 생팔에 가는 걸 알리지 않았습니까.”
“모든 걸 당신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알폰소의 낯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는 알 필요가 없고, 아르노는 된다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당신만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었어요.”
아르노를 끌어들인 건, 그냥 거기에 때마침 아르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를로트는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그 말은 알폰소를 더욱 괴롭게 만들 뿐이었다.
“나만 아니라면 된다니, 그게 무슨…… 무슨 뜻입니까.”
나는 당신에게 걱정하게 해달라는 말까지 했는데.
자존심 따위는 없는 것처럼,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말을 했는데.
당신은 나만 아니면 된다니.
“내가…… 그렇게 싫은 겁니까?”
“그럴 리 없잖아요. 나는 당신이 신경 쓸 일을 더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그게 당신이 내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이유입니까?”
“……그래요.”
샤를로트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바보 같지만 나는 그런 방법밖에는 알지 못해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건 너무 어려워 보이고, 내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다소 무모한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가끔은 당신이 차라리 아주 불행하기를 바랐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주변은 오로지 끔찍한 일만 가득하기를.
그리하여 솜사탕만 있어도 방긋 웃는 아이처럼 쉽게 행복해지기를.
나는 일평생 누군가를 위해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법 또한 귀하고 좋은 것을 잔뜩 쥐여주는 것밖에는 알지 못하니까.
“당신은 내가 아니라도 신경 쓸 게 너무 많잖아요. 지금도 르나르 베호닉의 일로 피곤해 보이고, 에두아르트에 가면 얼마나 더 많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냥…… 나 혼자 하려고 했죠.”
샤를로트가 지금 하는 말은 분명 틀림없는 진실이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거짓이었다.
샤를로트는 알폰소가 설령 당장 하는 일 하나 없는 한량이라고 해도 제 몸 상태를 숨겼을 테니까.
물론 알폰소에게 붙들려 온 지금이라고 해서 몸 상태를 밝힐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샤를로트는 언제나 들켰을 때를 대비해 변명거리를 만들어 두었다.
“이번 일은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알폰소, 그러니까.”
그녀가 준비해 둔 변명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덥석.
팔이 붙들렸다.
아니, 몸이 붙들렸다고 해야 할까.
눈을 감았다 뜬 그 찰나의 순간 알폰소는 샤를로트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 코끝에 닿는 온기에 샤를로트가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알폰소.”
“유난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당신과 내가 이럴 만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말이 멈추었다.
하지만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맞닿은 폐부가 떨리는 것이,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으므로.
그제야 샤를로트는 상황을, 아니, 상대를 이해했다.
‘화가 난 게 아니었구나.’
알폰소가 그토록 표정이 굳어 있었던 것은 샤를로트나 아르노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그는 두려웠던 것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무슨 광경을 보게 되었을지가.
‘……이러니 내가 말할 수가 없는 거지.’
알폰소는 전장을 오래 다녔으니, 어쩌면 죽음에도 익숙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알폰소가 정말로 샤를로트의 죽음에 초연할 수 있다면 샤를로트 역시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 순간 샤를로트는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차라리 나를 미워하도록 두는 게 나았을까.’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알폰소라면 그 누구의 죽음도 기껍게 여기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곧장 뒤따랐다. 결국 의미 없는 가정이라는 뜻이다.
결국 샤를로트는 한숨을 내쉬고, 알폰소를 마주 안아 주었다.
“……나는 다치지 않았어요. 그럼 된 거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실 누군가의 걱정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이래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일에서는 평정을 찾기가 힘듭니다.”
돌이켜보자면 늘 그러했다.
샤를로트는 완벽하다고 일컬어지는 인간을 필부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으므로.
정말 이상한 일이다.
샤를로트를 만나지 못했던 시간 동안 그토록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고 화가 치밀었는데.
막상 샤를로트를 보니 그 모든 감정이 설탕을 호수에 뿌린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샤를로트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데, 당장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불필요한 말이나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남은 것은 오직.
“당신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 말 하나뿐.
“내가 진정 행복하길 바란다면 내게서 당신을 앗아가지 마십시오.”
“……내가 언제 그랬어요.”
“내가 당신을 신경 쓸 수 있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나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으니까.
덧붙는 말에 샤를로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알폰소가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덕분에 그녀의 표정을 살필 수 없어 다행이었다.
지금 그녀는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바라고 싶지 않았는데.’
샤를로트는 뜨거워진 목울대를 억누르며 말했다.
“……알폰소 당신, 정말 싫어요.”
“상관없습니다.”
“거짓말 아니에요.”
알폰소가 싫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의 무지가 싫었다. 자신을 향한 증오 없는 시선이 싫었다.
헛된 미련을 갖게 만드는 저 반듯한 낯이 싫었고, 애써 끊어내려는 자신을 자꾸만 붙잡는 손길이 싫었다.
차라리 외면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랬더라면 당신과 마주하는 순간마다 스스로를 상처 입혀야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나는 당신에게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을 텐데.
왜 당신은 자꾸만 내게 다가와서, 나를 이토록 괴롭게 하는지.
나누어 담을 수 없는 애정에 숨이 막힌다.
당신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고백할 수 있을까.
‘아마 없겠지.’
없어야만 했다.
영영 사라져야 하는 주제에, 괜한 기억을 남겨서 알폰소를 괴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알폰소의 곁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가 내미는 손을 거부할 수 없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차오르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있다.
‘살고 싶어.’
알폰소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면 만족스러울 거라고 믿었는데.
더는 바랄 게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어떻게 사람 욕심은 이다지도 끝이 없는지…….
샤를로트는 언젠가는 놓아야 할 삶 대신 제 품의 남자를 가득 끌어안았다.
바람을 붙잡으려는 허수아비 같은 몸짓이었다.
* * *
폭풍 같았던 밤이 지나고, 다음 날.
“그러니까, 생팔에 몰래 간 건 소피아 때문이었다는 겁니까?”
“그래요. 생팔은 물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검의 도시이기도 하잖아요.”
샤를로트는 알폰소에게 미리 만들어 둔 핑계를 전했다.
바로 소피아를 팔아먹는 일이었다.
“소피아 황녀의 애인이 기사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죠? 내가 말해줬잖아요.”
“물론 기억합니다. 디디에 루.”
“난 두 사람을 이어주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래서 디디에 경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검을 좀 알아보느라고 그랬어요. 다시 말하지만 아르노 경은 단지 나를 도와줬을 뿐이에요. 나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으니까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러자 옆에서 아르노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니, 대체 어떻게 저와 마님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저도 취향이라는 게 있습니다! 저는 귀엽고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여자가 취향- 악!”
“닥쳐라. 너는 수도 돌아갈 때까지 근신이다.”
결국 그는 나불거리던 값으로 한 대 얻어맞고, 근신까지 당했다.
그가 주인에게 결백해야 할 의무를 저버린 것은 사실이니 벌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알폰소를 위해 이런 일을 시작한 아르노에게는 다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