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쟝-자크의 보고였다.
“오늘도 블랙베리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르노 경은 블랙베리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알폰소는 아르노를 생팔로 보내는 대신, 쟝-자크와 함께 떠나도록 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알폰소 본인이 생팔로 떠나거나, 혹은 사람을 풀어 블랙베리 산지를 뒤져 보게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베호닉 성이었고, 가용할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알폰소에게는 처리할 문제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르나르에 대한 조사도 한창이었고, 클로에를 베호닉의 가주로 임명하기까지도 거쳐야 할 절차가 많았으므로.
직접 움직일 시간은 없었다.
하여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수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쟝-자크를 아르노와 함께 보냈는데.
쟝-자크가 이런 보고를 올린 것이다.
“저는 시장으로 곧장 가려 했지만, 아르노 경은 운하를 돌아봐야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운하로 오르내리는 물류를 확인하려 하는 건가 했습니다만, 막상 가서는 화물선을 둘러보지도 않더군요.”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아르노 경은, 그러니까…… 뭘 찾고 있긴 했습니다.”
쟝-자크는 생팔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아니, 여기도 아니잖아! 이 개 같은 붉은 벽돌집이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 사이에 건물을 죄다 허물기라도 했나? 빌어먹을!
그리고 그는 고민에 잠겼다.
쉴 새 없이 알 수 없는 말과 욕설을 중얼거리며 운하를 빙글뱅글 돌던 아르노의 모습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어쨌든 뭔가를 찾고 있기는 했습니다. 블랙베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의 행적이 퍽 수상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무어라 말을 걸면 깜짝 놀라거나, 뭔가를 숨기려 들기까지.
그렇잖아도 퍽 찜찜했는데, 아르노의 수상한 행동까지 겹치자 알폰소의 의심은 점차 확신이 되어 갔다.
‘샤를로트가 아르노에게 부탁한 게 사실 블랙베리가 아니었던 건가?’
분명 뭔가를 찾아 헤맸다고는 했으니 구할 것이 있어 생팔에 다녀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닐 텐데.
이런 찜찜한 의혹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불쾌했다.
‘부탁할 일이 있다면 내게 말하면 될 텐데.’
그런 간단한 요구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가 싫다는 건가?
나는 안 되고, 아르노는 되고?
‘아르노가 대체 뭐라고?’
울컥해서 든 생각은 분명 스스로의 치졸함에 낯을 붉힐 만큼 낯부끄러운 생각이었으나, 한번 든 감정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제 손에 있던 컵케이크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내기 때문이든 뭐든, 샤를로트에게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명실상부하게 알폰소뿐이었다.
아르노가 샤를로트에게 괜히 깐족댔다가 테이블에 칼이 꽂혔다는 것은 에두아르트의 모두가 알지 않는가.
-레이디 노하께 다시는 말 안 걸 겁니다!
라고 아르노가 울상으로 외쳤던 게 얼마 전인데.
그런데 이제는 알폰소를 따돌리고 그들끼리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고?
알폰소는 그 순간 제 속이 얼마나 좁은지 깨닫고 말았다.
분명 제 속에는 민들레 홀씨 하나 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비좁고 치졸한 속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낯 뜨거운 감정을 세간에서 뭐라고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설마 내가 질투를 하는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질투라니. 일평생 알폰소는 쓸 일이 없는 단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린아이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소피아와 브누아만 챙기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무덤덤했던 속내가 왜 이제 와서 티끌만 해진단 말인가?
‘이건 단순히 화가 난 거다.’
샤를로트가 자신을 그리 매정하게 쫓아내 놓고, 아르노와 비밀을 공유하는 데 화가 난 거다.
그래, 그냥 그런 것뿐이다.
물론 그런 감정을 세간에서는 다름 아닌 ‘질투’라고 명명하기는 하지만, 지금의 알폰소에게는 토씨 하나 들리지 않을 소리였다.
그는 틀림없이 자신이 화가 난 것뿐이라고 믿었고, 이를 해소할 방법도 명확히 알고 있다고 믿었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
샤를로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겠다.
대체 뭘 부탁했고, 뭘 숨기고 있는 건지.
아무리 그녀가 화가 났다고 한들 대화가 통하지 않을 상대는 아니니, 이런 문제 정도는 말로 잘 해결할 수 있을 터.
알폰소는 그렇게 마음먹고는 샤를로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우연히 어떤 대화를 엿들었다.
“……습니다. 그게 진짜로 있긴 하더군요. 시간이 시간이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위치는 확실한가요?”
“예. 가보실 겁니까?”
“그리 먼 곳은 아니니, 밤에 몰래 다녀올 수 있겠죠. 준비해둬요. 들키지 않게 나갈 거니까.”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리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아르노와 샤를로트…….’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이 누군지가 아니라,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었다.
정말로 아르노는 샤를로트의 명령을 받고 뭔가를 은밀히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에 거길 가보겠다고, 단둘이?’
찾는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게다가 아르노가 이 사실을 여태 숨겨왔다는 것이 알폰소의 심기를 긁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르노가 이 사실을 숨긴 이유를 짐작한 까닭이다.
‘아르노는 내게 이런 걸 숨길 놈이 아니다.’
그는 다소 난폭하고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충성심이 높은 기사였다.
그 사실은 오랫동안 함께 전장을 다닌 알폰소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령 아르노가 그를 배신했다고 한들 알폰소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혹은 자신이 믿고 따를 만한 주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거나.
딱 그 정도의 생각이었을 터.
그러니 지금 치미는 부아는 단순히 아르노의 행동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이 사실을 숨긴 것이 샤를로트 때문이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르노 조엘, 설마 샤를로트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샤를로트는…… 객관적으로도 매력적이지.’
샤를로트가 그녀의 냉정함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유난히 날카로운 눈매와 미소 없는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으며, 특유의 오만하고 관조적인 분위기조차 그녀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모든 것이 그녀 앞에서는 당연했다.
심지어 그 이른 가을을 닮은 눈동자를 밝히며 흘러내리는 햇살조차 그녀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법한 노골적인 오만조차 자연스럽게 두르고 있는 샤를로트였으므로.
그녀는 섬뜩한 날붙이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공포심과, 그 정교한 날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게 되는 감정을 고스란히 그러쥐고 있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이도 있겠지만 매혹당하는 이도 적지 않을 터.
샤를로트의 매력은 그런 종류였다.
‘누구라도 샤를로트를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겠지…….’
재 묻은 놈 눈에는 다 재 묻은 것처럼만 보인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지금 알폰소의 생각을 아르노가 들었더라면 사흘 밤낮 배를 잡고 웃어댔을 테지만, 다행히 아무도 듣는 이가 없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눈 먼 이 하나만이 씁쓸한 입맛을 다실 뿐.
‘아무래도 그냥 둘 수 없겠군.’
이건 절대로 질투 같은 짓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르노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다.
샤를로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아르노에게 보답받을 수 없는 연심은 접으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대체 뭘 숨기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니…….’
어쩔 수 없겠군.
알폰소는 치미는 부아를 삭이며 결정을 내렸고, 그날 밤.
세 개의 그림자가 은밀하게 베호닉 성을 빠져나갔다.
* * *
“마님, 승마도 익히셨습니까?”
“어쩌다 보니.”
샤를로트가 시니컬하게 대꾸하며 말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밤이 깊게 내려앉은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샤를로트와 아르노가 나란히 말 위에 올라 있었다.
“마님 속도에 맞추려면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네요.”
“잡담은 됐고. 그래서 찾은 곳은 어느 쪽이지?”
“이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입니다.”
시계탑과 성냥갑을 세워놓은 것처럼 빼곡한 건물들.
그리고 운하.
언덕을 따라 내려간 샤를로트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정말이네.’
가브리엘의 집에 걸려 있던 그림 속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