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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75화 (78/122)

그렇게 아르노는 눈치가 빠른 죄로 본의 아니게 샤를로트의 종복이 되었다.

알폰소가 눈치채기 전에 지병을 치료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물론 아르노는 알폰소에게 샤를로트의 상태를 전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단도가 책상에 꽂혔다.

쾅! 소리와 함께 파르르 떨리는 단도를 보며, 아르노의 심정도 파르르 떨렸다.

“알폰소가 내 지병에 대해 아는 날이 오면, 그대로 죽어버릴 거예요.”

“아니, 그래도 역시 각하께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보통 일도 아니고.”

“세상에 죽어도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잖아요.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알려 봐요.”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보여줄 테니까.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것을, 아르노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애초에 알폰소에게 알릴 생각이었더라면 진작 알렸겠죠. 알폰소가 도와줄 텐데 뭐 하러 아르노 경에게 도움을 부탁하겠어요. 하지만 아르노 경이 도와줄 수 없다면…… 콜록! 콜록콜록!”

“그, 그러니까.”

“콜록콜록! 이렇게 아프면 역시 죽는 수밖에 없겠죠……. 알폰소가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콜록!”

“에, 에이씨! 빌어먹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결국 아르노는 샤를로트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알폰소가 샤를로트에게 관심이 없었더라면 아르노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알폰소가 샤를로트를 짝사랑해서 나란히 피가 말라 가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손을 놓고 있으란 말인가?

‘각하는 진짜 저한테 고마워하셔야 합니다, 예?’

어휴, 내가 주인을 잘못 만나서!

아르노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억울함을 토했지만, 대답해 줄 이가 있을 리 만무하다.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샤를로트를 도와서 낫게 할 수밖에.

“내 불치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알아요. 그런데 보다시피 내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해서, 그 사람을 찾아가는 걸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러죠, 뭐. 장소를 알려주시면 다녀오는 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장소를 몰라요.”

“그럼 사람을 수소문해야 한다는 겁니까? 인상착의가 어떻게 됩니까?”

“몰라요. 기억하기로는 금안을 가지고 있었는데, 확실치는 않아요.”

“그럼 이름이나 나이, 성별이나 출생지, 거주지 등은?”

“이름은 가브리엘. 어쩌면 가명일지도 모르고, 그밖에는 몰라요.”

샤를로트의 설명을 들은 아르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아는 게 하나도 없으시다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그 사람이 마님의 불치병을 치료해 줄 수 있다는 건 알고?”

“그래요.”

“저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무슨 바다에서 금반지 찾기도 아니고! 이 넓은 대륙에서 어떻게 그런 자를 찾으라고!”

아르노가 벌컥 화를 냈지만, 샤를로트는 초연했다.

“방도가 있으니까 찾으라고 하겠죠.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여요?”

지금 이 순간 가브리엘을 찾는 것이 가장 간절한 사람은 단연 샤를로트이리라.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종이를 한 장 꺼내 내려놓았다.

“이건…… 그림입니까?”

“그래요. 알아보겠어요? 생팔의 풍경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샤를로트가 가브리엘의 집에 걸려 있던 그림을 기억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그 그림만큼 정교하지는 않고 건물과 운하의 형태만 잡아 둔 수준이었지만.

중요한 지형지물은 어느 정도 나와 있었다.

빼곡한 건물들 사이로 삐죽 솟아오른 시계탑.

그리고 그 아래 운하와 도로까지.

“이 풍경을 찾아야 해요.”

가능하다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까지.

그게 가브리엘을 찾는 첫 실마리가 될 터였다.

* * *

그로부터 사흘 뒤.

“세르주, 아르노는 어디 있는지 아나?”

“아르노 말입니까? 글쎄요. 마님께서 시키신 일로 나간 것 같던데요. 찾아볼까요?”

“아니, 됐다.”

알폰소는 손을 저어 대화를 잘랐다.

예상한 그대로의 답변이었던 까닭에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벌써 사흘째.’

아르노와 샤를로트의 동태가 뭔가 이상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샤를로트는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이렇다 할 뭔가를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늘 방 안에서만 지낸다고 했던가.’

샤를로트를 직접 만나지는 않더라도, 그는 늘 사람을 통해 샤를로트가 부족함 없이 지내는지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은 며칠째 같았다.

-마님께서는 방 안에만 계셔서요. 도움이 필요 없으시다고 사람을 내보내셔서 방 안에서 뭘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서 알 수가 없다는 말.

직접 만나서 이야기라도 나눠 보고 싶었지만, 샤를로트는 며칠 사이 계속 그를 피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샤를로트가 알폰소를 다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내쫓았던 날부터.

-더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나가 달라고요! 당장!

그토록 굳은 표정의 샤를로트는 처음이었다.

알폰소의 말이 그토록 그녀의 심기를 거슬렀던 걸까.

‘내겐……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걱정할 수 있게 해달라니, 평생 그런 말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해 볼 일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알폰소는 스스로가 평범한 사람과는 다소 거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소 무심했고, 무감정했다.

타인에 비해 뛰어난 습득력과 이해력으로 그런 점을 감추고 있을 뿐.

그는 결코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었다.

제 어머니에게조차 버림받은 인간이 뭐 얼마나 대단한 종자이겠는가.

만일 에두아르트라는 지고한 이름이 아니었더라면 길거리 어딘가에서 검이나 쥐고 강물에 버들잎 떠가듯 살았으리라.

‘아니, 에두아르트의 이름이 있어도 달라질 건 없었지.’

알폰소가 혼자가 되기를 자처했음을 떠올려 보자면, 짊어진 이름이 있을 뿐 매인 곳 없는 삶은 여전했다.

특별히 중요하게 아끼는 것도 없었고 이렇다 할 감흥도 없는 삶.

불완전한 인간의 아내가 될 사람이 가여워 독신을 고집했던 것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아무도 곁에 두지 마라, 알폰소. 너는 그래야 해.

그래, 제 어머니의 말처럼 그것이 제게 어울리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샤를로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는 알폰소가 숨기고자 했던 것을 어떻게든 찾아와 그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낯 뜨거운 수치를 알고 뱃속을 헤집는 분노를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한다는 감정을 알게 했다.

샤를로트의 앞에서 알폰소는 늘 필부가 되었다.

그러니 예전이라면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었을 이런 감정에, 이런 고민을 하고 있겠지.

‘그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샤를로트에게 자신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가까워질 수 없는 타인이라는 확인을 받은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 이후로 샤를로트가 계속 그를 피하고 있는 상황이니.

알폰소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바싹 탄 속내를 숨긴 채 그녀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뿐이었더라면 알폰소가 이토록 착잡한 기분을 느끼지도 않았을 터.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아르노 조엘.’

그의 동태가 부쩍 수상해진 것이다.

사흘 전, 아르노는 알폰소를 찾아와 생팔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했다.

“마님께서 부탁하신 게 있어 생팔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타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곳이니 해 질 즈음에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봅니다.”

“……샤를로트가, 네게 부탁한 게 있다고?”

아르노와 샤를로트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탁이라니?

의심의 눈초리를 느낀 아르노가 툴툴거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보지 마십쇼. 저도 귀찮아 죽겠는데, 마님께서 블랙베리가 드시고 싶다고 하시지 뭡니까.”

“블랙베리는 지금 철이 아닐 텐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나 참, 차라리 한겨울에 산딸기를 구해오라고 하지…….”

아르노는 더럽게 귀찮다며 신경질적으로 제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베호닉 같은 촌동네에서는 못 구할 것 같고, 생팔에나 좀 나가보려고 합니다. 거긴 운하가 있으니 물류가 많이 오가잖습니까. 어디 따뜻한 동네에서 올라온 블랙베리가 있을지 또 누가 압니까.”

철도 안 된 과일을 구해오라니, 터무니없는 부탁이기는 했다.

“생팔에도 없는 게 수도까지 올라갔을 리 없으니, 생팔에 가서 좀 뒤져 보고 없으면 그냥 안 드시겠다는군요. 어차피 하는 일도 없는데 다녀오겠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아르노는 생팔로 떠났다.

조금 찜찜하긴 했으나 샤를로트가 뭔가를 부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까닭에 알폰소는 아르노를 제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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