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샤를로트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마디가 불거진 아르노의 큼지막한 손과 작은 찻잔은 영 조화롭지 않아 보였다.
“저는 차에 조예가 없어서 무슨 맛인지 영 모르겠습니다만, 환대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당연한 일인데요.”
샤를로트는 태연히 대꾸했지만, 그녀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지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은 아르노였으니까.
‘아르노가 나를 찾아왔다니.’
아르노 조엘.
알폰소의 기사들 중 가장 호전적이고 장난스러우며, 가장 완력이 센 기사.
샤를로트가 그에 대해 아는 정보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그가 겉으로 보이는 만큼 가벼운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
과거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가신들과는 전부 사이가 나빴다.
하지만 아르노와는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르노는 흥미 본위로 움직이는 사람이라, 다른 가신들처럼 노하에게 반감을 크게 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보이긴 했지.’
하지만 루드빅에 비하면 훨씬 덜하다.
얼굴이 보이면 괜히 와서 한 번씩 툭툭 시비를 걸고 가는 게 전부였으니까.
만일 다르게 만났더라면 꽤 재밌는 관계가 될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난 간다. 지금 기분으로 저 여자랑 말 섞었다간 죽여버릴 것 같으니까.
뭐, 그것도 어디까지나 알폰소가 죽기 전의 이야기지만.
알폰소가 죽은 이후 가장 적대감을 드러낸 이 역시 아르노였다.
하여 샤를로트가 기억하는 아르노는 늘 그녀를 경멸과 증오 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짐승 같은 기사였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이번 생에도 찾아와서 시비를 거는 것을 보고 친하게 지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터놓고 앉아서 차나 마실 만한 사이는 결코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찾아온 거지?
의아해하는 사이 아르노가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 찾아오면 차가 아니라 단도를 대접받을 줄 알았습니다.”
“용건이 있는 건가요?”
“뭐, 용건이라고 말하기는 뭐하고. 궁금해서 말입니다.”
“내가 사람을 죽여 보았는지가 또 궁금해졌나요?”
샤를로트의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아르노가 제 결백을 주장하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물론 그게 여전히 궁금한 건 맞긴 합니다만, 이번은 아닙니다.”
“그럼 뭐죠?”
“각하께서 근래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그리고 저는 마님께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아르노가 덧붙였다.
“다른 애들은 눈치를 못 챈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그런데 저도 제 주인이 저러고 계시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아서.”
“……내가 알폰소의 기분을 풀어주길 바란다는 건가요?”
“에이, 마님이 광대도 아니고 뭐 그런 걸 하십니까. 각하의 기분이야 시간 지나면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이걸 풀어달라고 해서 풀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샤를로트가 어떻게 풀어줄 수 있겠는가?
알폰소는 혼자 짝사랑에 신음하고 있는 것뿐인데.
아르노는 눈동자를 데굴 굴려 샤를로트를 흘끔 보았다가 도로 돌렸다.
‘정말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군.’
바꿔 말하자면 몹시 무심해 보인다.
아마 샤를로트가 알폰소를 어떻게 대하는지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녀가 그리 다정하게 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터.
그 점을 떠올려 보자면 알폰소가 샤를로트를 사랑하게 된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아르노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어떻게 보자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샤를로트도 알폰소에게 상냥하고, 알폰소는 두말할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도 왜 굳이 샤를로트를 찾아왔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이게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는 건 아는데…….”
한 가지 가정이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아르노가 여태껏 보아 온 샤를로트는 한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이게 너무 말이 안 되는 가정이라, 아르노는 자꾸만 제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아니, 이걸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에이씨, 진짜 단도 꺼내지 마십쇼. 이번만큼은 농담 아닙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죠?”
“그게, 그러니까. 마님 혹시-”
아르노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샤를로트의 낯이 와락 일그러지나 싶더니 갑자기 앞으로 크게 고꾸라졌다.
그리고는 발작적으로 기침을 터트렸다.
“콜록, 콜록!”
더워지는 여름날에 어울리지 않는, 폐부가 울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릴 정도로 격한 기침 소리.
심지어 그것뿐이 아니었다.
“……피?”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아르노는 속일 수 없었다.
샤를로트가 기침을 시작하자마자 쇳내가 짙게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 그런 게, 콜록! 아니, 콜록, 콜록!”
“마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샤를로트가 몸을 웅크리며 상태를 숨기려고 했지만, 이미 낯을 굳힌 아르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무례를 무릅쓰고 입가를 가린 샤를로트의 팔을 떼어냈다.
그리고, 피로 물든 손바닥을 보았다.
이건 도저히 기침을 좀 세게 했다고 나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늘 장난스러웠던 아르노의 낯이, 처음으로 웃음기 없이 희게 질렸다.
그는 마찬가지로 낭패감이 짙게 떠오른 샤를로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늘 고고했던 낯은 처음으로 평정을 잃은 상태였다.
더 이상 부정의 여지는 없다.
“……마님.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아르노는 조금 전 하려고 했던 물음을 기어이 입 밖으로 꺼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겁니까?”
* * *
‘최악이다.’
몸 관리 하나를 못해서 이런 사달을 내다니.
만약 맞은편에 있던 게 아르노가 아니라 알폰소였더라면 모든 걸 망칠 뻔했다.
‘이제 괜찮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또다시 피를 토하게 될 줄이야.
샤를로트는 낯을 희미하게 찌푸린 채 아르노를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타성적으로 손과 입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피 좀 뱉은 것 정도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망상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이런 부분에서는 제가 좀 기민해서 말입니다. 제 경험상 방금 마님 정도로 피를 쏟는 사람은 대개 해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빌어먹게 정확하군.
샤를로트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가 회귀한 지 벌써 계절 하나쯤이 지나가고 있었으니 운이 좋아야 겨우 해를 넘길 수 있을 터.
“가지고 있던 지병이 조금 악화됐을 뿐이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알폰소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럴 순 없습니다. 의원께는 보이신 겁니까?”
“의원에게 보여서 이 정도,”
샤를로트는 무신경하게 대꾸하다가, 문득 멈칫했다.
의원.
그 단어가 몹시 괜찮은 발상을 떠올리게 해준 것이다.
‘어차피 아르노에게 몸 상태를 들킨 상황이라면.’
아르노를 조력자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침 생팔에 다녀와야 했는데, 혼자서는 역부족인 참이었으니까!
‘그렇잖아도 수족이었던 실비아를 쳐내서 여러모로 불편했었지.’
수발을 들 사람이야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지만, 은밀하게 움직여 줄 수하는 꼭 필요한 법.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어떻게 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런 상황이 생기다니?
아르노를 보는 샤를로트의 녹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뭐, 뭡니까. 그런 눈.”
그리고, 아르노는 전장에서 갈고닦은 생존본능으로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잡힌 물고기인 신세.
희번덕이는 눈으로 아르노를 보던 샤를로트가 발작적으로 기침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콜록콜록!!!”
“마, 마님! 젠장, 빨리 의원을 불러야-!”
“아, 안 돼요. 아르노 경……. 의원은 안 돼요.”
샤를로트가 파리해진 낯으로 아르노의 팔을 붙들었다.
때마침 거센 기침으로 인해 흘러나온 생리적인 눈물이 샤를로트의 뺨을 타고 툭 떨어졌다.
“불치병이라, 평범한 의원으로는 치료할 수 없어요…….”
“그, 그럼 각하께라도!”
“알폰소…… 그이가 알면 안 돼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요…… 콜록!”
“그래도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만은 없잖습니까!”
“아니……. 딱 하나, 방법이 있어요. 내가 나을 수 있는 방법.”
샤를로트의 목소리가 묘하게 또렷해졌다.
그러나 아르노는 눈치채지 못했다. 파리해진 샤를로트의 안색과 흘러나온 피,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따위가 판단력을 흐리고 있었다.
“부디 날…… 도와주겠어요? 아르노 경.”
샤를로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아르노가 거절할 길은 없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