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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73화 (76/122)

걱정할 수 있게 해달라니.

샤를로트는 무심코 며칠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니, 며칠 전 알폰소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은 날 동정하면서, 나는 당신을 걱정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일이라고.

샤를로트는 그 말이, 알폰소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이 싫어서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단 말인가.’

동정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지나치게 선을 긋고 있음을 느껴서 한 말이었구나.

샤를로트는 그제야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

‘하긴, 알폰소는 사람이 좋으니까.’

버려도 좋은 패일 뿐인 내게도 마음을 써 주는 거구나.

돌이켜보자면 떠날 생각만 하느라, 주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너무 거리를 두긴 했던 것 같네.’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는 굳이 말할 것도 없이 냉랭하게 대하다 보니, 단 하나 예외인 알폰소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데에는 상당히 능숙하다고 자부하는 그녀였지만.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할 상대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어렵다.

어쨌든 알폰소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제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건 사실일 터.

1년을 함께 보아야 할 사이이니 너무 선을 긋는 것도 좋지 못한 일이다.

샤를로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알폰소에게 그러겠다는 말을 뱉으려는 순간.

“……!”

샤를로트의 낯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가줘요.”

“지금 뭐라고-”

“더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나가 달라고요! 당장!”

알폰소가 갑작스럽게 바뀐 샤를로트의 태도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둥글어졌던 눈매는 금세 돌아왔다.

실망의 기색을 띠고.

“……내 부탁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나가겠습니다.”

어쩌면 상처를 받은 목소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알폰소 역시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지, 곧장 샤를로트의 방을 나섰다.

쿵.

문이 닫히고 나서야 샤를로트는 비로소 표정을 풀었다.

급히 입가를 손으로 받치자, 끔찍한 고통과 함께 목에서 더운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콜록, 콜록!”

손바닥에 흥건한 붉은색을 보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잠깐 사이에 샤를로트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하마터면 보일 뻔했어.’

알폰소에게 그러겠노라는 대답을 하려는 순간, 배 속을 난자하는 아찔한 통증이 일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신음을 흘릴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었다.

알폰소가 조금만 늦게 나갔더라면 견디지 못하고 그 앞에서 피를 토했으리라.

샤를로트는 이 통증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술식 때문이야.’

과거로 돌아온 직후에도 같은 일을 겪었었다.

단지 그때는 잠깐 몸이 나빴다는 말로 변명할 수 있을 만한 통증이었고,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을 뿐.

상태가 더 나빠진 것이다.

‘알폰소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화를 내려던 게 아니었다고, 수습해야 하는데.

샤를로트는 서둘러 토한 피를 정리하고 나가려고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대가일까.

그녀는 나가려던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떴지.’

저택이었더라면 분명 들켰겠지만, 다행히 이곳은 베호닉 성이었다.

게다가 샤를로트가 수행 하녀를 데리고 있지 않았던 까닭에 찾아오는 이가 없어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 샤를로트는 몸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시도 때도 없이 피를 토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거동조차 힘들 정도로 몸이 약해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의원에게 약을 받아서 피를 토하거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게 되었지만.’

의원이 약을 처방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 다행이었다.

알폰소 모르게 부른 의원은 그녀를 진찰하더니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이유 모를 내상으로 몸이 급격하게 허약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몸을 회복하고 진정시키는 약을 처방하고 며칠 요양하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하셨죠? 앞으로는 더욱 심해질 겁니다. 내상을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제 의술로는 불가능합니다.

다른 환자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내상을 치료하라고 했겠지만, 샤를로트는 알고 있었다.

‘내상은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내상은 술식이 만들어 낸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긍정적인 소식은 있다.

‘이건 회귀 직후에 나타난 증상이야.’

그리고 그때보다 더 심해졌다는 건, 술식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 말은 알폰소가 행복에 좀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일 테고.

몸은 아팠지만 마음은 기뻤다.

‘정말로 진척이 있는 거야.’

반지를 찾아주고 클로에를 알폰소의 편으로 만든 게 정말 효과가 있었다니.

사실 알폰소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그간 샤를로트를 알게 모르게 괴롭혀 왔다.

어쩌면 강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베호닉의 문제를 해결하고도 진척이 없으면 좌절할 뻔했는데.’

물론 알폰소를 완벽히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진척이 있다는 게 어디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물론 허약해진 몸 때문에 정말로 뛰지는 못했지만.

‘하지만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어.’

며칠 사이 그녀는 눈에 띄게 안색이 나빠졌다.

화장으로 낯빛을 가리고는 있지만 증상이 언제 어떻게 악화될지 모르니 쉽게 나다닐 수가 없다.

게다가 마침 요양도 필요했던 터라 샤를로트는 본의 아니게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게 알폰소에게는…… 내가 화난 것으로 보이겠지.’

당시 문을 닫고 나가던 알폰소의 반응을 보면 기분이 많이 상한 것 같았는데.

빨리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은 앞섰지만, 몸 상태가 도저히 여의치 않았다.

샤를로트의 손에는 아직도 피 묻은 손수건이 있었다.

‘이런 몸으로 갔다가 들키면 끝장이야.’

알폰소는 눈썰미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이상한 티를 내면 몸이 나빠졌다는 것을 고스란히 들킬 터.

‘그리고 알폰소 성격상 내가 몸이 좋지 않다고 하면 외면하진 못하겠지.’

걱정하게 해달라는 말까지 한 사람이니까.

기껏 행복에 조금 가까워졌는데, 샤를로트를 걱정하느라 행복과 다시 멀어지면 큰일이다.

‘그러니 알폰소가 내 몸 상태를 눈치채기 전에 빨리 해결해야 해.’

그렇게 샤를로트는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일의 시발점, 연금술사 가브리엘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내 몸 상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연금술사 가브리엘밖에 없어.’

일반 의원들은 모두 이 내상을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이라면 적어도 감출 수 있는 방법은 줄 수 있겠지.

그는 정말 방대한 양의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이제 문제는 어떻게 가브리엘을 찾느냐인데…….”

다행스럽게도, 짐작이 가는 곳은 있다.

더욱 다행스럽게도, 베호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드 생팔, 혹은 생팔이라고 불리는 도시.

생팔은 물과 검의 도시라는 이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곳이었는데, 가브리엘이 과거 이곳에서 지냈다는 말을 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샤를로트가 그것을 알아보았다.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말이다.

-가브리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고 했죠? 그럼 생팔에도 가 봤나요?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이 그림이 걸려 있어서요. 이건 생팔의 풍경이잖아요.

생팔의 상징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운하였다.

그리고 굉장히 복잡하고 좁게 붙어 있는 건물들.

운하가 생기면서 생팔은 관광지 역할도 겸하기 시작했는데, 그에 앞서 도시를 무리하게 개발하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복잡한 골목이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골목 안쪽으로는 치안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검을 든 이들도 늘어났다.

그래서 생팔은 물과 검의 도시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가브리엘의 그림에 그려져 있던 것 역시 운하와 비좁게 붙은 건물들.

-별 뜻 없이 구입한 겁니다. 신경 끄시죠.

당시 가브리엘은 생팔에 대해 묻는 샤를로트에게 이렇게 대답했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의미가 없었다면 벽에 걸어두지도 않았겠지.’

다행스럽게도 베호닉과 생팔은 몹시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몰래 살짝 다녀오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만.

‘치안이 썩 좋지 못한 동네라 지금 몸 상태로는 다녀오기 힘들단 말이지.’

이러한 이유로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그냥 위험을 감수하고 다녀와야 하나?’

아무래도 지금이 아니라면 다녀올 기회가 없을 것 같은데…….

샤를로트가 고민에 빠진 찰나.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님, 아르노 조엘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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