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매번 영영 떠날 것처럼 구느냐니.
언제나 떠날 거라는 생각만 해 왔지, 그것이 주변에 어떻게 보일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샤를로트로서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멍한 표정이 되어 눈을 깜빡였다.
“그럼…… 이혼하고 나서도 계속 교류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하죠. 당신도 재혼할 텐데, 당신 아내가 싫어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알폰소의 미간이 와락 구겨들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한 명 이상의 부인을 둘 생각이 없습니다.”
그가 한 발짝 다가왔다. 샤를로트는 물러서려 했으나, 손목이 붙들렸다.
강한 힘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악력.
그 탓에 샤를로트는 알폰소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알폰소의 새파란 눈동자 안에 일렁이는 불그림자 역시.
“당신이 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 거라는 얘기입니다, 샤를로트.”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 와도 그 앞에서 농담이냐는 물음은 할 수 없을 터였다.
샤를로트는 가히 위협적이기까지 한 그 목소리가 애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낙비 맞은 여름밤처럼 무겁게 젖은 목소리.
대체 왜?
샤를로트의 등줄기를 타고 불안이 엄습했다.
‘알폰소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관계가 너무 깊어져 버린 걸까?
미리 말하자면, 샤를로트는 알폰소와 가까워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면 되도록 추억할 거리가 없는 게 알폰소에게도 좋을 테니까.’
그래서 샤를로트는 제 사랑을 억눌러왔다.
알폰소에게 24시간 붙어 있고 싶은 마음도, 이따금 치솟는 애정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건 알폰소가 살아 있을 때도 매번 하던 일이었으니까.
‘베호닉으로 오는 마차에서 그런 말도 했잖아.’
이 정도 거리가 딱 좋겠다는 말.
분명 샤를로트가 느끼기로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과 알폰소 사이는 꽤 멀었고, 그녀는 그에 상당히 흡족해했다.
그게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일인데.
알폰소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게다가 재혼 생각이 없을 줄이야!’
이런 건 샤를로트의 예상 범위 밖이었다.
그녀는 놀람이 채 가시지 않은 낯으로 물었다.
“내가 처음이고 마지막이라면, 대체 아이는 언제 가지려고요?”
“가질 생각 없습니다. 내가 낳는 게 아니니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럼 대는 누가 이어요!”
“가까운 방계에서 괜찮은 아이를 입양해 대를 이으면 됩니다.”
맙소사. 샤를로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게 말이 돼요?”
“안 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선례가 없는 일도 아닙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입양한 아이가 좋은 후계자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내 아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건 혈통이 아닌 교육입니다.”
맞는 말이다. 단지 고위 귀족들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혈통이라고 할 수 있는 에두아르트 공작의 입에서 듣게 될 말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뿐.
“아주 에두아르트의 대를 끊으려고 작정을 했군요.”
“나는 당신에게 결혼을 제안할 때부터 그럴 계획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후계자로 삼으면 되는 간단한 일을 굳이?”
“이것 역시 번거롭지는 않습니다. 정 문제가 된다면 방계 아이를 입양한 뒤 주느비에브 황가와 혼사를 추진하면 될 일입니다.”
결국 에두아르트도 주느비에브 황가의 방계 핏줄이니, 돌고 돌아 주느비에브 황가와 결혼시킨다면 혈통 부분에서는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 말도 안 되게 완벽한 논리에 샤를로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살다 살다 알폰소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어쩐지 결혼한 삼 년 내내 후사 문제에 신경을 안 쓰더라니!
‘아직 젊으니까 조급해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아니면 노하의 더러운 피 따위를 에두아르트의 고귀한 혈통에 섞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그럼 그때도 나중에 입양하려고 그랬던 건가?
‘맙소사…….’
알폰소가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길 바랐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니,
샤를로트가 충격에서 도무지 헤어나오지 못하자, 알폰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샤를로트, 왜 그렇게 에두아르트의 대에 신경을 쓰는 겁니까?”
“그럼 신경이 안 쓰여요? 당신 문제인데-”
“당신은 어차피 내가 행복해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않습니까.”
알폰소는 그렇게 말하고는 살짝 인상을 구기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마치 제 말에 제가 다친 것처럼.
그러나 샤를로트는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전이라, 이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길게 쓸어넘겼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당신의 행복을 바란다는 건 좀 더 포괄적인 의미예요. 내기가 아니더라도 되도록 골치 아플 일 없이 살길 바란다는 거죠.”
그리고 방계 아이를 입양해서 후계자로 삼는다는 것은 아주 단단히 골치 아플 일이다.
방계 혈족들과 가신들이 어디 가만히 있겠는가?
“물론 당신이 정 그렇게 하겠다면 내가 뭐라고 할 권리는 없지만, 그래도 난 신경이 쓰여요.”
“정 신경이 쓰인다면, 당신과 대를 잇는 수밖에 없습니다.”
알폰소의 말에 샤를로트가 입매를 일자로 다물었다.
심장이 철렁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아이를 낳기 싫다거나, 당신이 싫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럼 이유가 뭡니까.”
“난 되도록 에두아르트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요.”
언젠가 나는 죽을 테니, 당신이 나를 추억할 만한 것이 되도록 적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알폰소가 지금은 저렇게 말하더라도,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지는 또 모를 일이다.
인생은 길고, 알폰소는 좋은 사람이고.
‘객관적으로 매력적이기도 하니까.’
알폰소에게 다가오는 여자들 중 알폰소를 반하게 할 만한 사람도 있겠지.
“내 아이가 에두아르트에 있다면, 나중에 당신이 재혼을 원하더라도 흠이 될 거예요. 떠날 처지에 그런 흠을 남기고 싶지 않아요.”
“다시 말하겠습니다. 나는 당신 외의 부인을 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이제 알폰소는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샤를로트 역시 강경했다.
“지금은 그럴지 몰라도,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지금 내가 당신과 함께 있는데 당신 없는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까?”
그리고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일그러진 낯을 한 알폰소의 억눌린 노기가 고스란히 전해진 까닭이었다.
“지금 나를 보십시오. 당신 앞에 있는 나를. 내 미래나, 당신 미래가 아니라.”
“……하지만.”
“내가 싫습니까?”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어떻게 당신을 싫어하겠어.
지금도 이렇게 사랑하는데.
샤를로트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리자, 알폰소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오로지 미래를 들먹이며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할 뿐.
샤를로트 본인은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다거나, 알폰소가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알폰소에게 어떤 희열로 다가왔는지 그녀가 알고 있을까.
지금 그가 인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폰소는 붙들었던 샤를로트의 손목을 천천히 놓았다.
손목 안쪽 여린 살갗을 타고 내려가, 마른 손가락을 쥐었다.
“샤를로트. 당신이 나를 거부하지 않는 건, 내기에서 이기기 위함입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혼란스럽다.
당신은 나를 사랑할 리가 없는데, 왜 내게 다가오는 거지?
내가 뭔가를 잘못한 걸까?
아니면 알폰소의 마음을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좋겠다.
그렇다면 당신을 떠나야 하는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저 눈만 뜨면 슬퍼지는 이 하나 없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꿈도 다 꾸는구나, 하면서 웃어넘기고 말 텐데.
“내가 정말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샤를로트.”
언제나 악몽은 현실에 미치지 못한다.
“영영 떠날 것처럼 구는 건 그만두십시오.”
“……하지만 난 떠날 사람이잖아요.”
“지금은 내 앞에 있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일방적으로 받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행복을 바란다면 나 역시 당신의 행복을 바란다.
그러니 당신이 나를 위로하고, 동정하고 싶다면.
“내가 당신을 걱정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