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는 제 고독을 알아차렸던 순간을 추억했다.
엘렌의 생일연회에서 돌아오고, 그녀의 목걸이를 훔친 범인까지 밝혀진 이후.
평소 샤를로트에게 먼저 말을 붙이는 법이 없던 알폰소는 돌연 샤를로트에게 엘렌의 것보다도 훨씬 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 하나를 보냈다.
그리고 샤를로트는 오랜만에 알폰소에게 화를 냈다.
“지금 내게 이런 목걸이 따위를 보내는 건, 나를 조롱하겠다는 건가요? 이게 대체 무슨 의도죠?”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의 위로였는데.”
“하, 위로라고요? 무엇에 대한? 내가 도둑으로 몰린 게 퍽 안쓰러웠나 보죠?”
당시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진심을 더 이상 곡해하지 않는 수준은 되었지만, 그래도 한번 자존심이 상하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그리고 알폰소의 깜짝선물은 샤를로트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알폰소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유감이지만, 당신이 레이디 헤레이스에게 받았을 상처에 대한 위로입니다.”
“상처라니요? 내가 그런 시답잖은 일에 상처 받을 사람으로 보여요?”
“당신이 레이디 헤레이스를 진심으로 대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흥, 웃기지 말아요. 내가 그깟 졸부의 딸을 뭐 하러 진심으로 대해요?”
“굳이 갈 필요 없는 생일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졸부들이 얼마나 사치스럽게 연회를 여는지는 익히 아는 일이잖아요. 가진 건 돈밖에 없는 주제에 힘 좀 쓰겠답시고 얼마나 돈을 발라 두었는지 구경할 생각이었죠.”
표독스럽게 말하는 샤를로트의 태도에, 알폰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진주 목걸이를 버린 것을 봤습니다. 기껏 주문제작까지 한 것 아닙니까. 당신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던데.”
“뭐, 뭐라고요?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목걸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당신이 선호하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귀엽고 아기자기한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런 게 차고 싶을 수도 있는 거죠!”
“이니셜이 E.H.라고 적힌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말입니까?”
“…….”
E.H.는 엘렌 헤레이스의 이니셜이었다.
이니셜까지 나온 이상 샤를로트는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잃어버렸다.
“……언제부터 그 목걸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거죠?”
“적어도 생일 연회에 가기 전의 일입니다.”
“어쩐지 같이 연회에 가자고 하더라니.”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인 당신이 진심으로 친애하는 상대라면 에두아르트에는 귀빈입니다.”
그러니 자신 역시 친애를 표할 필요가 있었다며, 알폰소는 부정 없이 대답했다.
“그날 연회의 일은 아무도 당신이 레이디 헤레이스를 대하는 태도가 진심이었으리라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레이디 헤레이스 본인조차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고.”
만약 엘렌이 샤를로트의 진심을 믿었더라면, 연회가 한창인 와중에 그렇게 다짜고짜 찾아와 대뜸 목걸이를 내놓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알폰소는 그것을 위로하노라 전했다.
“당신이 상처받은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듯하여, 나라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선물을 받아준다면 기쁠 겁니다.”
라고.
하여 샤를로트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 나와야 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보며 홀로 눈물 흘렸던 것은 샤를로트만 아는 비밀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는데.’
샤를로트는 언제고 친구를 원했다.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녀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껏 떠들 수 있는 누군가를.
모두가 악녀라고 그녀를 매도할 때 샤를로트 역시 그들을 두고 버러지 같은 것들이라며 욕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들 사이에 한 번쯤 끼어보고 싶었다.
또래 아가씨들과 꽃꽂이를 하며 떠드는 것은 몹시 재미있어 보였다.
신경전이 없는 티파티에서 사소하게 떠들며 예의 따위는 잊고 손으로 티푸드를 집어먹는 것도 해보고 싶었다.
드레스자락을 밟고 넘어져도, 우스운 모습을 보여도 괜찮을 만큼 사이가 좋아 보이는 그 소소함이 부러웠다.
노하의 악녀, 샤를로트 노하는 결코 꿈꿀 수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녀는 언제나 완벽해야 했다. 틈을 보인다면 모두가 그녀를 매도할 터였으니까.
이런 외로움을 공유할 만한 사람은 퀸시뿐이었지만, 퀸시는 샤를로트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버러지들에게 쓰는 시간만큼 아까운 것이 없단다. 짓밟고 올라서야지, 어울릴 게 아니라.
하여 샤를로트는 자연스럽게 입을 닫게 되었다.
그 누구도 샤를로트와 친해져 3개월을 넘기지 못하는 것 역시 영향을 끼쳤다.
-어차피 이용하고 버릴 상대였어. 난 아무렇지도 않아.
샤를로트는 늘 이렇게 말해왔지만, 사실 누군가는 알아주기를 바랐다.
자신이 그들에게 작게나마 기대를 가졌음을, 친해지고 싶었던 마음에는 한 점 거짓도 없었음을.
그런데 그걸 알폰소가 알아준 것이다.
그제야 샤를로트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왔던 것인지 깨달았다.
자신이 그간 사무치게 외로웠다는 사실 또한.
하여 샤를로트는 클로에를 알폰소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 고지식한 남자라면 분명 자신이 떠난 뒤에도 아무에게도 제 이야기를 하지 않을 테니까.
샤를로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좋게 생각해요, 알폰소. 지금 당신이 불필요하다고 느끼더라도, 언젠가 필요하게 될지 또 누가 알겠어요.”
당신에게도 당신을 알아줄 사람이 한 명쯤 있어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샤를로트의 말에, 알폰소는 알 듯 모를 듯 한 표정을 지었다.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삼키는 듯한 표정.
혹은,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누르는 듯한.
그는 곧장 입을 여는 대신 가볍게 손을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알아줄 사람이라면, 당신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도리어 놀란 것은 샤를로트였다.
그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검지를 펴서,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 나 말이에요?”
“예. 당신도 내 사정을 알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긴 하지만, 나는 떠날 사람이에요.”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떠나더라도 당신과 교류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영영 떠날 것처럼 구는지.
지난 며칠간 알폰소는 이것을 줄곧 고민해 왔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자신이 샤를로트를 붙잡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샤를로트에게 곧이곧대로 떠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들이 계약 결혼을 한 건 알폰소가 혼자가 되길 자처한 까닭도 있었지만, 샤를로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알폰소가 마음을 바꾸더라도 샤를로트에게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들의 계약은 연장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퀸시 노하가 아닌가.’
그렇다면 결혼을 이어가도 문제없는 건…….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론이었을 뿐. 샤를로트가 사랑하는 사람이 퀸시 노하라는 보장은 없다.’
사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계약 결혼을 이어갈 수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알폰소가 원하는 것은 샤를로트가 그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지금 관계라도 좋다.’
샤를로트와 적당히 안면 있는 친구처럼 지내는 관계라도.
그리고 이런 관계는 결혼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제야 알폰소는 자신이 무엇에 그토록 괴로웠는지를 깨달았다.
단순히 샤를로트가 떠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영영 떠날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게 문제다.’
결혼 전에도 그들은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풍문에 소식 정도는 듣겠죠. 에두아르트 공작이 결혼했다더라.
-왜 당신이 직접 듣지 않고 바람결에 소식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겁니까?
-그야, 나와 당신은 연관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그때는 샤를로트의 태도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샤를로트는 에두아르트와 아예 엮이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거라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이미 결혼까지 한 사이인데, 이혼 후 서로 엮이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나?
그리고 알폰소는 이를 묻고 싶었다.
“나를 싫어하는 겁니까, 샤를로트?”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내가 왜 당신을 싫어해요?”
“싫어하지 않는다면, 왜 매번 나를 영영 떠날 것처럼 구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