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나르 베호닉이 구금된 이후로 며칠째.
모든 것은 평화로웠다.
클로에는 에두아르트에게 더없이 호의적이었고, 그녀의 환대 덕분에 세르주를 비롯한 에두아르트의 가신들은 나날이 살이 뽀얗게 오르고 있었다.
단 한 명, 알폰소만 제외하고.
“에두아르트에서 한동안 아침을 드시더니, 이제는 다시 아침도 안 드셔. 마님과 종종 차도 드시는 걸 봤는데 요즘은 티타임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시고.”
물론 겉으로는 별문제 없어 보였다.
알폰소는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산처럼 쌓여 철야를 며칠씩 해도 피곤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워낙 겉으로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라, 간혹 기사들끼리 각하는 인간이 맞긴 하냐고 우스개처럼 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쟝-자크와 아르노의 눈에는 지금 알폰소가 달리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밥 좀 안 먹는다고 각하께 무슨 일이 있다고 하긴 좀 그렇지 않나?”
“각하께서 원래대로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면 될 일 같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 세르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하긴, 문제가 있었다면 너희도 알아차렸겠지. 각하께서 마님과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실 텐데…….”
“마님과 문제? 그거야-”
아르노가 뭔가 말하려고 하던 찰나, 쟝-자크가 먼저 선수를 쳤다.
“문제는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늘 그렇듯 화목해 보이셨으니.”
“엥?”
“그렇지? 각하께서는 마님께 늘 다정하시니까. 방금도-”
“푸하하!”
그때, 물음표를 띄우고 있던 아르노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세르주도 쟝-자크도 동시에 의아한 표정이 되었지만, 아르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웃어대더니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으흐, 흐하하학! 무슨 말 하나 했더니! 너네 진짜 눈치가 없냐?”
“……대체 왜 그렇게 웃어대는 겁니까?”
“넌 뭔가 짚이는 게 있어, 아르노?”
“당연하지, 이 멍청이들아!”
아르노는 웃던 기세 그대로 버럭 소리를 치더니,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대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우리 혹시 다른 천장 아래서 살았냐? 각하께서 지금-”
그리고 우뚝 멈추었다.
스멀스멀, 짓궂은 미소가 아르노의 만면 가득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쟝-자크와 세르주의 표정은 꼭 같은 속도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아르노 경, 그렇게 웃지 말아주십시오. 경께서 그렇게 웃을 때 좋은 꼴 본 적이 없습니다.”
“좋은 꼴만 안 보면 다행이지…… 나는 나쁜 꼴도 봤어.”
“날 뭘로 보는 거야, 이 자식들이? 별 거 아냐.”
“그럼 뭡니까?”
쟝-자크의 물음에 아르노가 씩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너네 같은 어린애들은 평생 가도 이해 못할 고귀하고 숭고한 감정을 목도한 심경이라고나 할까.”
“너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알아?”
“그래서 그 고귀하고 숭고한 감정이 뭡니까?”
“으흐흐.”
아르노가 대답 대신 길게 입을 늘여 웃었다.
그 고귀하고 숭고한 감정이 뭐냐고?
‘뭐겠냐, 이 눈치 없는 것들아.’
사랑이지!
각하께서 사랑을 하고 계시다고!
‘아니, 이 뻔한 걸 다들 몰랐단 말이야?’
아르노는 알폰소가 샤를로트와 아침을 먹기 시작한 날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 전부터 알폰소의 태도가 심상찮다는 걸 알고 있긴 했었다.
어, 그러니까 언제였더라…….
-정말이지 답답하다, 아르노. 각하께서 어떻게 데솔리에의 일에 샤를로트 노하의 도움을 구할 생각을 하신 거지? 내가 나서서 반대해 봐도 소용이 없어. 그 여자가 뭐라고…….
술에 취해 투덜거리는 루드빅의 말에 ‘그야 샤를로트 노하가 마음에 드셨으니 그러는 게 아닌가? 왜 모르지?’라는 생각을 했을 즈음부터였던가?
-각하께서 식당에서 아침을 드시느라 오전 일정을 늦췄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절 속이려 들지 마십시오, 세르주.
-내가 널 속여서 뭐 하겠어. 진짜야. 마님이랑 같이 드셨다니까? 나도 처음에는 안 믿겼어.
세르주와 쟝-자크가 놀라서 웅성거리는 걸 보고 ‘뭐 저런 걸로 놀라지……. 좋아하면 같이 시간 보내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때부터였던가?
아니, 시작이야 어쨌든.
‘이렇게 명확한 걸 눈치를 못 채다니.’
어쩐지 루드빅이 입에 거품을 물고 이 결혼을 반대한다 했다.
물론 아르노는 ‘딱 봐도 좋아서 결혼하는 건데 왜 저러지?’ 하는 생각을 했었고.
어쨌든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다른 이들이 알폰소의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지.
‘이 멍청이들!’
뭐? 각하께서 마님과 아무 문제가 없어?
물론 겉으로는 문제가 없겠지.
‘각하께서 짝사랑 중이시니까!’
본인이 자각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도난 사건이 있었던 날 저녁부터 알폰소의 상태는 이상했다.
-마님께서 찾으시던데요. 각하.
-……네가 가서 용건을 듣고 와라.
-왜 직접 가지 않으시고요?
-일이 있으니까.
-한가해 보이시는데.
그렇게 말했다가 한 대 얻어맞을 뻔했다.
그렇게 되도록 얼굴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와중에, 샤를로트와 함께 있는 와중이면 알폰소의 시선은 그녀를 떠나질 못했다.
-그렇게나 좋을까…….
-뭐라고, 아르노?
-어, 아냐. 창밖에 부부로 보이는 새들이 사이가 좋길래.
-새 안 보이는데?
아무래도 이것 역시 눈치챈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알폰소는 지금 거한 짝사랑을 하는 중이었다.
‘뭐, 내가 볼 땐 마님 쪽도 각하를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아르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알폰소를 대할 때가 아니면 늘 냉랭한 샤를로트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샤를로트에게 일부러 짓궂은 물음을 던졌던 날.
-그래서 사람은 몇이나 죽여 보셨습니까? 직접 죽여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아니, 다른 뜻은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쾅!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센 소리와 함께 아르노의 앞에는 단검이 놓여 있었다.
아니, 책상에 꽂혀 있었다.
어찌나 세게 꽂혔는지, 단검이 부르르 떨리는 모양새가 고스란히 보일 정도였다.
그 찰나의 순간만으로도 샤를로트가 단검을 다루는 동작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품에서 단검을 그토록 거칠게 다루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손을 물리진 못할 테니까.
-정 궁금하시다면 직접 알아보는 게 좋겠군요. 가주의 약혼녀를 죽이려 한 기사라니, 참 재밌는 얘깃거리가 되겠어요.
쉽게 말해 날 죽일 생각이 없다면 괜히 도발하지 말라는 뜻이다.
‘보통은 반대 아닌가?’
죽고 싶지 않다면 도발하지 말라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샤를로트는 정반대의 경고를 했다.
왜냐?
‘어차피 못 이길 테니까.’
그러니 샤를로트는 경고한 것이다.
또 그따위 질문으로 자신을 도발하거든 이 단검으로 스스로를 찌르겠다고.
찰나의 대면이었으나 아르노는 그 순간 확실히 깨달았다.
‘마님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야.’
그리고 이 사람은, 스스로를 해치는 데에 조금도 주저가 없다.
어쩌면 죽음조차도.
“…….”
아르노는 옷을 입던 것도 멈추고 잠깐 정지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인 그는, 이내 상념을 털어버리고 대충 셔츠를 몸에 끼웠다.
“에휴, 각하는 어쩌다…….”
어쩌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버려서는.
쯧쯧.
혀를 차며 대충 셔츠를 정리한 아르노가 겅중겅중 문으로 향했다.
“나 간다. 옷들 입고 나와.”
“뭐야? 아르노, 어디 가! 알려달라니까!”
“혼자만 알아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어서 저희에게도 알려주십시오.”
“너희 같은 애송이들은 알아도 쓸데없다.”
“너…… 나랑 나이 같은 거 알아?”
“넌 평생 가도 쟝보다 어려.”
세르주가 허망하게 되물었지만, 아르노는 송곳니가 보이도록 입술을 비죽 올려 웃을 뿐.
등 뒤로 “쟝이 아니라 쟝-자크입니다.”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아르노는 개의치 안고 발로 문을 툭 차서 닫았다.
쿵.
닫히는 문 너머 곱슬머리의 기사는 웃음기 한 점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님을 다시 만나봐야 할 거 같군.’
설마 또 단도를 꺼내시진 않겠지?
에이씨!
* * *
한편, 고민에 빠진 이는 에두아르트의 가신들만이 아니었다.
베호닉 성의 귀빈실.
샤를로트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은 드물게, 알폰소와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
‘연금술사를 찾을 때가 됐어.’
바로, 시간을 되돌린 주범에 대한 것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