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에는 그렇게 말하며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자꾸만 떨어트렸다.
“이본느의 반지도 반지지만, 초대 베호닉 부인의 목걸이가 사라지다니……. 그건 우리 가문에 내려오는 가보잖아. 이걸 어쩌면 좋지…….”
그녀는 가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아무리 해도 도둑을 잡을 수가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르나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반지…… 반지가. 반지가 사라졌다고.”
르나르의 안에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내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수도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에두아르트 공작 부부가 베호닉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에 마음을 졸였던 시간들.
그 모든 것들은 반지 하나만 있으면 해소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반지만 있다면 르나르는 언제든지 알폰소를 압박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에두아르트의 비선실세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밤낮없이 말을 몰아 달려왔는데.
반지가 없다니!
“어떻게 하지, 오빠. 초대 베호닉 부인의 목걸이를 찾아야 하는데, 잘못되면 암시장에라도-”
“지금 그깟 목걸이 따위가 중요해!”
결국 르나르가 버럭 소리를 치자, 클로에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우리 가문의 가보잖아. 당연히 목걸이가-”
“이런 멍청한 년이! 반지가 중요하다고, 반지가! 반지를 잃어버리면 어떡하느냔 말이다!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아!”
“물론 이본느의 반지도 찾아야겠지. 하지만 오빠는 베호닉의 가주잖아. 가문의 보물이 사라졌는데,”
“목걸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그 낡아빠진 고물 따위, 없어진들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하지만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의 반지는 아니다.
“그것만 있으면 우리가 수도로 가서 떵떵거리고 지낼 수 있는데, 그걸 잃어버려! 그걸!”
“……뭐라고?”
고스란히 튀어나온 르나르의 진심에 클로에의 표정이 굳어들었지만, 르나르는 너무 화가 난 까닭에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반지만 있으면 에두아르트 공작을 압박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러면 에두아르트를 집어삼키는 건 일도 아닌 것을!”
“……오빠, 설마 이본느의 반지를 그렇게 이용할 생각이었어?”
“그럼 손에 들어온 걸 이용해야지, 쥐고만 있으란 말이냐?”
“이본느의 유지를 지켜야 하니까 반지를 돌려줄 수 없다고 했잖아!”
“흥, 유지는 무슨 유지? 죽었으면 끝인 거지. 이본느도 자기가 나고 자란 베호닉이 에두아르트의 실권을 잡는 걸 더 기꺼워할 거다!”
르나르의 말에 클로에가 휘청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마, 말도 안 돼. 나는 오빠를 믿고 이본느의 반지 얘기를 한 건데.”
“그럼 네가 나를 믿어야지 누굴 믿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게!”
그렇게 소리를 치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던지, 르나르가 버럭 소리를 치며 인상을 구겼다.
“지금도 봐라! 내가 없으니 곧바로 반지를 도난당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가 반지를 가지고 있겠다고 했건만! 대체 이 일을 어쩔 거냐!”
그런데 클로에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르나르의 눈치를 보고 일을 수습하기 위해 어쩔 줄 몰라 했을 텐데.
오늘은 충격을 받아 굳은 얼굴로 르나르를 곧게 바라볼 뿐이었다.
“……르나르, 반지에 대한 게 거짓말이었으면 대체 진실은 뭐야? 에두아르트 공작에게 이본느의 이야기를 잘 전해주겠다고 했던 것도 거짓말이야?”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한 게 중요해? 에두아르트 공작은 제 어미 죽은 곳에 한 번 찾아오지도 않는-”
“당시 이본느의 아들은 성인도 아니었잖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올라갔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애더러 내려오라고 할 게 아니라!”
클로에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
“나는, 오빠 말만 믿고 그 애가 나쁘다고 생각했어. 그 애가 승전했다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오빠는 에두아르트 공작이 패륜아라고 욕했잖아. 나는 그 애가 승계를 끝내자마자 전쟁터로 간 줄도 몰랐는데!”
“그러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내겐 중요해!”
클로에가 버럭 소리를 치자, 르나르도 움찔해서 말을 잃었다.
“게다가 오빠가 가신들과 함께 수도로 올라간 것, 그게 에두아르트를 도우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면서?”
이쯤 되자 르나르도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예전이었더라면 르나르가 하는 말에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을 클로에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부터가 그랬다.
“클로에, 네게 그런 얘기를 한 게 에두아르트 공작이냐? 아니면 에두아르트 공작부인? 설마 그들 말 하나만 믿고서 네 혈육을 몰아세우는 게냐?”
“물론 나도 믿지 않았지. 오빠는 에두아르트의 충실한 가신인데, 에두아르트에 미리 연락도 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서 가주를 만나야겠다고 우겼다는 말을 내가 듣자마자 믿었겠어?”
샤를로트가 처음 이런 말을 했을 때 클로에는 당연히 부정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에두아르트에 그렇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갔을 리가…….
-그래요? 그럼 이걸 봐요.
그런 클로에에게 샤를로트가 내민 것은 르나르가 보낸 편지였다.
혹시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싶어 샤를로트가 챙겨왔던 것이기도 했다.
편지에는 분명 틀림없는 르나르의 필체로, ‘연락을 주지 않고 가신들과 함께 에두아르트를 방문한 것은 유감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도록 가신들에게 소식을 잘 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말은 정중하지만, 결국 또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면 비위를 맞추라는 거죠.
-이, 이게 오빠가 쓴 편지라고요?
-나보다는 당신이 잘 알아보겠죠. 르나르 베호닉의 필체인지, 아닌지.
르나르가 이렇게 편지까지 써 가며 무례하게 군 데에는 물론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알폰소라면 절대로 이 편지를 먼저 꺼내지도, 클로에에게 사실을 전하지도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의와 체면을 아는 푸른 피 중의 푸른 피, 지고한 에두아르트 공작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아니죠. 난 체면 따윈 챙기지 않는 인간이거든요.
샤를로트는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그녀가 이 편지를 챙겨왔다는 것을, 알폰소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면서.
“나는, 오빠가 에두아르트에 보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편지를 보고도 오빠한테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뭐? 이본느의 반지를 그렇게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클로에가 지난 십여 년간 믿어왔던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깨져 버렸다.
‘나는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지난 시간이 후회스럽고, 동시에 부끄러웠다.
클로에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르나르가 서둘러 그녀를 달래려고 했다.
“클로에, 내가 욱해서 잠깐 실언을 했다. 우선은 이본느의 반지를 찾는 것부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때, 시니컬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너머에 서 있는 것은 샤를로트와, 알폰소였다.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샤를로트가 보란 듯이 손등을 얼굴 근처에서 흔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손에 끼워져 있는 것은.
“……이, 이본느의 반지?”
“잘 알아보시는군요, 베호닉 경. 이제 모든 혐의가 확인됐네요.”
“뭐, 뭐라고?”
혐의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르나르가 미간을 찌푸린 순간, 샤를로트보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알폰소가 성큼성큼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르나르 베호닉. 너는 에두아르트의 귀물을 의도적으로 은닉하고 그 사실을 이용해 에두아르트의 가신들을 선동하려 했다.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에게만 전해지는 반지를 단번에 알아보았으니 변명할 여지는 없을 터.”
“자, 잠깐! 뭔가 오해가-”
“베호닉 가문의 주인 된 에두아르트 수장의 권한으로써, 르나르 베호닉을 이 시간부로 베호닉의 가주위에서 폐하고 구금한다.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는 클로에 베호닉이 지금까지처럼 가주 대리를 맡을 것이며, 베호닉 가의 처분은 조사가 끝난 후 결정할 것이다.”
아무리 가신 가문이라고는 해도 타 가문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것은 귀족들 사이의 불문율이었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베호닉은 에두아르트의 상징 중 하나를 의도적으로 은닉하고 이를 이용하려 했으니까.
“이에 동의하는가, 가주 대리?”
알폰소의 시선이 클로에에게로 향했다.
클로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견은 없습니다. 가주님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아르노, 쟝-자크. 끌고 가라.”
“마, 말도 안 돼! 클로에! 네가 어떻게 나를!”
베호닉이 끌려 나가며 발버둥치자, 샤를로트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머, 추해라. 패배자의 외침이란 늘 역겹군요.”
정말이지, 한심하기 그지없는 말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