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노의 말에 알폰소의 표정이 묘해졌다.
“……반지가, 사라졌다고?”
“그렇다던데요. 레이디 베호닉이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그게 사라지면 큰일이 난다면서요. 도둑을 잡느라 혈안이 된 모양이던데요. 어쨌든 마님께서는 범인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럼, 레이디 베호닉께서 부인께 제대로 사과를 하신 겁니까?”
“듣기로는 그런 것 같던데.”
그제야 쟝-자크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무례를 저지르고도 사과 한마디 없었다면 부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베호닉에 결투를 신청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되었습니다.”
“아니, 네가 왜 부인의 명예를 위해 결투를 신청해?”
“저는 에두아르트의 명예를 수호해야 하는 기사이고, 당시 각하께서는 제게 부인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으니 그 책임 역시 제가 지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기사의 역할이니까.
쟝-자크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말을 하듯 아주 당연하고 덤덤하게 말을 마쳤다.
아르노는 별종을 본다는 표정이 되어 버렸지만.
“하여간 별종 새끼…….”
아르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알폰소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아무튼, 제가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가져왔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쩐지 요즘 소란스럽더라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그런가.”
아르노는 나름대로 공감대를 찾을 수 있는 대화 상대를 원한 모양이었지만, 알폰소는 영 공감을 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그라고 성안이 소란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다.
단지 본인 속내가 더 소란해서 잊고 있었을 뿐.
클로에의 도난 사건이 있었던 이후로 며칠.
알폰소는 샤를로트와의 일로 심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샤를로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화를 내고 나갔는데도 샤를로트는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알폰소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일찍 일어나는 것도 여전했던 덕분에, 그들은 늘 그래왔듯 아침에 조우하고 말았다.
-……샤를로트. 어제 일은,
-어제 일은 미안해요. 혹시라도 동정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충분히 할 수 있는 항의였다고 생각해요. 나는 어제 일을 신경 쓰지 않으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말아요.
그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샤를로트는 그 이후에 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니 말이다.
사실 그리 자세한 설명도 아니었고, 알폰소도 반쯤 얼이 빠져 있었던 까닭에 기억에 남는 것은 한 마디 뿐이었다.
-하나만 기억해요. 무슨 소문이 돌든 신경 쓰지 말아요. 모든 건 잘 해결될 테니까!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또한 여태껏 알폰소가 알아온 모습 그대로의 샤를로트이기도 했다.
알폰소를 통제할 수 없는 갈등에 빠지게 했던 바로 그 모습.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그 앞에서는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폰소는 바보 같을 정도로 무력했던 그때를 떠올려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 난 이만 가보겠다. 너희도 정리하고 복귀해라.”
“예에,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아르노와 쟝-자크가 차례로 인사하고, 알폰소가 자리를 뜨려던 찰나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세르주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가, 각하!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무슨 일이지?”
“르나르 베호닉이 돌아왔습니다!”
르나르 베호닉.
베호닉 가의 가주이자 스스로가 훌륭한 영주라 자부하는 그는 며칠 사이 몰골이 제법 엉망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빌어먹을 에두아르트……!’
제 영지로 돌아오기 위해 밤낮없이 말을 몰아야 했으니까.
건국제에서 알폰소와 샤를로트의 결혼이 발표된 직후.
르나르는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베호닉 경! 이 사태를 어쩔 겁니까!”
“수도로 오기만 하면 당신 말대로 될 거라더니!”
알폰소가 몰래 결혼을 하고 도망가 버린 탓에 가신들의 분노는 고스란히 르나르에게로 쏟아졌다.
처음에는 르나르도 발끈해서 버럭 소리를 쳤지만, 상황은 점점 그에게 나쁜 축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퀸시를 찾아갔던 일부터가 그랬다.
“퀸시 노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당신 여동생 때문에 모든 게 어그러지지 않았소! 이 배상을-”
“제 역할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주제에 배상?”
퀸시의 녹안이 뱀의 비늘처럼 차가운 빛을 띠었다.
“내가 당장 여기서 네 목을 쳐 버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 제 이득에 눈이 멀어서는, 쯧. 제 입에 음식을 처넣겠다고 단두대에 고개를 들이밀 작자가.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도 네 입에 들어가는 게 네 살을 저민 고기인 줄도 모르겠군.”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경고의 의미는 확실히 전해졌다.
르나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더러운 인간, 처음 접근할 때는 무엇이든 도와주겠다며 입 안의 혀처럼 굴더니……!’
하지만 분해서 주먹을 쥐어 봐야 할 수 있는 게 있겠는가?
노하는 괜히 노하가 아니었다.
르나르는 그 살벌한 저택에서 나올 때 제 목에 흠집 하나 없음을 천운으로 여겨야만 했다.
뒷배가 되어 줄 퀸시가 사라지자 르나르는 다른 가신들에게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없었다.
게다가 그를 따라온 다른 가신들의 분노 역시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까닭에, 그는 자꾸만 궁지에 몰렸다.
“내 베호닉 경에게 거는 기대가 컸는데, 실망입니다.”
“이런 자를 믿은 내 잘못이지, 쯧. 우리 영지와 거래하기로 했던 것은 다시 생각해 보겠소.”
기껏 꼬드겨 놓은 가신들은 르나르에게서 쉽게 등을 돌렸다.
르나르가 몇 개월씩 공을 들여 그들을 포섭한 것이 전부 수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베호닉과 거래하기로 했던 것들마저 모두 허사가 되는 바람에, 르나르는 면전에 욕설을 뱉지 않기 위해 제 허벅지를 몇 차례고 꼬집어야만 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베호닉의 머릿속에서 그는 이미 모두의 우러름을 받는 에두아르트의 한 축이었다.
그 대단하다는 에두아르트 공작마저 제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에두아르트의 비선실세!
그게 르나르 베호닉의 목표이자 머릿속 스스로가 그리는 모습이었는데!
결국 르나르는 제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루드빅 바텔레미 경! 나는 가주께서 복귀하실 때까지 에두아르트에 머무르겠네.”
에두아르트로 밀고 들어가 끈질기게 버티는 것!
이렇게 하면 분명 가주 대리인 루드빅이 어쩔 줄 몰라 할 거라 생각했는데.
“마음대로 하십시오. 에두아르트는 가신을 홀대하지 않으니.”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각하께서는 혹여라도 수도에 머무르는 가신들이 찾아오거든 내치지 말라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각하께서 베호닉에 신세를 지고 계시니, 베호닉 경이 에두아르트에 신세 지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뭐, 뭐라고? 설마,”
“맞습니다.”
루드빅은 아주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얼빠진 르나르의 표정이 아주 통쾌하다는 듯! 이 말을 꺼내는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각하께서는 마님과 함께 베호닉으로 떠나셨습니다.”
쿵!
르나르의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거짓말일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때마침 베호닉 성에서 같은 내용의 편지가 온 탓에 더는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제야 르나르는 자신이 완벽하게 뒤통수를 맞았음을 깨달았다.
에두아르트를 압박하겠답시고 수도까지 왔건만, 그 계획이 도리어 그의 발을 묶은 셈이 된 것이다.
‘이, 이런 교활한……!’
자신이 수도에 있는 것을 이용해 몰래 베호닉으로 가다니!
르나르가 없는 틈을 타서 반지를 찾아보겠다는 속셈이 뻔했다.
‘물론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클로에를 세뇌해 놓긴 했지만.’
혹시 모른다. 클로에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알폰소가 무력으로 베호닉 성을 뒤져 보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반지가 없어지면 끝장이다!’
에두아르트의 비선실세가 되는 꿈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알폰소에게 여태 오만하게 굴었던 것도 전부 화살이 되어 르나르를 꿰뚫을 터였다.
르나르는 그 길로 정신없이 베호닉으로 향했다.
밤낮없이 말을 달린 덕분에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게 마침내 베호닉에 도착했는데.
“……클로에, 지금 내가 들은 게,”
“들은 게 맞아. 오빠가 없는 동안 도난 사건이 있었어.”
사라진 물건은 두 개.
“초대 베호닉 부인의 목걸이와…… 이본느의 반지가 도난당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