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는 다발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많았다.
클로에가 자리를 비운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으나, 대부분을 훑어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샤를로트가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인 이본느에 대해 알기에 모자람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편지에는 다양한 하소연이 있었다.
남편이 얼마나 증오스러운지, 수도 생활이 얼마나 괴로운지.
그리고, 알폰소에 대한 이야기 또한.
「클로에, 나는 도무지 그 애가 내 자식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
내가 혼자 엉엉 울고 있는 것을 봤는데도 그 애는 빤히 바라보기만 했어.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어? 꼭 감정이라는 게 없는 것만 같아!
다른 사람들은 알폰소가 의젓하다고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 애한테 정이 가지 않아.
그 애의 얼굴에서 빅터가 보일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고!」
편지 속 이본느는 알폰소를 끔찍해했다.
어쩌면 빅터에 대한 증오가 아이에게 대물림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본느가 알폰소를 아끼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차라리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더라면 좋았을걸.
황후 폐하의 아이들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운데.
내 아들은 도무지 가까이할 수가 없다니, 이게 무슨 비극이야…….」
아들을 사랑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은 다시 이본느를 찌르고, 그 우울은 다시금 남편에 대한 증오로 탈바꿈하여 악순환을 낳았다.
그녀가 편지에 적은 남편에 대한 증오는 가히 광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남편으로부터 대단한 학대를 당한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으니까.
‘이러니 클로에 베호닉이 에두아르트를 싫어할 법도 하지.’
샤를로트는 클로에가 차를 내어 주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본느는 정말 활달하고 사랑스러운 애였어요. 베호닉의 모두가 그 애를 사랑했죠. 그런데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 빅터 에두아르트와 결혼하고 나서는 완전히 변해 버린 거예요!
-구김살 없는 미소에는 스산함이 물들고, 사람이 흘겨볼 때에는 갈까마귀 같은 눈을 하게 됐죠. 나는, 이본느를 그렇게 만든 빅터 에두아르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요.
빅터 에두아르트에게 향한 혐오는 에두아르트라는 가문 전체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빅터 에두아르트, 그자가 그랬으니 그 아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겠죠. 현 에두아르트 공작 역시 틀림없이 그런- 꺄악!
-어머, 실수. 손이 미끄러졌네요. 미안해서 어쩌죠.
클로에가 빅터를 험담하며 알폰소 역시 자연스럽게 그 범주에 넣으려고 하자, 샤를로트는 그대로 찻잔을 바닥에 집어 던져 말을 잘라 버렸다.
-깨진 걸 어쩌겠어요. 이걸 치울 사람을 좀 불러야겠네요. 여기 잠시 계세요.
-그럴게요, 레이디 베호닉. 너그럽게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클로에의 방에 혼자 있을 시간을 얻어내기도 했다.
물론 알폰소에게는 찻잔을 깼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편지를 읽기 전까지는 설명을 들어도 클로에 베호닉이 왜 그렇게 에두아르트에 치를 떠는지 잘 이해가 안 됐는데.’
편지를 읽고 나니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클로에는 물론이거니와 조세핀까지 왜 그렇게 에두아르트에 반감을 드러냈는지.
‘이 편지를 조세핀도 봤겠지.’
그러니 당연히 에두아르트가 천하의 악당으로 보일 수밖에.
게다가 편지에는 이본느가 아들을 사랑하지 못하겠다며 비명을 지르듯 쓴 내용도 있었으니.
빅터의 아들인 데다, 이본느조차 사랑하지 못한 아들인 알폰소를 보는 눈이 고울 리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반지를 돌려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군.’
이본느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의 반지를 가지고 베호닉으로 내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매번 자신을 멋대로 다루는 빅터에 대한 그녀 나름대로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번에도 내가 베호닉으로 가면 빅터는 분명 나를 잡으러 오겠지.
게다가 이 반지까지 들고 가니까 당연히 찾아올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니 네가 이 반지를 대신 맡아 주었으면 해.
내겐 늘 감시자가 붙어 있어서, 이렇게 편지로밖에는 이야기를 전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줘.
내가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반지를 찾기 위해서라도 나를 수도로 도로 끌고 가지는 못하겠지…….
어쩌면 영영 반지를 돌려주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
그가 나를 망가뜨린 것의 일부라도 이렇게 갚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본느가 쓴 마지막 편지였다.
‘아마 이 편지 이후로는 베호닉으로 내려왔을 테니 편지를 쓸 이유가 없었겠지.’
그 이후로는 기록이 없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단지 편지에 적힌 일자와, 이본느가 죽은 일자 사이에 반년가량 공백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번에는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이 이본느를 오랜 기간 찾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
‘뭐,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본느가 반지를 클로에에게 맡겼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반지가 에두아르트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고.
‘지금도 클로에가 반지를 가지고 있을지는 미지수이긴 하지만.’
이만하면 찾아야 하는 조각은 다 찾은 셈이었다.
샤를로트는 백지 각서를 책상에 내려놓고, 깃펜을 잉크에 담갔다.
‘이 각서에 반지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샤를로트가 편지를 훔쳐 온 것이 아니니, 모른다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아니, 설령 편지를 들이밀더라도 반지를 분실했다고 하면 될 일.
샤를로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편지를 가져오지 않았다.
‘물론 백지 각서에 다른 조항을 좀 추가해서 협박하면 반지를 돌려받을 수는 있겠지.’
샤를로트는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철옹성같이 굳게 닫힌 입을 열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니 각서의 여백을 채워 넣기만 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면 베호닉 가와 에두아르트는 완전히 틀어지겠지.’
반지를 되찾는 것만 생각한다면 굳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지만, 베호닉 가는 일단 에두아르트의 가신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알폰소 대에서는 바뀌지 않을 사실이었다.
‘그런 가문과 완전히 등진다면 분명 알폰소에게 적지 않은 골칫거리를 안겨 주겠지.’
알폰소는 마음만 먹으면 베호닉을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클로에 베호닉의 태도에 대해서는 문제 삼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기도 합니다.
알폰소라고 해서 제 부모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는가?
그는 베호닉 가문이 에두아르트에게 가지는 반감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그 나름대로 속죄하는 방법이라고도.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인간…….’
알폰소를 떠올린 샤를로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전부 가진 사람인 주제에 행복하질 않다고 하나 했더니.’
이건 단순히 반지 따위가 아니라, 꼬인 가정사가 문제잖아.
결국 이건 양자택일의 상황이다.
단단히 꼬인 매듭을 그냥 칼로 잘라버릴지.
아니면 시간과 공을 들여서 풀어줄지.
“남편 살리기 참 까다롭군.”
솔직히 말해서 샤를로트는 베호닉을 완전히 뭉개 버릴 생각이었다.
알폰소가 외척이라는 이유로 베호닉을 대하는 걸 껄끄러워한다면 그냥 완전히 치워버리면 될 일 아니겠는가.
‘알폰소에게 눈 치켜뜨는 놈들이 뭐가 예쁘다고 놔둬?’
당연히, 클로에가 목걸이를 잃어버렸든 말든 찾아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떠나고도 알폰소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
클로에는 본질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편협할 뿐.
사람을 잘 믿고, 그만큼 의심도 잘 못 한다.
‘하지만 그만큼 주변인에게는 좋은 사람이었겠지.’
이본느의 편지를 여태껏 소중히 보관하고, 그 유지를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클로에가 이본느에게 가진 애정을 조금이라도 알폰소에게 옮겨올 수 있다면 르나르의 흉계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결국 이 방법을 써야 한다는 거지…….”
샤를로트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각서에 막힘없이 글을 적어 내려갔다.
그 뒤로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정말이었어요. 정말, 어머니의 물건이 사라져 있었어요! 그게 다 얼마짜린데!”
울상이 된 클로에의 외침에, 샤를로트가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