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62화 (64/122)

“뭐, 뭘…….”

뭘 해줄 수 있냐니.

클로에의 동공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사례 얘기라면…… 돈은 충분히 드릴 수 있어요.”

“그래요? 내가 알기로 베호닉의 재정이 에두아르트보다 뛰어나진 않을 텐데. 무엇보다 나는 돈이 아쉽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게 좋겠군요.”

나를 도둑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진 않아서.

샤를로트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틀었다.

금방이라도 방을 나가버릴 것만 같은 태도에, 마음이 급해진 클로에가 샤를로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부, 부인! 제가 실언했습니다. 뭐든지 하겠어요!”

그러자 샤를로트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틀더니, 상냥하게 물었다.

“뭐든지, 말인가요?”

“네! 뭐든지요!”

“그렇단 말이죠?”

그제야 샤를로트가 빙긋 웃더니,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끄트머리만 드러나게 내밀었다.

종이 끄트머리에는 아무것도 없이, 서명란만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여기, 서명하세요. 그럼 도와드릴게요.”

“이…… 이게 뭐죠?”

“서명한 다음에 알려드리죠.”

“하지만 이게 뭔 줄 알고…….”

“뭐든 하겠다더니, 목걸이가 별로 필요 없으신 모양이네요. 그렇다면 저도 강요하진 않아요.”

클로에가 떨떠름해하자 샤를로트가 다시 종이를 회수하려 했다.

이 종이를 놓쳐서 아쉬울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한 발짝 늦게 깨달은 클로에가 다시 샤를로트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서명할게요. 그러면, 목걸이를 돌려주시는 것 맞죠?”

“나는 훔치지 않았으니 돌려준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날 자꾸 의심한다면 도와줄 수 없어요.”

“……좋아요. 의심하지 않을게요. 목걸이가 제 손에 돌아오기만 한다면!”

클로에가 다짐하듯 그렇게 외치고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샤를로트의 멱살을 잡고 목걸이를 내놓으라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샤를로트가 훔쳐갔다는 증거가 없는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정말 에두아르트 부인이 훔쳐간 게 아닌 걸까?’

하지만 샤를로트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리 태연하게 목걸이를 돌려주겠다고 말하는 걸까?

“서명 안 할 거예요?”

“하, 합니다.”

마지막까지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클로에는 결국 종이에 서명했다.

‘에두아르트 부인이 목걸이를 훔쳤든 아니든.’

중요한 건 목걸이를 돌려받는 거다.

샤를로트가 무엇을 요구하든 클로에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이본느의 반지를 내가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잡힌 것도 아니고.’

반지를 내놓으라고 하거든 없는 물건이라고 잡아떼면 될 일이지.

클로에는 샤를로트가 반지를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뭐든지 기꺼운 마음으로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서명란 위로 ‘클로에 베호닉’의 마지막 철자까지 새겨지고 나자, 샤를로트가 종이를 채가듯 빼내 번지지 않게 잉크를 말렸다.

“이만하면 됐네요.”

“그럼 이제 제가 뭐에 서명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러죠. 이건 평범한 각서예요.”

샤를로트가 접혀 있던 종이를 펼쳐 내보였다.

그러자 접혀 있던 부분이 훤히 드러났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가.

“……배, 백지 각서?”

대체 자신이 무엇에 서명한 건지 알 수라도 있을까 했더니.

백지 각서라니.

이제 샤를로트가 저 빈 종이에 무얼 적느냐에 따라 클로에의 운명이 달라진다.

아니, 어쩌면 내용을 보지도 않고 서명한 순간부터 클로에의 명줄은 샤를로트에게 달린 셈일지도 모르겠지만…….

희게 질려 버린 클로에를 두고, 샤를로트가 빙긋 미소 지으며 도로 종이를 접어 품에 잘 넣었다.

“이 안에 뭘 적을지는 나중에 생각해 보고. 우선은 목걸이를 좀 찾아보죠.”

순식간에 클로에의 명줄을 쥐게 된 샤를로트의 표정은 아주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 * *

“목걸이를 찾는 게 아니라, 목걸이를 훔친 범인을 찾겠다고요?”

“그래요. 지금은 그게 더 쉬울 것 같으니까.”

샤를로트가 태연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른 상황이라면 범인을 잡는 것보다 물건을 찾는 게 더 쉬운 편이다.

특히나 클로에가 샤를로트를 의심하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으니, 범인은 더욱 몸을 사리고 있을 터.

클로에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샤를로트를 찾아온 것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범인을 찾겠다는 건가요?”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우선, 사라진 목걸이가 굉장히 유서 깊은 물건이라고 했죠?”

“맞아요. 초대 가주님 대부터…….”

“목걸이에 얽힌 이야기는 내 알 바가 아니니 넣어두고. 이로써 알 수 있는 게 있어요.”

도둑이 초범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 목걸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둑이 통이 참 크다고 생각했죠. 보통은 적당히 값나가는 물건을 훔칠 텐데, 유서 깊은 목걸이를 훔치다니.”

흔한 도둑들은 쉽게 팔아치울 수 있는 보석을 훔친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떡하니 베호닉의 문장이 찍혀 있는 목걸이와, 평범해 보이는 보석들 중 무엇이 더 팔기 쉽겠는가?

“그런 물건은 일반 보석상에서는 받아주지도 않아요.”

“그, 그럼……?”

“암시장에 장물로 팔아야 하죠.”

그러니 범인은 이미 팔아치울 생각으로 목걸이를 훔쳤다는 뜻이다.

당연히 초범도 아닐 테고.

“여태 물건이 또 사라진 일이 있었나요?”

“아뇨, 이번이 처음이에요. 베호닉 성의 사람들은 모두 10년 이상 일해 온 사람들이고, 충성도도 높아요. 그들이 훔쳤을 것 같지는……”

“그래요. 다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겠죠. 주인이 이렇게 잘 속아 주니 누가 물건을 안 훔치고 배기겠어요? 혹시라도 파산할 것 같으면 얘기해요. 세간이 얼마나 털릴지 구경 올 테니까.”

직설적인 비아냥거림에 클로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가까운 사람들을 믿는 게 그리 잘못됐나요?”

“잘못되었다고 한 적 없어요. 신뢰라는 건 좋죠. 적어도 배신당하기 전까지는.”

등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던 신뢰가 뱃가죽에 칼을 꽂아 넣기까지는, 신뢰라는 단어만큼 아름다운 게 있을까.

“그런데 당신은 지금 배신을 당했는데도 무작정 믿겠다고 하니까 우스워서 그래요. 목걸이 도난당한 것 정도로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건가? 다음에는 금고 열쇠를 도난당해야 정신을 차릴까?”

샤를로트가 비소하며 느슨하게 턱을 괴었다.

“범인은 초범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분명 여태까지도 사라진 물건들이 있을 거예요. 단지 티가 안 나서 그렇지.”

그리고 사라진 물건들도 분명 상당히 값나가고 중요한 물건들일 것이다.

바늘만 훔치던 도둑이 갑자기 미쳤다고 소를 훔칠 리가 없으니.

최소한 송아지나 돼지 정도는 훔치던 도둑일 터.

“하지만…… 그런 물건이 사라지는데 티가 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주인이 눈치를 못 채면 티가 나지 않는 거죠. 여긴 그럴 만한 사람이 있잖아요?”

나이가 들어 노망이 든 노부인.

물건이 몇 개고 사라져도 눈치채지 못할 만한 사람.

조세핀 베호닉.

“어서 가서 베호닉 부인의 귀중품을 잘 살펴봐요. 사라진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닐걸요?”

“마, 맙소사……! 나엘! 자네 어디 있는가! 어머님의 방을 좀 살펴봐야겠네! 어서!”

사색이 된 클로에가 숨 고를 틈도 없이 등불을 들고 뛰쳐나갔다.

밤이 되어 조용해졌던 성안이 다시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급한 발걸음이 복도를 오가는 소리를 배경으로, 샤를로트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클로에가 서명하고 갔던 백지 각서.

‘여기에 뭘 적을까.’

백지 각서라는 것은 정말 위험한 물건이었다.

내용을 어떻게 적느냐에 따라 클로에의 전 재산이 샤를로트에게 간단히 넘어올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아마 예전이었더라면 쉽게 보낼 생각은 없었겠지.’

샤를로트는 클로에에게 용서한다는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샤를로트가 클로에의 방을 뒤진 것은 맞으니 굳이 앙심을 품진 않겠지만.

클로에가 보여준 행동은 명백히 그녀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그러니 예전의 샤를로트였더라면 모든 수를 써서 클로에에게 타격을 입히고, 그녀가 샤를로트를 감히 무시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었으리라.

그래, 예전이었더라면.

‘그리고…….’

샤를로트가 클로에의 책상에서, 이본느의 편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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