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의 동정은 분명 알폰소를 부끄럽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달콤하기도 하여.
알폰소는 그 고즈넉한 석양에게로 매 순간 손을 뻗고 싶었다.
자신을 동정한다는 그 손길에 낯을 묻고 싶었다.
그녀가 먼저 스스럼없이 다가왔으므로, 그가 조금 욕심낸다 하여 회초리를 맞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그 정도의 권리 정도는-
‘-빌어먹을.’
알폰소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잘라냈다.
권리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이따위 생각이라니.’
혼란이 여전히 화마처럼 뇌리를 살라먹고 있었다.
모든 게 엉망이다.
끝없이 어그러지기만 하는 기분.
답답한 폐부에, 알폰소는 넥타이를 조금 끌렀다.
그러고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아 콧잔등을 살짝 찌푸린 채, 그는 조급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었다.
제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생각들이 알폰소를 쫓았다.
나를 그렇게 걱정하고 가여워하고 싶거든, 그 손을 거두어 가지 않기를 바라는 빌어먹을 마음이.
‘그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샤를로트는 모든 순간에 끝을 가정한다.
그녀는 떠날 사람이고, 그 역시 혼자가 되고자 그녀를 선택했다.
그러니 그만두어야 한다.
차디찬 화마를 더는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알폰소는 외벽이 길게 드리운 검은 어둠에 기대어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제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알폰소는 통제할 수 없는 마음에 괴롭다는 말을 이해했다.
* * *
한편, 알폰소의 방 안.
샤를로트는 알폰소가 닫고 나간 방문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커다랗게 띄운 상태였다.
‘알폰소…… 화가 난 건가?’
분명 화가 난 말투였으니, 이 점이 의아한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뭐랄까…….
‘옛날이랑 표정이 비슷했던 것 같은데.’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알폰소의 표정이 익숙한 모양새였던 것이다.
꼭 샤를로트가 시간을 돌아오기 전, 알폰소가 그녀를 볼 때마다 짓던 표정처럼 말이다.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샤를로트와 알폰소의 관계는 달라졌다.
그것은 샤를로트가 알폰소와 이른 아침마다 조우하며 얻은 확신이었다.
샤를로트는 본디 아침잠이 많았다.
과거 알폰소가 일찍 일어나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모르는 척 일찍 일어나보려 했다는 것은 샤를로트만의 비밀이었다.
물론 번번이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를 즈음에야 눈을 뜨곤 했기에 성공한 적은 없었지만.
‘그리고 일찍 일어나는 데 성공했을 때는…….’
이른 아침에 만나고자 했던 사람이 죽고 없었으니.
알폰소의 죽음 이후 샤를로트는 하루도 편히 잠들 수 있는 날이 없었다.
악몽과 불면에 시달리다 보니 어느새 해 뜨기도 전에 일어나는 것은 몸에 익은 일이 되어 버렸다.
물론 샤를로트에게는 기꺼운 일이다.
‘덕분에 알폰소와 아침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알폰소와 많은 대화를 주고받지는 못했으나, 함께 있는 시간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샤를로트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지금의 알폰소는 나를 싫어하지 않아.’
그것만으로도 훨씬 편안하고 즐거웠다.
옛날에는 함께 있는 순간순간이 쪼개진 빙판 위를 걷듯 위태로웠으니까.
물론 그때는 알폰소가 샤를로트를 싫어할 때였다.
결혼한 지 한참 지난 뒤였는데도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며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던가.
아니, 어쩌면 불만 어린 시선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표정을 하고 이렇게 물었었지.
-샤를로트. 내가 당신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 그렇게 싫습니까?
라고.
물론 샤를로트는 고민조차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싫어요.
당연한 일이었다.
알폰소에게는 사랑하는 상대인 아델린이 있었으니까.
좋아하는 여자를 두고 아내에게 형식적인 의무를 다하겠답시고 제게 애써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알폰소가 헌신적일수록 샤를로트는 비참해졌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설명하기에 샤를로트는 지나치게 자존심이 셌고, 알폰소는 굳이 그녀에게 이유를 묻는 수고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찌푸린 미간을 조금 더 일그러뜨리고, 차갑게 일갈할 뿐.
-싫더라도 견디십시오. 나도 당신을 참아 주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싫다고 한들 남편의 의무를 저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마음대로 해요. 당신에게 내 얘기를 전한 사용인들이 매질을 당하더라도 놀라지 않길 바라죠.
돌이켜보자면 참 뻣뻣한 인간 둘이었다.
한쪽은 자존심 때문에, 한쪽은 원칙 때문에.
둘 모두 굽히질 않으니 언쟁은 불가피했다.
‘끝에는 대부분 결국 내가 굽혔던 것 같지만…….’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을 어쩌겠는가.
샤를로트는 그즈음에서 상념을 정리했다.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샤를로트가 굳이 알폰소를 따라 나가지 않고 이 방에 남은 이유이기도 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긴 했지.’
오히려 좀 늦은 감이 있군.
샤를로트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자, 방문이 열리고 문을 두드린 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인물의 정체까지, 예상한 그대로다.
“무슨 일이죠? 레이디 베호닉.”
“그, 그게, 그러니까…….”
방 안으로 들어온 클로에는 조금 주저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에두아르트 부인.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클로에와 샤를로트의 나이 대를 생각하자면 클로에는 지금 딸뻘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 셈이었다.
게다가 이 지역 영주 가문의 외동딸로 살아왔으니 고개 숙일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고개를 숙인 클로에의 목이 붉어지기까지 한 채였지만, 눈앞의 샤를로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사과라니, 무엇을요?”
“……부인을 멋대로…… 도둑으로 몰아간 것.”
“그리고 내 방을 멋대로 뒤진 것도 포함해야겠죠. 아닌가요?”
“……맞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 더 굽혀지는 클로에의 고개에, 샤를로트가 픽 웃었다.
“아무래도 내 물건들 사이에서 목걸이를 찾지 못한 모양이죠?”
“…….”
“뻔하죠. 알폰소가 그렇게 으름장을 놓고 갔으니 뭐라도 찾아내야 할 텐데, 나는 가져간 게 없으니 나올 리가 있나.”
샤를로트의 말은 옳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방에 하녀들이 난색을 표하던 것을 떠올린 클로에가 시선을 떨어트린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연히 에두아르트 부인이 범인일 줄 알았는데……!’
사라진 목걸이는 베호닉 가의 가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서가 깊은 물건이었다.
물론 어떤 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한 상징일 뿐이었지만.
원래 귀족가에서는 이런 유서 깊은, 소위 말해 정통성 있는 물건들이 권위를 만들어 주는 법.
‘우리 가문에서 반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훔쳐갔다면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다.’
동기도 충분하고, 하녀의 증언이 있었을 뿐더러 지금 베호닉 성에 있는 외부인은 에두아르트에서 온 사람이 전부였으니 정황 증거도 충분하다.
클로에는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당연히 샤를로트가 범인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알폰소가 경고한 뒤에도 클로에는 수색을 멈출 수 없었다.
에두아르트와 문제를 빚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목걸이만큼은 찾아야 했으니까.
그런데.
-주인님, 물건이 없습니다.
-뒤질 수 있는 곳은 다 뒤져봤는데……. 침대 아래까지 다 살펴봤는데도 나오지 않아요.
정말로 물건이 나오지 않을 줄이야.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클로에의 속은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에두아르트와 문제가 생긴 것도 모자라서 목걸이까지 잃어버리면…….’
지금은 다른 문제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목걸이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샤를로트는 냉정했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으니 그만 가 보세요, 레이디 베호닉.”
결국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에두아르트 부인, 제발 한 번만 사정을 보아 주세요. 제가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당신을 억울하게 매도했다고 하셔도 좋습니다.”
무슨 벌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목걸이만큼은 돌려받아야 해요. 그건 저희 가문에 정말 중요한 물건이에요.”
“……제 물건만 중요하다고 난리군.”
“네?”
방금 샤를로트가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는데.
그러나 클로에가 그 사실을 캐묻기도 전에, 샤를로트가 먼저 운을 뗐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목걸이를 찾아주는 대가로 뭘 해줄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