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엉망이다.
돌아가는 내내, 알폰소는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샤를로트가 처음으로 알폰소의 예상을 깨트렸던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자멸의 순간인 것 같기도 했다.
-당신에게 내 무언가를 걸긴 했어요.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지만, 내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하다는 것만 알려줄게요.
-그렇다면 당신이 승리하는 조건은 뭡니까.
-당신이 행복해지는 거예요. 믿는 건 당신 자유지만.
알폰소는 그런 장난 같은 말을 신뢰할 만큼 고지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샤를로트가 첫 대면부터 그런 말을 꺼냈더라면 알폰소는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샤를로트가 제 결혼을 두고 발을 동동 굴러대는 모습이나, 제 행복을 바란다며 떠나던 그 붉은 머리칼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래, 그게 문제다.’
샤를로트는 알폰소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샤를로트가 알폰소를 사랑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의 주변인들은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레이디 노하 말이야. 난 여전히 썩 내키지 않지만…… 오빠한테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빠한테는, 그러니까, 음, 진심 같더라고. 이 얘기 레이디 노하한테는 비밀이야!”
“저는 각하께서 레이디 노하와 결혼하신다고 해도 딱히 반대는 안 할 생각이었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 자기 사람은 지독하게 챙기는 편인데, 레이디 노하께서는 각하께……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요? 뭐, 아님 말고요.”
샤를로트가 에두아르트에서 지낸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알폰소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샤를로트가 생각보다 소문과 꼭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상냥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녀는 지독하게 무관심했으며, 대개 냉소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샤를로트에게 흥미가 있던 아르노가 괜히 한번 쿡 찔러 보았다가 도리어 호되게 당해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도망쳐 나온 일은 이미 에두아르트에선 모르는 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저 진짜 별말 안 했습니다! 억울해요! 그냥 노하에서 왔다고 하니까 사람 정도는 죽여봤는지 궁금했을 뿐인데 단도를 책상에 내리꽂더라니까요!”
“죄송합니다, 각하. 가서 저놈 혀를 자를까요?”
“……샤를로트가 굳이 안 자른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냥 둬라.”
꼭 아르노의 일이 아니더라도, 샤를로트의 무정함을 알 수 있는 일은 또 있었다.
베호닉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중.
“실비아를 데리고 가지 않느냐고요? 아, 그 애는 퀸시의 첩자예요.”
떠나는 명단에 샤를로트의 직속 하녀 실비아가 없는 것을 의아히 여긴 알폰소의 물음에, 샤를로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었다.
덕분에 놀란 것은 도리어 알폰소 쪽이었다.
“……그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당신을 모셔 온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믿을 만하다고 여기는 줄 알았는데.”
“거짓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퀸시의 손을 거쳤을 테죠. 아마 지금도 열심히 에두아르트의 사정을 가져다 나르고 있었을 테고.”
“배신감을 느끼진 않습니까?”
“굳이.”
알폰소가 알기로 실비아는 샤를로트를 최소 10년 넘게 모셔 온 사람이었다.
게다가 직속 하녀였으니, 가족보다도 더 가까웠을 터인데.
그런 사람을 간단히 잘라내면서도 샤를로트는 유감의 말 한마디 없었다.
소문 속의 악녀 그대로, 누구에게나 비정하고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오직 단 한 사람.
알폰소만을 제외하고.
샤를로트가 에두아르트에서 지내며 알폰소의 일상에 한 가지 추가된 것이 있다면, 그들이 매일 아침마다 층계나 복도, 거실 따위에서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아침이에요, 알폰소.”
“간밤 편안하셨습니까?”
“물론이죠.”
샤를로트는 대체 언제 잠들고 일어나는지, 늘 알폰소보다 이르게 깨어 있었다.
본인 말로는 충분히 잤다고 하고 피곤한 기색도 없어 보여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나고서야 알폰소는 자신이 그 몇 마디 되지 않는 아침인사를 퍽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 아침인사의 풍경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옳은 표현이리라.
그녀는 늘 가벼운 네글리제나 슬립 따위의 얇은 잠옷 위로 긴 숄을 팔 위로 두툼하고 느슨하게 걸친, 전형적인 귀부인의 실내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몸집을 부풀리듯 두른 숄 덕분에 샤를로트의 어깨 위로는 더욱 가는 선이 돋보이고, 그 위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칼은 석양으로 물든 강가를 닮아 있다.
그 고즈넉함 역시도.
“오늘 아침에 뭐가 나올지 모르겠네요. 주방에 블루베리 콤포트를 좀 부탁했었는데…… 하암.”
슬리퍼를 타박타박 끌며 걷는 소리, 아침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목소리가 좋았다.
“혹여 오늘 아침으로 블루베리 콤포트가 나오거든 당신 것도 챙겨 달라고 할게요.”
흘기듯 스쳐 지나가는 미소와, 스스럼없는 대화가.
“그러지 말고 같이 식사를 하면 될 일 아닙니까.”
“바쁜 거 아니었어요?”
“생색을 낼 만한 일정은 아닙니다.”
“오늘 아침은 침대에서 즐겨 보려고 했더니 영 텄군요.”
샤를로트는 찡그리듯 웃는 습관이 있었다.
하여 미간이 좁혀들면 자연히 그녀가 웃고 있구나, 알게 된 것 역시 그즈음이다.
샤를로트가 웃을 때면 찌푸린 미간 아래로 녹안이 반짝였다.
처음에는 에메랄드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빛이 비칠 때면 그 녹안이 낙엽 빛깔을 띤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마른 잎 같은 색채를 하고서 그토록 빛나 보이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샤를로트가 고수하는 노회하고 성숙한 얼굴 이면에 철들지 않은 말괄량이 같은 웃음이 숨어 있다는 것을 과연 몇이나 알까.
알폰소에게 샤를로트를 알아가는 것은 세숫대야의 바닥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숨기지 않았으니까.
돌이켜보자면 샤를로트의 태도는 늘 같았다.
“나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알폰소의 안위와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알폰소는 명실상부 샤를로트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더 의아할 것이 있나?
도리어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질 따름이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모든 친애와 헌신이.
결코 알폰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 전까지는 어렴풋하기만 하던 그 감각은, 이 순간 형체를 갖추었다.
“날 행복하게 만든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내 역할은 끝났으니 떠나야겠죠.”
“그럼 내가 영영 불행하면? 당신도 계속 내 곁에 있을 거라는 얘기입니까?”
“그런……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돼요. 절대로. 가정조차 하지 말아요. 안 돼요.”
그 필사적인 얼굴을 본 순간.
농담이라는 대답밖에는 할 말이 없었던 그때.
과거 알폰소는 샤를로트가 말하는 ‘내기’가 대체 무엇일지 종종 궁금해하곤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한데.’
대체 누구와 무슨 내기를 했기에 제 행복 같은 추상적인 것이 조건이 된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걸었기에 그토록 내기에 이기려 필사적인 거고?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은 물어보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샤를로트의 그 표정을 보자마자, 알폰소는 그녀의 내기에 대한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어졌다.
가능하다면 평생, 샤를로트가 내기에 무엇을 걸었는지 알 수 없기를 바랐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나면…….’
그 이후로는 샤를로트의 모든 행동을 저울에 올려놓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이로써 분명해졌다.
샤를로트는 알폰소가 행복해지면 그를 떠날 것이다.
간단한 이야기이다.
‘내 곁에는 그녀의 행복이 없으니까.’
그러니 샤를로트가 알폰소에게 이토록 헌신적으로 구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알폰소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지나칠 정도로 명료하게 목적을 위한 행동일 뿐.
‘그러니 특별대우라는 말도 우습지.’
우습지만 어떻게 보자면 처음 알폰소가 예상했던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샤를로트는 알폰소를 톡톡히 이용하고 떠날 것이다.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그녀에게 흔들리는 자신이 존재할 뿐.
요약하자면, 제 목에 걸 올가미를 정성들여 만든 기분이다.
‘샤를로트에게 화를 낼 문제는 아니지.’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는 방식이 이런 것일 줄 몰랐던 제 안일함을 탓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자신이 알면서도 샤를로트의 동정에 평정을 잃을 만큼 나약한 인간인 줄 몰랐던 게 문제였고.
‘겪은 적이 없으니 알 길이 있나.’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감각.
그리고 상대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되는 감각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