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에게 자세히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클로에는 샤를로트에게 차를 대접하며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 부부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조금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하게.
-나는 고위 귀족을 많이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빅터 에두아르트, 그의 본성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요. 그토록 막돼먹은 인간이 공작위를 달고 있다니, 부조리가 따로 없었죠!
대부분은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이 얼마나 제 아내에게 좋지 못한 남편이었는지 폭로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본느가 생전에 남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는 이야기 또한.
정말 경계심이라고는 조금도 볼 수 없는 태도.
‘물론 클로에가 에두아르트에게 품고 있는 반감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눈물연기를 한 거긴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상대가 눈물 좀 보였다고 이렇게 경계심 없는 태도를 보이다니?
샤를로트는 조금 의아했지만, 금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클로에 베호닉, 이 여자…… 전형적인 시골 귀족이군.’
수도에서는 매일같이 머리 아픈 사교계 싸움이 벌어진다.
타인에게 경계심을 풀고 싶어도 쉽게 풀 수 없는 상황이 연이어 터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지방이라면, 영주가 모든 권력의 중심인 법.
사교계 역시 권력 구조를 따라서 동일하게 굴러가는 편이다.
그러니 클로에가 계산적인 인물이 될 필요는 더더욱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지.’
클로에는 어떨지 몰라도, 르나르는 분명 속셈이 뻔히 보이는 짓을 했었다.
가신들을 선동해서 알폰소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붙으려고 한 것만 보아도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 명백했다.
“그러니 만약 클로에 베호닉이 제 오빠와 같은 배를 탔다면, 나에게 그렇게 경계심 없이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당신을 포섭하고자 하는 의도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죠.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샤를로트는 에두아르트와 원치 않은 결혼을 한 것처럼 꾸민 것이었으니.
만약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 부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고 차를 내주기만 했더라면 타당한 의심이 될 터였다.
하지만.
“클로에 베호닉이 단순히 나를 포섭하고 싶었더라면 당신 부모님 이야기를 그토록 열성적으로 들려주진 않았겠죠.”
클로에가 보여준 것은 포섭하려는 자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포섭을 하려면 최소한 샤를로트의 호감을 사야 할 텐데, 그녀는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클로에 베호닉이 에두아르트에게 가지고 있는 반감은 르나르의 계략과는 정말 관계가 없는 일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가능성은 두 가지예요.”
클로에가 르나르의 계략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 있거나.
“혹은 그녀가 반지와는 정말로 무관한 사람이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으리라.
어느 쪽이든 정확히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알폰소는 뒷말을 굳이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클로에 베호닉의 방을 뒤져 보았다는 겁니까?”
“그렇죠. 마침 찻물이 떨어졌다면서 자리를 비워 주기에 사양하지 않았어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샤를로트의 모습에 알폰소는 잠깐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리고 물었다.
“그러다 걸렸으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안 해보고 손 빠는 것보다는 낫겠죠.”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알폰소의 타박에 샤를로트가 느슨하게 턱을 괴었다.
“당신 말이 옳아요.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럴 확률은 낮았어요.”
“무엇을 근거로 판단한 겁니까?”
“클로에 베호닉은 향수에 젖어 있더군요. 그리고 그런 인간은 예외 없이 똑같은 짓을 하죠.”
바로 옛날 물건을 꺼내보는 것이다.
일기장이든, 초상화든, 하다못해 유품이라도.
“운 좋으면 하나쯤은 얻어 걸리지 않을까 싶었죠. 더 운이 좋으면 반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반대로 운이 나쁘면 그대로 도둑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습니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그런 가정이 왜 필요하죠?”
방을 몰래 뒤지다가 현장에서 발각되는 것은 초짜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리고 샤를로트는 결코 초짜가 아니었고.
그녀는 마침내 무언가를 찾아내기도 했다.
방 밖으로 들고 나오는 일은 없었으니 도둑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으쓱한 샤를로트가 이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어요, 알폰소. 내가 그 방에서 뭘 찾았는지 알아요?”
“반지라도 찾은 겁니까?”
“아주 비슷해요.”
엄밀히 말하자면 반지의 실마리를 찾았다.
“당신 어머니와, 클로에 베호닉이 주고받았던 편지를 찾았어요.”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샤를로트가 책상 아래 서랍을 열자마자 편지 뭉치가 나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발신인에 ‘이본느’라고 적힌 그 편지에는 분명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해서, 이번에는 내 발로 먼저 수도에 돌아갈 일 없을 거야.
이번에는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에게만 전해지는 반지를 들고 베호닉으로 내려갈 예정이거든.
절대로 사라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니, 이 반지를 되찾아가기 위해서라도 빅터 그이가 먼저 굽히고 내려와야 할 테지.」
클로에가 반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
“굳이 편지를 들고 나올 필요까지도 없었어요. 이거면 충분하니까.”
클로에가 반지에 대해 모르고 있을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 셈.
반면 클로에가 반지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훌쩍 올라간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제 르나르 베호닉이 본인 영지로 복귀하기 전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샤를로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중얼거리자, 알폰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르나르 베호닉이 오기까지는 길어야 일주일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처럼 당신이 무리해서 스스로를 위험하게 하는 일은 난 반대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르나르 베호닉이 온 이후에,”
“그가 오고 나면 일이 훨씬 복잡해지겠죠. 우리가 기껏 일찍 내려온 보람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르나르와 직접 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알폰소가 막고자 했던 그림이다.
그렇게 되지 않게 위해 샤를로트를 끌어들인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상황에서 고작 날 좀 아끼자고 상황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죠. 주객이 전도된 행위예요. 당신도 알지 않나요?”
“…….”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알폰소는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어긋난 미간을 하고서, 자신과는 달리 스스로를 잘라내라는 말을 하면서도 조금도 주저가 없는 샤를로트를 응시할 뿐.
그 고요한 녹안을 응시하노라면 익숙한 감정이 목을 조른다.
불쾌함, 거북함, 혹은 혼란스러움이라고 가정할 만한 것들.
샤를로트가 그를 동정했을 때도,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드베인 호수를 언급했을 때도 느꼈던 불가해한 감정.
‘차라리 후자만 있었더라면 이해했을 텐데.’
샤를로트가 선을 그을 때도, 너무 깊이 다가올 때도 꼭 같은 기분이 드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녀가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이 거슬리는, 알 수 없는 제 심정처럼.
‘분명 처음에는 그 이유가 마음에 들었는데.’
샤를로트가 기필코 자신을 떠날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라면 분명 자신이 건넨 제안을 알차게 이용해 먹고 떠날 테니까.
그 영악함을 기대했었다.
이런 헌신적이고 상냥한 무정이 아니라.
“…….”
건조한 침묵 끝에 그는 대답 대신 물었다.
“……내가 맞게 이해했다면, 나더러 당신을 버리는 패로 쓰라는 말입니까.”
“단정 짓자니 듣기가 나쁘군요. 버려도 좋은 패로 쓰라는 말이에요.”
샤를로트는 그렇게 말하며 알폰소와 시선을 맞추었다.
자신과 결혼한 목적이 그것이 아니었냐고 묻기라도 하듯.
그 시선에 배 속이 난자당한 듯 뜨거워졌다.
그것은 수치심이라기보다는 모멸감이었다. 동시에 분노였고, 동시에 짙은 허무였다.
“당신은 날 동정하면서, 나는 당신을 걱정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일이라고.”
그렇게 버려질 패를, 떠날 인간을 자처할 생각이었더라면 날 동정하지는 말았어야지.
내가 당신에게 이토록 휘둘리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당신이 세간에 떨친 그 악명대로 나를 이용하고 날카롭게 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왜 당신은 그러질 않아서 나를.
나를 이다지도…….
“…….”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긴 원망의 끝.
알폰소는 숱한 말을 도로 목울대 아래로 밀어 넣으며 몸을 돌렸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당신.”
“알폰소. 나는,”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방에서 지낼 테니 쉬십시오.”
쿵.
알폰소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꼭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