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이 던져진 질문에 알폰소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당신, 말입니까?”
“그래요. 나는 당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나누어 들어도 된다는 뜻인가요?”
“그게…… 우리 계약이지 않았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알폰소의 표정에, 샤를로트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뇨, 확인차 물어본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네요.”
그녀는 알폰소가 주변을 아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지금처럼, 스스로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다.
며칠 전 소피아와 나눈 대화에서, 샤를로트는 그녀가 알폰소의 갑작스러운 결혼 사유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튼, 오빠는 왜 여태 하기 싫다던 결혼을 갑자기 하는지 모르겠어. 미리 얘기 좀 했으면 상황이 이렇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전하께서는 알폰소가 왜 갑작스럽게 결혼하는지 모르시는 건가요?
-그냥 마음이 바뀐 것 아닌가? 다른 이유가 있어?
-음, 아뇨. 없어요.
물론 그건 거짓말이다.
알폰소가 갑작스레 결혼 상대를 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에두아르트가 가신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다잡기 위해서였으니까.
‘에두아르트에 관심이 없던 나도 아는 걸, 소피아 황녀가 모른다는 건.’
알폰소가 일부러 숨겼다는 뜻이 된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황제가 알폰소를 10년간 전쟁터에 내돌린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괜히 얘기를 꺼내면 황제를 탓하는 게 될 테니 그저 침묵했겠지.
생각해보면 알폰소는 전부터 그랬다.
자신이 남의 책임을 덜어 주었으면 덜어 주었지, 자신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덜어 놓는 법이 없었다.
‘그게 알폰소가 다른 사람을 위하는 방법이지.’
그래서 그는 브누아를 위해 10년을 기꺼이 희생했다.
그로 인해 가문에 문제가 생겨도 주느비에브 황가 남매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아무 연관 없는 타인의 손을 빌리는 걸 더 쉽게 느끼는 거지.’
마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공작부인의 반지를 회수하는 일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샤를로트에게 부탁하는 것처럼.
이런 건 일종의 거래니까 알폰소가 책임을 조금 나누어준다고 하여 굳이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알폰소가 저렇게 반응한다는 건.’
알폰소가 나를 타인으로 여긴다는 거지.
샤를로트는 그 사실이 못내 흡족했다.
“나는 이 정도 거리감이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도 그런 태도를 유지해줬으면 좋겠어요.”
“이유가 있습니까?”
“언젠가 떠날 사람이잖아요, 나는.”
그래. 그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알폰소와 있는 시간이 좋아도, 그의 파란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마다 사무친 그리움이 숨통을 조여 온대도.
언젠가 당신이 서게 될 행복의 순간에 나는 없을 것이다.
내게 안배된 행운은 행복에 가까워지는 당신을 지켜보는 것으로 끝이 날 테니.
“……결혼 직후에 듣기 적절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샤를로트의 맞은편, 알폰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떠날 때를 가정하는 샤를로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처음부터 끝을 가정한 결혼이었으니까.”
“떠난다면 어디로 갈 생각입니까?”
“글쎄요.”
운이 나쁘면 당신을 사별남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넣어 두었다.
되도록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
‘기껏 행복해진 알폰소의 앞날에 그런 얼룩을 남기고 싶지 않아.’
하여, 샤를로트는 알폰소가 행복해질 거라 확신하는 순간에 떠날 생각이었다.
물론 그에는 천운이 필요하겠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가고 싶은 곳이 있기는 해요.”
“어디?”
“드베인의 호수.”
“우리가 재회한 곳 말입니까?”
“그래요, 거기. 봄이 되면 예쁘거든요. 혼자 가기에는 조금 적적했지만.”
봄꽃이 가득 떠내려와, 여신의 찻잔이라고도 불리는 드베인의 호수.
그 호수는 샤를로트에게는 특별한 곳이었다.
그래서 굳이 드베인에 가서도 그 호수를 찾아간 것이기도 했고…….
샤를로트의 녹안이 허공에 과거를 덧그렸다.
-내년 봄에 드베인에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샤를로트.
-왜요? 레이디 라베루즈와 놀아 보니 그곳이 좋아 보이던가요? 난 안 가요.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레이디 라베루즈와는 어느 곳도 가지 않았습니다.
알폰소는 착잡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리며 한숨처럼 덧붙였다.
-당신이…… 그곳의 호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라고요?
-가고 싶지 않다면 됐습니다.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하, 속 좁게 구는군요. 좋을 대로 해요. 난 갈 테니까.
샤를로트의 말에 알폰소는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그녀는 귀찮게 굴지 말라고 핀잔하면서도 굳이 막지는 않았다.
아마도 알폰소가 살아서 다음 봄을 맞았더라면 두 사람은 약속한 대로 드베인에 갔을 것이다.
인내하는 것을 싫어하는 샤를로트의 성격상, 낙엽이 떨어져 있는 호수나 꽁꽁 언 호수라도 좋다며 봄이 오기도 전에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 그랬겠지.’
알폰소가 살아 있기만 했더라면.
하여 현재의 샤를로트에게 가고 싶은 곳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드베인의 호수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노하로는 두 번 다시 발 들이고 싶지 않았고, 에두아르트로는 차마 돌아갈 수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알폰소와 약속한 호수를 보고 죽을 수만 있다면 호상이겠지…….
샤를로트는 마차의 흔들림을 느끼며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뭐라고요?”
그리고 도로 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샤를로트가 사랑한 그 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쓸데없을 만큼 고지식하고, 가까워질수록 속내를 알 수 없어지는 그 반듯한 낯.
“드베인의 호수. 혹 함께 가기로 한 사람이 있는 겁니까?”
“아뇨, 그건…….”
“그럼 나와 함께 가는 건 어떻습니까. 그때 보았던 호수가 퍽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의 계약은 1년이니, 이혼 직전에 다녀오면 시기도 제법 적절하겠습니다.”
알폰소는 이혼 후에 가도 나쁘지 않겠다며 멋대로 시기를 가늠하더니, 문득 샤를로트에게 물었다.
“싫습니까?”
그제야 샤를로트는 자신이 줄곧 얼빠진 표정으로 알폰소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놀랐을 뿐이다.
“왜 함께 가려는 거죠? 당신에겐 굳이 나와 같이 가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알폰소는 타인을 위해 다른 지역까지 함께해 줄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인과 타인을 구분 짓는 선이 그 누구보다 명확하고 단호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런데 왜?
“혼자 가기에는 조금 적적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강 보답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보답이요? 무엇에 대한?”
“내겐 베호닉이, 혼자 가기에는 조금 꺼려지는 곳이라.”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베호닉이 꺼려지는 곳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네요.”
알폰소가 기호를 얘기하는 일이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샤를로트가 싫어 죽겠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할 때도 정작 싫다는 말은 내뱉지 않았던 알폰소인데.
꺼려진다고 직접 이야기하기까지 하다니?
“혹시 홀대받을까 봐 그러는 건가요? 그래도 당신은 가주이니, 갑작스럽게 찾아간다고 해도 우리를 홀대할 수는 없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알폰소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틀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물에 적신 것처럼 짙어지는 음영이 낯의 굴곡을 따라 쪼개졌다.
“두고 보면 알 겁니다.”
* * *
‘두고 보면 알 거라더니…….’
베호닉에 도착한 현재.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에두아르트? 그 빌어먹을 에두아르트를 베호닉 성에 들여?!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어! 썩 꺼져!”
“대, 대부인, 제발 고정하세요.”
“고정은 무슨 고정! 에두아르트 때문에 우리 이본느가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고정을 한단 말이냐! 이거 놔! 놔라!”
샤를로트와 알폰소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고함을 치던 노부인이 하인들의 손에 끌려 나갔다.
마침내 잠잠해지자, 그녀를 말리던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다시피 어머니께서 상태가 좋지 않으세요. 나이가 드셨더니 섬망이 오셔서. 사정이 이러니 피차 좋지 못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군요.”
그러니 얼른 떠나 달라는 완곡한 말을 남기고 그녀 역시 쌀쌀맞게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보며, 샤를로트는 생각했다.
‘알폰소…….’
이런 건 미리 좀 말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