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찾아온 샤를로트의 물음에 루드빅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매정하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무슨 속셈이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내기를 즐기지 않습니다. 사양하죠. 그리고 되도록 당신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으니 말 걸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알폰소는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모양이어서 말이죠.”
“……!”
알폰소 이야기가 나오자 몸을 돌리던 루드빅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게다가 공작부인이 가주의 최측근 가신과 사이가 나쁘면, 분명 세간에서도 탐탁잖게 여길 테고.”
“…….”
“어쩌면 알폰소와 에두아르트의 명예에도 손실이 생길지 모르겠군요.”
“……대체 뭘 원하고 이러는 겁니까.”
결국, 명예 얘기까지 나오자 루드빅은 샤를로트를 무시하지 못하고 몸을 도로 틀었다.
전부 예상한 범주였다.
‘루드빅은 가신들 중에서도 알폰소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으니까.’
이제야 고백하지만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최측근 가신들에 대해 잘 알았다.
원래 사람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더 쉽게 드러나는 법이니까.
그녀와 사이가 나쁜 알폰소의 가신들이 각각 어떤 성격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샤를로트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이는 바로 저 루드빅이다.
그 이유 또한 간단했다.
‘날 가장 싫어했으니까.’
세르주를 비롯한 다른 가신들은 겉으로나마 샤를로트를 알폰소의 아내로 대우해 주었지만, 루드빅은 샤를로트를 집안에 굴러들어온 쓰레기 따위로 취급했다.
-각하께 용건이 있으시다면 제게 전하시죠. 그리 급하지 않은 용건이라면 다음부터는 집무실로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특히나 루드빅은 가문 내부의 일 역시 겸하고 있었던 까닭에 세르주보다도 알폰소의 곁에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덕분에 샤를로트가 알폰소를 만나러 가기라도 하면 알폰소를 만나는 시간보다 훼방을 놓는 루드빅을 상대하는 시간이 더 길 정도였다.
‘과거에는 내가 알폰소한테 한 짓 때문에 그렇게 날을 세우나 싶었는데.’
알폰소가 원치 않는 결혼을 밀어붙인 장본인이기도 했고, 주인인 알폰소 역시 샤를로트를 싫어했으니 루드빅이 그녀를 유별나게 싫어한다 한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을 돌아와도 이렇게 날을 세우는 걸 보면 원래 성격도 한몫한 듯했다. 한번 지지하거나 반대하기로 마음먹은 것에는 굽힘이 없는 성격.
‘하긴, 루드빅은 에두아르트와 알폰소의 명예에 유난히 집착하는 성향이 있으니까.’
노하 출신인 샤를로트를 반길 이유가 있나.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에두아르트나 알폰소의 명예를 언급하면 매번 압정이라도 밟은 사람처럼 반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셈이다.
꼭 지금처럼.
‘옛날 생각이 나는군.’
알폰소가 죽은 뒤, 루드빅과 처음으로 대면한 순간에.
-각하가 아니라 당신이 죽었어야 했어. 전부 당신 때문이야! 당신만, 당신만 아니었더라면……!
이미 떠난 이의 죽음을 두고 제 탓을 하는 것이 참 꼴같잖았다.
제 멱살을 붙들고 그런 말을 해 봐야 죽은 알폰소가 살아 돌아온다던가?
그러나 가장 우스운 것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차마 루드빅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스스로였다.
-그렇게 잘 알면 미리 날 죽이지 그랬어, 루드빅 바텔레미. 그랬으면 네 잘난 주인은 살아 있었을 텐데.
자조하듯, 혹은 이죽거리듯 내뱉은 말에 루드빅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기껏 이를 악문 것이 보람 없게도.
‘……쓸데없는 기억을 떠올렸군.’
샤를로트가 상념을 지워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지금은 모두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했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에요. 알폰소가 골머리 썩을 일 없이 사는 것.”
“그것 참 신뢰가 가는 발언이군요.”
“당신이 믿지 않으면, 알폰소가 마음을 바꿔서 당신 말을 받아들이기라도 할 것 같은가요?”
샤를로트의 말에 루드빅이 미간을 찌푸렸다.
알폰소가 얼마나 고지식하고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인지는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반대하는 목소리를 좀 낸다고 해서 알폰소가 결정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 또한.
“그러니까, 각하께서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테니 그냥 닥치고 지내라는 겁니까?”
“핵심을 잘 짚는군요.”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 내리신 결정을 반드시 따르는 것만이 올바른 충성의 형태는-”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요. 내기를 하자고 했잖아요?”
샤를로트는 손을 횡으로 그어 루드빅의 말을 잘랐다.
“분명 제가 내기를 즐기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내기를 즐기지 않는 것, 맞아요? 나한테 질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시답잖은 말로 도발할 생각 마시죠.”
“루드빅 경, 알폰소에게 얼마나 신임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
또 한 번 알폰소 이야기를 꺼내자 돌아서 있던 루드빅이 휙 몸을 틀었다.
그사이 루드빅의 낯은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퍽 무서운 얼굴을 하는군요. 자신이 없나 봐요?”
“……도발을 잘하시는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 빌어먹을 내기라는 게 대체 뭔지 말씀해보시죠.”
“간단해요. 알폰소의 신뢰를 시험해 보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신임받지 못한다는 쪽에 걸죠.”
“하, 어이가 없군요. 감히 각하와 내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겁니까?”
“대답이나 해요. 할 건가요, 말 건가요?”
샤를로트의 말에 루드빅은 이를 갈더니, 씹어 뱉듯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내가 지면 당신과 각하의 결혼을 더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각하께서 무얼 무얼 하시든 따르죠. 대신 내가 이기면 지금 한 발언을 전부 사과하고, 공작부인 자리에서 깨끗이 물러나십시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그럼 약속한 거예요.”
그렇게, 루드빅은 완전히 함정에 걸려들었다.
왜냐하면 샤를로트가 제안한 내기라는 것은 다름 아닌…….
“알폰소한테 가서 나와의 결혼을 찬성한다고 말해요.”
……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기의 내용을 들은 루드빅은 뜨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게 뭡니까! 결혼을 찬성한다고 말하라니!”
“신뢰를 시험해보고 싶다면서요? 그럼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해야죠.”
평소의 루드빅이었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
바로 샤를로트와 알폰소의 결혼을 찬성한다는 말!
만약 알폰소가 그 말을 믿지 않으면 루드빅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이니, 결국 샤를로트가 이기게 되는 셈이다.
쉽게 말해 자승자박.
“그런 얄팍한 수를 쓴다고 내가 당신을 찬성할 리 있습니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내기는 내가 이겼군요. 당신이 우리 결혼을 더는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알폰소에게 전해줄게요.”
“말장난하지 마시죠! 처음부터 이런 내기 따위, 없던 일로 만들면-”
“후회할 텐데?”
샤를로트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한 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귀여운 곰인형.
그것도.
제국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곳에서 만든 모든 인형들은 마치 신의 손을 거쳐 탄생한 것만 같다며 극찬을 받는 인형 공방의!
“25주년 기념 한정판 시리즈죠.”
이제는 구할 수도 없는 최고급 빈티지.
루드빅에게는 전설 속 보물이나 다를 바 없는 물건이었다. 그에게는 남몰래 곰인형을 수집하는 은밀한 취미가 있었으므로.
“이, 이, 이게 대체 어디서 났습니까! 소피아 전하께서도 구하려다 실패하셨는데! 맙소사, 내가 살아생전에 이 실물을 볼 줄이야……!”
“마음에 드나 봐요? 이렇게 열렬한 반응은 기대 못 했는데.”
“그, 그건……!”
그제야 아닌 척할 때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루드빅이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 않습니까! 대체 이걸 어떻게 구한 겁니까?”
“모든 귀한 것들은 암시장에 오르기 마련이죠.”
그리고 제국의 암시장은 노하의 손바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
샤를로트는 혹시라도 루드빅을 매수할 상황을 대비해 곰인형을 빼 두었었다.
“당신이 내기에서 이기면 덤으로 이걸 주죠.”
“크윽, 이 교활한……!”
“할 거죠?”
“악마 같은 여자……!”
“곰인형에서 손부터 떼고 말하지 그래요?”
결국, 루드빅은 알폰소가 없는 동안 집을 지키는 충실한 개가 될 것을 약속했다.
곰인형의 명예를 걸고.
* * *
그렇게 현재.
덜컹이는 마차 안, 알폰소가 내심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결혼에 반발이 심한 것 같아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다들 잘 따라주어 고마울 따름입니다.”
“당연한 일이죠. 당신 가신들은 당신을 많이 아끼는 게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곰인형도 많이 아껴서 천만다행이었다.
‘루드빅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격하게 반발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
알폰소가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조금 서운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알폰소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반지를 찾은 이후에는…… 가신들에게도 모든 걸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못 찾으면 영영 물 건너갈 이야기군요.”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그들에게 나눌 이유는 없으니까.”
당연하다며 알폰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샤를로트가 불쑥 물었다.
“그럼 나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