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에 루.
갈색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황궁 근위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젊은 기사.
‘그리고 이례적인 평민 기사지.’
검술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그 실력을 인정받아 특별히 준남작의 작위를 하사받고 근위대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던가.
그는 겉으로 보기에도 퍽 건실하고 선량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런 디디에가 말괄량이 소피아 황녀의 숨겨진 연인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소피아, 디디에, 그리고 소피아의 유모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유모는 브누아 황제의 눈에 띄면 남매 사이에 피바람이 불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둘의 비밀 연애를 도운 덕분에, 그들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순조롭게 사랑을 쌓아 왔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연애 사실을 아는 이를 한 명 더 추가해야 한다.
‘바로 나.’
샤를로트 노하.
그녀의 시니컬한 시선이 눈앞에서 길길이 날뛰는 소피아에게 향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당신이 이런다고 내가 당신과 알폰소 오빠의 결혼을 찬성할 줄 알았어?!”
그녀는 정말 척 보기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소피아의 유모는 철저한 사람이었고, 그런 그녀가 혼신을 다해 도왔으니 소피아는 여태 그녀의 연애에 대해 아는 이가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래.
-소피아 너,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서.
말을 타러 가자며 기분 좋게 나간 자리에서, 소피아의 사촌오빠 알폰소가 불쑥 이렇게 말해오기 전까지는.
그때를 회상하자면 정말이지, 전력으로 달리던 말에서 낙마할 뻔했을 때보다 가슴이 철렁했다.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는 말밖엔 할 수 있는 표현이 없었다.
-무, 무, 무슨 소리야?! 내가 만나긴 누굴 만나!
-디디에 루.
-…….
안타깝게도, 소피아는 거짓말에 재능이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기습으로 정곡을 찔린 경우에는 더더욱.
그녀는 얼굴부터 진흙탕에 처박힌 사람처럼 말문을 잃어버렸다.
어떤 대답보다도 확실한 시인이었다.
그 바람에 알폰소에게 한바탕 설교를 듣게 된 상황에서도 소피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대체 알폰소 오빠가 어떻게 알았지?’
유모의 도움은 확실했다.
브누아가 모를 정도라면 당연히 알폰소도 몰라야 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소피아는 고민 끝에 세르주를 족쳐 보기로 결정했다.
-저, 저는 모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몰라? 이미 다 알고 왔어! 똑바로 불지 않으면 재미없을 줄 알아.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전하!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가진 건 방금 말씀드린 정도밖에 없다고요!
하지만 알아낸 거라곤 세르주의 재산 목록이 꽤나 소박하다는 것뿐.
‘알폰소 오빠가 자력으로 알아냈다면 세르주가 모를 리 없어.’
알폰소가 하는 모든 일에는 세르주가 끼어 있다.
가주를 보좌하는 것이 곧 그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런 세르주가 모른다면, 알폰소가 자력으로 알아냈다는 뜻이 아닐 터.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누군가 알려준 것이다.
누구겠는가?
‘샤를로트 노하!’
이 교활한 여자!
감히 내 약점을 잡고 날 협박하려 하다니.
이런 식으로 알폰소 오빠도 꼬드겼겠지!
그것도 모자라 알폰소 오빠에게 나와 디디에의 교제 사실을 알리기까지 해?
소피아로서는 화가 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찾아왔는데.
샤를로트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소피아를 서재로 안내하더니, 길길이 날뛰는 소피아에게 이렇게 첫 마디를 열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황녀 전하. 저는 전하께 허락을 받을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전하를 도와드리려고 한 거죠.”
“뭐라고?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군. 허튼 수작 말고 똑바로 불어.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그건 알려드릴 수 없어요.”
샤를로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소파 등받이에 느슨히 기대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교제 사실을 숨길 생각이셨죠?”
“……뭐?”
“계속 만나다 보면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할 거 아닌가요? 디디에 루와 하든, 다른 사람과 하든. 알폰소 말을 들어 보니 폐하께서는 전하를 슬슬 결혼시킬 생각이시던데.”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소피아의 낯이 창백해졌다.
브누아는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정략결혼은 필수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주느비에브 황가의 핏줄로 태어난 의무라고 생각했으니까.
당연히, 아끼는 여동생이라고 할지라도 결혼 상대로 평민 기사를 허락해 줄 리 만무했다.
‘다행히 지금은 알폰소 오빠가 폐하께는 말하지 않았다지만.’
눈앞의 여자는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는지 조금도 가늠이 되지 않는 유형의 인간.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지? 디디에와는 애초에 진지한 사이도 아니야.”
“정말요?”
“그래! 그까짓 평민 기사 따위, 작위도 별 볼 일 없고 가진 영지도, 재산도 없고! 심지어는 부모도 없는 고아인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만.”
샤를로트가 단호하게 말을 자르며 소피아의 손을 잡았다.
“마음에 없는 말은 그쯤 해두세요. 스스로에게 상처가 될 뿐이지 않나요.”
“다, 당신이 뭘 안다고…….”
“알아요.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쯤은 나도 해 본 일이니까.”
샤를로트의 말에 소피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누구?”
“누구겠어요? 알폰소죠.”
한 치 고민 없는 대답에 소피아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
“제가 뭐 하러 거짓을 말하겠어요?”
“당연히 내 반대를 꺾으려고-”
“전하께서 반대하시든 말든 저희는 결혼할 거예요. 아무 관계 없는 일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디디에 경의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 보는 게 어때요? 저는 전하의 사랑을 도와드릴 방법을 알고 있거든요.”
엄밀히 말하자면, 샤를로트는 소피아의 사랑이 어떻게 파국에 다다르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못해 꽁꽁 숨긴 채로 연애를 이어가다 결국 깜짝 결혼 발표를 하고 도망친다.
브누아는 디디에는 사살, 소피아는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에 디디에를 지키려던 소피아는 결국 디디에를 향해 날아온 화살을 대신 맞고 죽는다.
은밀하게 소피아를 도와주기 위해 그녀를 찾아다니던 알폰소의 노력이 무의미해진 순간이었다.
‘소피아 황녀가 죽든 말든, 솔직히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지만.’
알폰소가 그 일로 많이 힘들어했다.
만약 과거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알폰소의 행복은 영영 요원해질 터.
‘무엇보다, 지금은 소피아 황녀가 조금 필요하기도 하니까.’
샤를로트의 사늘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딱 한 가지만 도와주시면, 전하께서 디디에 경과 결혼할 수 있도록 해드리죠. 목숨을 걸고 맹세해도 좋아요.”
“……역시, 속셈이 있었군.”
“제가 사랑하는 건 알폰소지, 전하가 아니니까요.”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샤를로트의 냉담한 대답에, 소피아는 낯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분노보다는 고민이 서린 얼굴이었다.
척 보기에도 독배로 보이는 잔을 마셔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고민.
하지만 어쩌겠는가?
소피아 혼자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디디에와 순조롭게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독배든 무엇이든, 마실 수밖에.
* * *
샤를로트가 소피아에게 부탁한 것은 정말 하나뿐이었다.
당장 멀리 떠날 수 있을 만한 마차를 황궁에 준비해 달라는 것.
건국제가 황궁에서 열린다는 점을 이용해, 황궁에서 마차를 갈아타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피아는 조력자로 안성맞춤이었다.
‘황궁이 집이니까.’
무엇보다 에두아르트에 깊이 관련된 사람도 아니니, 마차를 준비한다고 해서 누가 주목할 사람이나 있겠는가?
샤를로트는 바로 그 점을 이용했고, 소피아와의 이야기가 잘 풀린 덕분에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물론 반대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각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반대입니다!”
개중에서도 특히 알폰소와 샤를로트가 떠나 있는 동안 가주 대리를 맡게 될 루드빅의 반대가 극심했다.
“에두아르트 가주의 결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식도 치르지 않고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떠나 버린단 말입니까!”
“왜? 난 재밌는데.”
“는 즈응흐 흐르, 으르느…….(넌 조용히 해라, 아르노…….)”
아르노는 재미있지 않냐며 웃어댔지만 다른 가신들은 영 마뜩잖아하는 기색이 눈에 보였다.
샤를로트와의 결혼은 그렇다 치더라도, 결혼 과정까지 저렇게 바람에 낙엽 굴러가듯 해치우다니?
특히나 고지식한 알폰소의 대처는 이런 상황에서 전혀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샤를로트는 이번에도 그녀의 장기인 유연성을 발휘해 주었다.
“루드빅 바텔레미 경, 우리 내기 하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