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하와 에두아르트의 격이 맞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소피아는 황녀였다.
고작해야 황제 부부에게나 고개를 숙여 봤을까.
그런 그녀가 노하의 악녀를 새언니라고 존중해야 하는 상황을 달갑게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다.
소피아의 날카로운 선언에, 알폰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이 퍽 언짢다기보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
“아무래도 너와는 잠깐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군. 그렇잖아도 할 말이 있었으니 따라와.”
“뭐, 뭐야? 어딜 가는데?”
“소피아 너와 말을 타지 않은 지도 꽤 된 것 같아서. 말을 달리기에 좋은 장소를 안다. 부쩍 따뜻해지는 이 시기에는 더욱 그렇지.”
승마 얘기에 소피아의 눈이 빛났다.
천성이 활달한 소피아는 평소 말을 타고 평원을 내달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으므로.
“속셈이 뻔하지만…… 오빠 말대로 요새 통 말을 못 탔으니까 한 번만 속아줄게. 가자!”
소피아는 알폰소의 제안에 마지못한 척 응했다.
정원에서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던 실비아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말을 타러 나가면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겠군.’
하지만 아쉬워한 것도 잠시뿐.
천만다행으로, 소피아는 또다시 에두아르트 공작저를 찾아왔다.
기묘한 표정으로 승마에서 돌아온 다음 날의 일이었다.
“황녀 전하? 지금 각하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알고 있어. 내가 만나러 온 건 샤를로트 노하, 저 파렴치한 여자니까.”
소피아는 샤를로트에 대한 반감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샤를로트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면전에 대고 파렴치하다니, 듣는 사람으로서 조금 속상하네요. 곧 가족이 될 사이인데.”
“가족은 무슨!”
소피아는 성큼성큼 샤를로트에게 다가가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당신, 알폰소 오빠를 이렇게 내세우면 내가 당신과의 결혼을 찬성할 줄 알았어? 소문은 익히 들었다만 아주 가증스럽기 짝이 없군.”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전하.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신 듯한데……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시겠어요?”
샤를로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은 소피아를 자연스럽게 서재로 들였다.
실비아는 슬그머니 따라가 차를 내어 주며 이야기를 엿들어 보려고 했지만.
“차는 됐고, 전하와 긴밀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니 이 부근에는 아무도 없도록 해라.”
샤를로트가 단호하게 말하는 통에 서재까지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엿듣기가 곤란한데.’
에두아르트 공작가의 서재는 넓었다.
특히 책을 읽고 간단히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과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담소를 나누는 곳이 안쪽에 있는 까닭에 더더욱 이야기를 엿듣기가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아무리 문틈에 귀를 대 보아도 들리는 것은 드문드문한 목소리뿐.
“……어요, ……결혼…… 도와…….”
“말도…… 잖…… 나는…….”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샤를로트가 무언가를 유창하게 이야기하고 있고, 소피아가 그에 날카롭게 대꾸하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다.
‘아무래도 조금 더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뭔가 소식을 전한다는 핑계로 잠깐 들어갔다가 나오는 척하면서 서재에 숨어드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론을 내린 실비아가 서재의 문으로 손을 뻗는 순간.
“거기, 뭐 하는 거지?”
뒤에서 그림자가 드리웠다.
실비아는 황급히 몸을 틀었다. 무표정한 낯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에두아르트 공작이 벌써 귀가했을 줄은 몰랐군.’
어쭙잖게 첩자 짓을 하던 이라면 모르겠으나, 실비아에게 이런 일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태연하게, 그리고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 잠시 전해드릴 것이 있어서요. 안에서 소피아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데, 오셨다고 말씀을 전해드릴까요?”
“됐다. 내가 직접 들어가지. 전할 건 물건인가?”
“소식입니다만,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실비아의 말에 대답은 없었다. 그만 가 보라는 뜻이다.
괜히 미적거렸다가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실비아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에두아르트 공작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샤를로트 노하가 말했던 것과는 좀 다르군.’
그녀는 몸을 돌린 순간 마주했던 그 위압감을 기억했다.
물론 알폰소는 체격이 큰 사람인 데다 빛을 등지고 있었던 탓에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했으니 더욱 스산한 분위기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 위압감이 단순한 착시가 아님을 알았다.
때로 지나치게 벼려진 기운은 날붙이보다도 위험하기 마련이다.
실비아를 바라보는 무기질적인 벽안은 그 빛깔만큼이나 시렸다.
당장 사지 어딘가를 날리고도 그 평정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실비아는 노하에 오래 몸담은 인간의 직감으로 확신했다.
‘내가 알아본 것을 샤를로트 노하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을 텐데.’
근래 샤를로트는 실비아가 그녀를 보아 온 이래로 가장 낯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강퍅한 성정이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평소 모습은 모두 전과 같았다.
샤를로트가 알폰소라는 인간에게 보여주는 신뢰감을 제외한다면.
사실 실비아는 퀸시에게 받은 명령이 하나 더 있었다.
-샤를로트와 에두아르트 공작 사이를 교묘하게 이간질해라. 그 인간도 별 볼 일 없는 버러지라는 것을 알려줘야지.
샤를로트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내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과거에도 몇 번 누군가와 가까워지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퀸시는 샤를로트의 인간관계에 ‘약간의 도움’을 주곤 했다.
샤를로트가 친하게 지내는 상대의 열등감을 일깨워 준다거나, 그녀에게 연정을 품은 상대에게 노하가 어떤 가문인지 살짝 엿보여 주는 등.
-세비녜 영애? 말도 꺼내지 마. 나한테 그토록 친하게 지내자고 하더니, 뒤에서 내 욕을 그렇게 하고 다녔을 줄이야.
-집사, 코즈모 가문에서 연락이 오거든 전부 불태워 버려. 감히 나를 바람맞히다니, 제정신이 아닌 거지.
그들은 모두 퀸시가 의도한 대로 그들의 밑바닥을 드러내며 샤를로트를 밀어냈다.
그럴 때마다 퀸시는 샤를로트를 달래 주며 말했다.
-말했지, 샤를로트. 오직 나만이 너를 진심으로 아낀다고.
그리고 퀸시는 이번 일도 여태까지처럼 ‘약간의 도움’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알폰소가 다른 여자와 정답게 거니는 걸 봤다고? 그렇구나. 내버려 두렴.
-그가 나를 이용하려 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쁠 거야.
-알폰소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좋은 사람이거든.
샤를로트의 신뢰는 생각 이상으로 두터웠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친애를 표현하는 샤를로트라니.
‘늘 저 사람이 뒤에서는 자신을 업신여기고 있을 거라며, 아무도 믿지 못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실비아는 의문했으나,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분명 주인님께서 걱정하시겠군.’
어차피 샤를로트는 노하로 돌아올 것이다.
퀸시의 계략이 실패할 리는 없으니까.
* * *
건국제의 날은 금세 밝았다.
황궁으로 모여든 귀족들은 이번에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특히나, 이번에는 묘한 소문이 돌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 소문이 사실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봐요. 에두아르트와 노하라니, 말이 되나요?”
“하지만 샤를로트 노하가 에두아르트에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던데요.”
“게다가 에두아르트 공작께서 아직도 결혼을 발표하지 않으셨다는 게…….”
이곳저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 사이에 선 에두아르트의 가신들은 저마다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두아르트 공작저에서 샤를로트를 만난 적 있는 그들은 지금 들려오는 소문이 결코 거짓이 아니리라는 것을 알았던 까닭이다.
“베호닉 경도 그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설마 설마 했지만, 에두아르트가 노하와 사돈을 맺다니…….”
웅성대는 가신들의 목소리에, 르나르 베호닉이 엄중하게 입을 열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각하께서 저희에게 상의조차 하지 않고 그런 일을 진행하셨다는 건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할 것입니다.”
그 단호한 분위기에, 가신들이 감명받은 표정을 했다.
전면적으로 나설 수 없는 그들과 달리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을 등에 업은 르나르가 있으니 다들 안도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르나르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내심 우쭐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이 상황에 대해 믿는 구석이 있었다.
‘퀸시 노하, 그자가 나에게 전한 대로만 하면 된다는 거지.’
그는 공작의 결혼을 반대만 해 주면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노라고 말을 전했었다.
‘이번이 기회다.’
잘만 하면 이 일을 이용해서 젊은 가주를 꺾어버릴 수도 있을 터.
야망에 찬 르나르가 속으로 음험한 웃음을 흘리는 사이, 입장을 알리는 시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에두아르트 공작 각하께서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