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는 잠시 과거 알폰소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찡그리고, 인상을 쓰고, 혹은 자신과 멀어지고 싶어 하는 듯한 알폰소의 표정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무래도 날카롭지 않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대체 왜지?
샤를로트는 상념에 잠겨 의문했으나, 애석하게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굳이 이유를 찾을 것도 없이 맞은편에 앉은 알폰소가 입을 열었으므로.
“어쨌든, 말씀드렸듯 가품을 만들 수만 있다면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에두아르트는 파란을 피해가기 힘들겠지만 대화해 본 바로 알폰소에게 그것은 ‘그리 큰 문제’에 속하지 않았다.
문제의 기준이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샤를로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지점에서 막힘이 없네요, 당신.”
“그건 칭찬입니까?”
“감상이에요. 난 당신이 무조건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원칙주의자가 아닙니다. 원칙에도 허점은 무수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원칙만 따르는 것은 길이 있다고 눈을 감고 가는 행위와 진배없습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당신에게서 들으니 낯설군요.”
샤를로트가 손끝에 관자놀이를 괴며 느리게 눈을 내리감았다.
사실 낯선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알폰소를 이렇게 몰랐던 건지.’
아니면 우리의 관계가 과거와 같지 않기에 이런 대화가 가능한 건지.
분명 알폰소에 대해 적지 않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화를 나눌 때마다 눈앞의 남자가 낯설게 느껴지는 생경함은 언제쯤 사라질까.
샤를로트는 상념을 거두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당신 말대로 이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지금은 가품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다른 장인을 구할 수 있겠어요?”
“그 반지는 세공과 조형이 몹시 까다로워, 제작을 받아들인 업체는 라베루즈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불가능하다는 뜻이죠? 난감하네요.”
하긴, 그랬으니 과거에도 다른 수를 쓰지 못하고 숙청까지 갔던 거겠지.
이제 과거의 상황은 얼추 이해가 됐다.
‘요약하자면 모든 오해가 전부 반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지.’
알폰소가 아델린, 정확히 말하자면 라베루즈에 소실된 공작부인의 반지를 제작해 달라고 의뢰하면서 오해가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알폰소와 아델린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고.’
두 사람이 그토록 비밀스럽게, 그리고 자주 만나온 건 반지 제작 때문이었으리라.
아델린이 알폰소의 죽음 이후 반지를 두고 간 것 역시 그게 그녀의 가문이 맡았던 의뢰이기 때문이었을 테고.
‘물론 반지에 대해 자세히 알았더라면 이런 오해는 하지 않았겠지만.’
알폰소는 가장 가까운 가신들에게조차 반지에 얽힌 내막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반지가 제작된 이후에 샤를로트에게 말해줄 생각이었으리라.
무엇보다 당시 샤를로트가 에두아르트의 일에는 관심도 없었고, 권리를 행사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던 탓에 기밀이 지켜진 것도 있었다.
모든 의문이 해소되자 뒤늦게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생각할수록 민망하네.’
그리고,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았다.
알폰소를 아델린과 이어주려는 계획이 허사가 되었으니 곤란해야 맞을 텐데.
‘고작 알폰소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렇게 안도감이 들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지.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쏟아졌다.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알폰소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방법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불안감이 들었다.
그가 아델린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문득 기뻤다가도, 오해에 대한 후회가 눈꺼풀을 무겁게 했다.
‘이번에는 과거의 전철을 밟게 둘 수 없어.’
알폰소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면 우선 근심거리부터 없애야 하는 게 인지상정.
“그럼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좀 정리해 보죠. 우선 베호닉에서 반지를 가져와야 하고. 또 뭐가 있죠?”
“그밖에 다른 게 있습니까?”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근심거리란 근심거리는 아주 철저하게 없애주지.
당신이 행복하지 않고 배길 수 없도록 말이야.
샤를로트의 녹색 눈이 자애로운 열정으로 반짝였다.
“알폰소, 마음속에 있는 걱정거리를 전부 마음 편히 털어놔 봐요. 아주 티끌만 한 거라도 전부.”
그에 알폰소는 잠시 침묵으로 일관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기꾼 같은 대사라는 당신의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샤를로트가 유능한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 알폰소였다.
* * *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에두아르트의 지고한 주인은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의복을 정제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상념의 주인은 명료했다.
‘샤를로트 노하.’
그의 머릿속에서, 몇 시간 전 나누었던 대화가 재생되었다.
“반지의 일 외에는 별다른 걱정거리가 없다고요, 알폰소?”
샤를로트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알폰소는 그녀의 질문에 별다른 대답을 내어놓을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무언가를 걱정거리라고 여겨 본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알폰소는 그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무딘 구석이 있었고, 특히나 본인의 일에는 더욱 그러했다.
알폰소라는 해답지를 놓고 문제를 풀려고 했던 샤를로트에게는 심히 애석하게도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리 없어요. 하다못해 옷을 고르는 것조차 고민이 되지 않나요?”
“그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어 대답이 어렵습니다. 제 옷은 늘 집사가 준비해 주기 때문에, 직접 골라본 적이 없습니다.”
그에 샤를로트는 조금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쩐지 늘 고리타분하게만 입더라니…….”라고 중얼거린 것 같기도 했다.
“알폰소, 금전적인 문제로 고민해 본 건 없나요? 갖고 싶은 게 있다거나, 이루고 싶은 게 있다거나!”
“에두아르트의 자산은 적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게 하나 정돈 있을 거 아니에요?”
“글쎄. 가늠이 되지 않는 걸 보니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가지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전무.
알폰소와의 대화 끝에 샤를로트는 뭔가를 깨달았다.
“알폰소 당신…….”
“말씀하십시오.”
“재수가 없을 만큼 정말 모든 걸 가졌군요.”
알폰소가 행복하게 만들기 가장 어려운 유형의 인간이라는 것을.
불행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는 쉽다.
불행의 요소를 없애고, 결핍을 채워 주면 되니까.
하지만 모든 걸 가진 인간이라면, 그러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한 목표의 난도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이다.
“하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네요. 에두아르트의 독자로 태어나서 모자람 없이 자랐을 테고. 어릴 때부터 검술에 두각을 드러냈다고 했죠? 배움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없다고 했고.”
“그건 오해입니다. 라살의 해석에 입각한 발리에르 이론을 배울 때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른 데서 그런 얘기 하지 말아요. 더 재수 없다는 소리만 들을 테니까.”
발리에르 이론, 그것도 라살의 견해까지 덧붙인다면 아카데미에서도 최고학력자들이나 배우는 고등 교육에 속한다.
어려움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으리라.
“속을 썩일 만한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주변 인간관계도 나쁠 것 없네요. 그 에두아르트 공작이니 평판 좋고, 시끄러운 교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현 황제 폐하나 소피아 황녀님과도 큰 문제 없이 사이좋으니 가족 관계도-”
“그만하면 됐습니다.”
잠자코 ‘알폰소 리누스 에두아르트’에 대한 평을 듣고 있던 알폰소가 샤를로트의 말을 잘랐다.
“당신도 질문을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이제 내가 질문해도 그리 억울하게 느껴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을 뱉은 뒤 들고 있는 두 가지 질문의 무게를 재어 보았다.
그리고 조금 가벼운 것을 먼저 꺼내들었다.
“반지의 정체는 어떻게 알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