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걸었느냐니.
이런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던 탓에, 샤를로트는 잠시 말문이 막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알폰소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고자 한다면 이 대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또한, 어쭙잖은 거짓말도 통하지 않으리라.
“……그래요. 당신에게 내 무언가를 걸긴 했어요.”
샤를로트는 결국 진실의 그림자를 꺼내들었다.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지만, 내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하다는 것만 알려줄게요.”
그녀의 말에 알폰소는 잠시 샤를로트를 응시했다.
샤를로트의 말이 진실인지 가늠해 보듯.
“그렇다면 당신이 승리하는 조건은 뭡니까.”
“당신이 행복해지는 거예요. 믿는 건 당신 자유지만.”
“확실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여전히 별로 이해도 되지 않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이 말을 믿겠어.’
바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지식하지 않고서야…….
“믿겠습니다.”
샤를로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바보군요, 당신.”
“좋을 대로 부르십시오. 대신 하나 묻겠습니다.”
“뭐죠?”
“그 내기라는 게, 당신이 사랑하는 이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가늘어졌던 샤를로트의 눈이 도로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죠?”
“짐작이었습니다. 당신은 사랑에만큼은 진심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거라면 아마도 사랑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지만.’
이만하면 가장 중요한 대답은 들은 셈이다.
알폰소는 책상으로 걸어가, 첫 번째 서랍을 열며 말했다.
“샤를로트, 당신은 반드시 그 내기에 이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내가 물어본 것들을 좀-”
“내기에 이겨야 한다면, 당신이 직접 나서십시오.”
팔락.
종이 한 장이 샤를로트의 앞에 놓였다.
가장 위에 큰 글씨로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결혼 계약서]
샤를로트의 낯이 미미하게 굳어들고, 알폰소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 한 말을 오래 고민해 보았습니다. 행복해질 결혼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하는 결혼을.”
“……그 결과가, 이건가요?”
“당신에게 청혼한 이래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습니다. 나는 당신과의 결혼을 원합니다.”
“도저히…… 도저히 모르겠네요. 오래 고민해 봤다면서요. 나와 결혼하는 게 정말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행복하길 바란 적도 없고.”
“그런데 왜-”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과의 결혼을 바란다고. 내가 원하는 건 그뿐입니다. 내 행복을 바라는 건 당신 입장이고.”
그러니 원하는 걸 얻고 싶다면 직접 나서라는 뜻이다.
알폰소의 말을 이해한 샤를로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야.’
알폰소에게 결혼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당장 필요한 일이었다.
가신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에두아르트의 내정을 다졌다는 허울이라도 필요한 상황이니까.
하지만 마지막 후보였던 아델린마저 결혼에서 논외가 된 지금, 알폰소와 결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샤를로트뿐이었다.
‘그러니 만에 하나 알폰소와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선택의 기로에 놓이자 숨이 막혔다.
‘내가 또 알폰소를 죽이는 건 아닐까.’
알폰소의 아내가 되는 게 정말 옳은 일일까?
내가…… 정말 알폰소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샤를로트가 주저하느라 차마 입을 열지 못하자, 알폰소가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것을 걸었다더니. 원하는 걸 얻을 자신이 없는 겁니까?”
우습게도 도발과도 같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은 할 수 있을지를 물을 때가 아니었다.
무조건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누, 누가 자신이 없대요?”
샤를로트가 바싹 마른 입을 열어 뾰족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알폰소가 희미하게 웃은 것 같기도 했다.
확신할 길은 없었다.
알폰소가 곧장 계약서와 펜을 그녀의 앞으로 밀어 주었으므로.
“그렇다면 이 계약서에 서명하십시오. 보다시피 별다른 내용은 없으니 계약 사기를 당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에두아르트의 이름으로 보증하겠습니다.”
알폰소의 말마따나 종이에 적힌 조항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간을 1년으로 한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일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조항과 해당 계약서의 비밀 유지 조항.
그리고 샤를로트가 알폰소의 일을 돕는 대가로 1년 뒤 파혼 시에 거액의 위자료와 에두아르트의 비호를 받는다는 것까지.
하지만 보증이 없어도, 설령 알폰소가 사기를 친다고 하더라도 샤를로트는 계약서에 서명했을 것이다.
덧붙는 사족에 샤를로트가 픽 웃었다.
“정말 사기꾼 같은 대사군요.”
“사기꾼을 만나본 적이 없어 비교해 볼 수 없으니 유감입니다.”
“눈앞에 있는데 멀리 갈 것까지야.”
샤를로트는 사뭇 자조적으로 내뱉고는, 웃음기 없이 말을 이었다.
“하나만 확실히 해줘요. 내가 당신과 결혼하면 내가 묻는 모든 걸 말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든 협상은 끝났다.
샤를로트는 펜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장갑을 낀 데다,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펜이 번번이 미끄러졌다.
떨리는 손끝을 본 샤를로트가 인상을 쓰며 장갑을 벗으려던 차에, 마디 하나는 더 큰 알폰소의 손이 샤를로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펜을 쥐여 주며 말했다.
“천천히 하십시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 별것 아닌 말과 손에 얹힌 무게감이 뭐라고 이토록 안도가 되는지.
이럴 때마다 눈앞의 무지한 사내와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알폰소는 결혼 생활 중 단 한 번도 샤를로트를 재촉한 적이 없었으니까.
-에두아르트 공작이 한가한 지위도 아닐 텐데, 연회 끝날 때까지 날 기다릴 시간은 있나 봐요? 바쁠 텐데 괜히 위하는 척 말고 돌아가요. 난 알아서 돌아갈 테니까.
-한가하진 않더라도 아내를 혼자 돌아오게 할 만큼 대단한 일정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함께 연회에 참석하는 날이라도 오면 매번 늦게까지 샤를로트를 기다리기에 그게 습관이라도 되나 했더니.
-알폰소 오빠, 웬일로 엊그제는 늦게까지 있더라? 내 파트너로 연회 갔을 때는 얼굴만 비치고 가 버리더니.
-널 곤란하지 않게 해주는 정도로 내 역할은 다했으니까. 어제는 일이 한가해서 늦게까지 있었다.
-그래? 아까 세르주가 일이 많아서 죽겠다고 거의 울면서 지나가는 걸 본 것 같은데.
-……세르주는 늘 그래. 엄살 심한 놈이니 무시해라.
우연히 알폰소가 소피아와 나누는 대화를 듣지 못했다면, 그리고 일에 파묻혀 가는 세르주를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한동안 알폰소의 말이 가식이라고 굳게 믿었겠지.
모든 기억은 지나면 추억이 된다고 했던가.
떠올리자니 퍽 우습다.
샤를로트는 펜을 들어 계약서 하단에 서명했다.
흔들림 없이 정갈한 필체로 그녀의 이름, ‘샤를로트 노하’가 적히고 그 옆에 알폰소의 서명이 뒤따랐다.
계약은 끝났다.
샤를로트는 제 몫의 계약서를 챙기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줘요.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의 반지에 대해.”
나는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말 테니까.
* * *
모든 문제는 이렇게 시작했다.
몇 달 전, 루드빅이 이러한 안건을 들고 온 것으로부터.
“각하, 루헤르에서 구휼을 요청했습니다.”
“루헤르 주변 영주들에게 연락한 건 어떻게 됐나?”
“대답이 없습니다. 겨울이 끝물이라 먹을 것이 떨어질 시기이니 다들 창고를 열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요. 그렇다고 에두아르트에서 돈을 풀어 구휼하면 다른 휘하 가신들도 손을 벌릴 겁니다.”
“전부를 감당할 수 없다면 시작조차 안 하는 게 낫다는 거군.”
“예. 어떻게 할까요?”
“우선 먹는 입이라도 줄여야지. 에두아르트의 사병을 확대할 때도 되었으니, 가문들에 병력을 소집해 수도로 올리라고 전해라. 루헤르에는 따로 지원금을 전할 방법을 찾고.”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이 시집올 때 지참금으로 들고 온 영지의 영주, 르나르 베호닉이 이에 대놓고 반발한 것이다.
[에두아르트의 내부가 안정되기 전에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모적입니다.]
라는 이유로.
내부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알폰소가 미혼인 데다 후계자도 없어, 가주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내용일 뿐.
실질적인 내용은 따로 있었다.
글자 그대로 에두아르트의 내부에 소실된 것이 있다는 뜻.
그리고 그 소실된 물건이 바로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의 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