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때였더라면 그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본디 타인에게 스스로의 짐에 대해 말하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도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여 브누아는 에두아르트가 처한 상황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소피아 역시 마찬가지.
‘반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모를 테고.’
알폰소 역시 그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에 대해 묘하게 감상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역시 샤를로트 노하가 괜한 소리를 한 탓이리라.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도움을 주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제 행복 따위를 그렇게 진실로 바라고.
그래놓고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떠나 버린 탓이다.
그래, 그뿐이다.
‘쓸데없이 감상적이 됐군.’
알폰소는 눈앞에 없는 이를 마음 편히 탓하며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속으로 아무리 샤를로트를 탓해 봐야 차창 밖을 바라보는 시선이 후련해질 리 없다.
‘……차라리, 처음부터 샤를로트에게 모든 걸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녀와의 결혼이 왜 필요한지, 제가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선대 공작부인의 반지에 대해서도.
하지만 알폰소는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오랜 기간 믿고 따라 온 그의 직속 가신들에게조차 비밀을 지켰을진대.
무얼 믿고 초면이나 다름없는 샤를로트에게 그걸 말할 수 있었겠는가.
가능했더라면 처음부터 샤를로트의 치맛자락을 붙들었겠지만, 알폰소는 침묵과 독선이 익숙한 이였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 그가 짊어져야 할 책임은 타인에게도 귀속된다.
그러니 침묵이 제 목을 조르더라도 입을 열지 못할 수밖에.
‘설령 샤를로트가 반지에 대해 알아채는 상황이 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 리 있나.
감상에 빠졌더니 쓸데없는 가정까지 하는군.
‘어차피 샤를로트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자신이 언제부터 누군가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성정이었다고 이런 나약해빠진 생각을 하는 건지.
라는, 묘하게 떫은 생각과 함께 알폰소는 귀가했다.
“알폰소. 당신 대체 선대 공작부인의 반지에 대해 뭘 숨기고 있는 거죠?”
아델린에게 넘겼던 반지의 의뢰서를 든 샤를로트가 자신을 찾아왔으리라고는 채 생각지도 못한 채로.
* * *
“아델린에게 이 의뢰서를 받았어요. 당신이 어찌나 비밀스럽게 넘겼는지, 차마 사람을 쓰지도 못하고 있더군요.”
샤를로트는 대문에서 이미 인내심이 동났던지, 알폰소와 단둘이 남자마자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아니, 앞뒤 가릴 겨를 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의뢰서에 있는 도안, 이거 당신 어머니의 반지잖아요. 왜 이걸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 거예요? 그것도 이렇게 비밀스럽게? 그리고 르나르 베호닉은 대체 왜 이걸 언급한 거고…….”
의심쩍은 구석이 많은 사람답게 오늘도 샤를로트의 말에는 질문할 것이 많았다.
‘대체 어떻게 이 반지의 정체를 알았지?’
의뢰서를 본 것쯤이야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뢰서만 보고 그 정체를 알아차리다니?
이 반지의 모양에 대해 아는 이는 현재 극소수에 불과했다.
세르주를 비롯한 다른 직속 가신들도 알지 못하고, 기껏해야 브누아 정도나 알고 있을까.
다른 이가 봤더라면 단순히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반지라고 생각했으리라.
게다가.
‘에두아르트 공작저를 나서는 순간부터 타인이라고 하더니.’
이제부터 너와 나는 남남이라고 호기롭게 선언하고 나선 사람이, 이렇게 발을 구르면서 찾아와?
“심지어 당신 아델린이랑 혼사를 진행하고 있지도 않았다면서요? 그럼 결혼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제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알폰소!”
샤를로트는 이것저것 말을 와르르 쏟아놓고는 결국 제풀에 못 이겨 발을 동동 구르다 알폰소를 붙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폰소는 무표정으로 일관할 뿐.
그는 샤를로트가 긴박하게 내뱉는 일들이 조금도 다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보여주는 이 일련의 행동들이 우스운 촌극으로 느껴졌다고 하면.
‘당신은 화를 낼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그에게는 이 상황이 지나치게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을.
가족 같다는 이도 제 일에 발을 구르지 않고, 아무도 그의 속내에 이토록 깊게 들어오려 하지 않는데.
정작 알폰소 본인조차 제 일을 타성으로 취급하는데.
오직 그녀만이 알폰소가 숨기고자 했던 것을 멋대로 알아내 발을 굴러댄다.
고작 내가 뭐라고?
“……샤를로트.”
“그래요, 말해봐요!”
“혹시 내가 아델린 라베루즈와 결혼한다는 것에 돈을 걸었습니까? 적지 않은 액수로. 아니면 질 수 없는 상대와 내기를 했다거나.”
“……뭐라고요?”
“내가 알아본 바로 당신은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일에 이토록 열을 올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잠깐. 나를 알아봤다고요?”
샤를로트가 눈을 크게 떴지만, 알폰소의 표정은 여전했다.
“내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청혼했으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그건 아마 아니겠지만…….”
“내가 당신에 대해 내린 평가를 기억합니까? 교활하고, 뻔뻔하고.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데에 주저가 없고-”
“도덕적 관념도 희박해 보인다는 거, 그래요.”
샤를로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하자 알폰소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것은 내 비약이 아니라, 당신의 행적이 말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타인에게 어떠한 존중도 관심도 없는 인간.”
그래. 분명 그게 샤를로트 노하였다.
물론 지금은 약간 평가가 수정되기는 했다.
적어도 약간의 존중과 책임감은 존재한다는 내용으로.
하지만 그것이, 샤를로트가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인 알폰소의 문제로 발을 동동 구른다는 얘기가 되지는 않는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간의 눈이 잘못된 겁니까? 당신은 원래 이렇게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당신이 사교계에 데뷔한 이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겁니까?”
“세간이 보는 게 맞겠죠.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예요?”
“당신이 내게 이토록 신경을 쓰는 이유를 알고자 함입니다.”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던 것은 샤를로트였다.
그게 얼마나 지났다고, 그녀는 제가 숨기고자 했던 것을 쥐고 나타나 발을 동동 구른다.
‘대체 내가 그녀의 무엇이기에.’
샤를로트는 알까.
지금 이 순간 제가 바늘에 찔린 공이라도 된 양 웃음을 흘리고 싶다는 것을.
샤를로트가 뱉는 말에 가득한 의문을 추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낯에 가득 담긴 염려와 불안이 제 숨통을 틔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샤를로트가 자신의 침묵을 허물었다는 것이 그저 달갑게 느껴져서.
이 기분은 처음이 아니다.
-당신 아델린 양과 결혼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이렇게 면전에서 얘기해 버렸으니 아델린 양과 혼담을 진행하긴 어려워졌잖아요!
-당신이 원하는 결혼을 해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결혼을.
-결혼하고, 사랑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살아요.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이 행복하게.
그녀와의 대화는 늘 이 지점을 지나곤 했다.
폐부를 틀어막는 온기.
이 낯설고 따뜻한 감각.
이러니 선을 긋는 샤를로트의 말에 반발심이 들 수밖에.
제 일에 목이라도 맬 것처럼 굴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발을 물리는데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을 리 없다.
‘차라리 당신이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더라면.’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미소를 보이고,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었더라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온정을 베풀 줄 아는 아델린 라베루즈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당신이 비는 행복을 대단치 않게 받아들였을 텐데.
의문을 품지도, 곱씹어 보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이 이럴 만한 이유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내게 뭔가를 걸었거나.”
아니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거나.
덧붙인 말에 샤를로트의 낯이 굳어들었지만, 알폰소는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후자일 리 없지.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죠.”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
알폰소는 염세적인 표정으로 낯을 느리게 쓸어 올렸다.
“그럼 말씀해 보십시오. 대체 뭘 걸었기에 내게 이러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