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리누스 에두아르트.
그는 황제 브누아를 알현하러 황궁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알폰소보다 선명한 푸른빛이 도는 은발의 소유자인 브누아는 알폰소에 비해 선이 가늘고 오만한 인상을 가진 청년이었다.
특히나 권위적이면서도 무기질적인 낯이, 멀리서 보기에도 그가 적잖이 높은 지위에 올라 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가까운 신하이자 하나뿐인 사촌을 대할 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데솔리에가 건국제에서 짐에게 라베흐느의 유산을 바치기로 했다, 공작. 네게 입은 은혜를 짐에게 돌리겠다더군.”
“데솔리에는 과거부터 주느비에브 황가에 충성해 온 곳입니다. 그들이 제국에 속함으로써 마땅히 영광을 돌려야 할 곳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폰소의 말에 브누아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입에 발린 말은 됐다. 공치사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짐이 아니라 너겠지. 과한 겸손 떨지 마라. 황궁에 누워 있다가 라베흐느의 유산을 차지하게 된 짐을 모욕하고자 함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뜻은 없었습니다. 혹 불충하게 느끼셨다면,”
“불충은 무슨. 불민하게는 느꼈다. 간만에 봤더니 영 얼이 빠져서는. 칭찬하러 불렀더니 탓하게만 생겼군.”
브누아의 말에 알폰소가 반문했다.
“데솔리에의 일로 물으시려던 게 아니었습니까?”
“칭찬도 겸해서였지. 이번 일로 얻은 게 적지 않으니.”
데솔리에는 엄밀히 말하자면 황제에게 충성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베흐느의 유산을 제 손으로 바친다는 것은 그런 중립적인 태도를 버리고 황제의 편으로 돌아서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는 일.
게다가 건국제에서 라베흐느의 유산을 제 손으로 바치기까지 하겠다니, 그야말로 뜻밖의 수확이었다.
브누아는 진심으로 이 일을 기꺼워했다.
단 하나.
“공작, 샤를로트 노하와 무슨 관계인 거냐.”
데솔리에의 일에 노하가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알폰소는 대답 대신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아시는 것이 전부입니다.”
“세간에 알려진 것은 노하가 네게 청혼장을 던졌다가 걷어차였다는 사실이지.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소피아가 네가 샤를로트 노하와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을 때 짐은 믿지 않았다.”
그랬더니 데솔리에에서 불쑥 샤를로트 노하의 이름이 튀어나오더군.
브누아가 퍽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짐이 노하를 숙청할 생각이라는 걸 네가 모를 리 없는데도 말이다.”
“……샤를로트 노하와 잠시 뜻이 맞아 도움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연관은 없습니다. 또한 샤를로트 본인이 제 청혼을 거절했으니,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알폰소의 설명에 브누아의 눈동자가 둥글어졌다.
“샤를로트 노하가 청혼을 거절했다고?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알폰소는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내 행복을 바라서 거절했다는 이상한 대답을 할 수는 없으니.’
이게 최선이었다.
다행히 브누아는 깊게 캐물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더 문제 될 것도 없을 텐데, 왜 여태 결혼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거냐?”
“당시 구했던 혼처 중 마지막이 라베루즈였습니다만, 라베루즈 측에서 거절했습니다.”
“아주 사방에서 걷어차이고 다니는군. 거긴 또 왜?”
“혼약이 내정되어 있던 상대가 복무를 마치고 귀환한 관계로, 그쪽과 혼약을 진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권하지도 못하겠군. 짐이 보기엔 라베루즈가 딱 괜찮던데. 이렇게 되면 시간도 모자라니 새로 구할 수도 없겠고.”
아쉽다며 혀를 찬 브누아가 불쑥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을 튕겼다.
“아니면, 신전은 무시하고 짐이 공작의 결혼 보증을 서 주는 건 어떤가?”
“굳이 신전의 반발을 사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쯧, 지겹군. 빌어먹을 신전.”
브누아가 진심으로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을 짓씹으며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그놈들을 쓸어버려야 짐도 너도 발 뻗고 잘 텐데 말이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자라 보니 행복이라는 글자와 가까워지는 일이 퍽 요원하게 느껴진다.”
“……예.”
알폰소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행복.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던 까닭이다.
-알폰소, 나는 당신의 행복을 바라요.
늘 고요하던 뇌리에 파문을 일으키는 목소리.
마지막으로 보았던 샤를로트의 모습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럼 이제 우리 사이에 남은 일은 없는 거죠? 잘 지내요, 알폰소. 행복하게.”
또다시 행복을 얘기하는 샤를로트의 말에, 알폰소는 눈썹을 슬쩍 치켜세웠다.
“당신의 작별인사에는 늘 행복이 붙는 것 같습니다.”
“그야,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니까요. 결혼하고, 사랑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살아요.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이 행복하게.”
그 말이 왜 그리 멀게 느껴졌을까.
그 바람에 알폰소는 저도 모르게 불쑥 묻고 말았다.
“그럼 당신은?”
“나 말인가요?”
“예. 당신은 늘 나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반발심이라고 해도 좋을 감정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지낼 생각입니까?”
“당연한 걸 묻네요? 나도 잘 지낼 거예요. 분명 당신이 행복한 만큼 행복하겠죠.”
“그 말은, 이후에도 왕래하리라는 이야기입니까?”
“풍문에 소식 정도는 듣겠죠. 에두아르트 공작이 결혼했다더라.”
에두아르트 정도면 신문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지 않겠느냐며 샤를로트는 대답했다.
타인의 일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알폰소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왜 당신이 직접 듣지 않고 바람결에 소식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겁니까?”
“그야, 나와 당신은 연관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 대답을 듣자 뭔가 비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 교류가 있었는데 당신과 내가 정말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연관이 없어야죠. 당신은 에두아르트고 나는 노하인데. 친해 보여서 좋을 게 있나요? 이 저택을 나서는 순간부터 당신과 나는 남인 거예요. 당신도 그걸 바라지 않았나요?”
“내가 언제 그걸 바랐습니까?”
“내가 싫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샤를로트의 낯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화가 났다거나, 질책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일로 탓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당신도 날 싫어하니 굳이 더 상종할 이유도 없지 않겠느냐는 거죠.”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알폰소는 숨을 쥐어짜내듯 말했다.
그제야 샤를로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는 건 고마워요.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나를 금세 잊겠죠.”
딱 그 정도 관계였으니까요.
“행복하길 바라요.”
샤를로트는 그렇게 떠났다.
끝까지 기묘하기 짝이 없는 작별인사.
‘대체 그 여자가 뭐라고.’
어째서 그 이후로 샤를로트의 낯이 지워지질 않는 건지.
왜 자꾸만 그 목소리가 떠오르는 건지.
알폰소는 아무래도 그것이 끝내 결혼이 실패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결국 라베루즈에까지 거절당했으니.’
당분간은 가신들의 일로 골치를 썩여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모두의 앞에서 반지를 언급하기까지 한 걸 보면…….’
르나르 베호닉, 그가 적잖이 벼르고 온 모양인 것 같으니.
벌써부터 지끈거리는 머리를 안고 알폰소는 알현을 마쳤다.
그 뒤로 브누아와 나눈 대화는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소피아를 결혼시키려는데 혹 만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이나, 선대 공작부인에 대한 이야기들.
“네 결혼 얘기를 하다 보니 선대 공작부인이 생각이 나는군. 참 좋은 분이셨는데 말이다. 소피아가 어릴 때 공작부인이 어머니가 되어 주면 안 되냐고 떼를 썼는데……. 가끔은 함께 에두아르트에서 지냈던 어릴 때가 그리워.”
브누아와 소피아의 어머니, 선대 황후는 몸이 약해 일찍 세상을 떴다.
황후를 대신해 황가의 아이들을 키워준 것은 황제와 가까웠던 에두아르트.
어린 시절 함께 자란 기억은 알폰소가 주느비에브 황가의 남매와 가족 같은 관계를 맺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가족 같은 관계라.’
결국은 가족이 될 수 없다는 뜻이겠지.
굳이 묻지 않아도 답은 명확했다.
브누아는 줄곧 소피아의 결혼에 대해 늘어놓았으나 알폰소가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사실에는 유감 한마디를 표한 것이 전부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