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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39화 (41/122)

불쑥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샤를로트가 알폰소를 짝사랑하기 전의 일.

-샤를로트, 당신이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당신을 존중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하는 알폰소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경멸스러워 보이기도, 혹은 착잡해 보이기도 한 표정.

그것이 왜 지금 떠올랐을까.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퀸시가 과거의 내 모습이니까.’

그 누구도 존중하지 않고 본인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그러했다.

퀸시는 샤를로트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말로 그녀를 위했더라면 이런 짓을 독단으로 저지르지는 못했을 터.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전부 널 위해서란다, 샤를로트.

-이건 너를 위한 일이야.

알폰소의 죽음 앞에서도 들었던, 세뇌와도 같은 이 말.

숨이 턱턱 막히는 일을 겪어도, 당장 제 목을 조르고 싶을 만큼 참담해져도.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퀸시의 말에 샤를로트는 늘 수긍해 왔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전부 퀸시의 독단이었을 뿐.

샤를로트에 대한 존중은 조금도 없었다.

이제야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담하고 유쾌한 이 모순된 심정으로.

샤를로트는 차게 웃으며 말했다.

“퀸시, 너 실수했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데솔리에까지 갔다는 걸 알면서도 배우는 게 없네. 내가 거길 왜 갔겠어, 퀸시.”

단순히 알폰소와 결혼하지 않으려는 게 목적이었더라면 거기까지 가지도 않았으리라.

샤를로트의 최우선은 알폰소의 행복이었고, 안위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퀸시에게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나, 에두아르트 공작을 사랑하게 됐어.”

“……뭐?”

퀸시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단박에 사라지고, 낯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샤를로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굳이 그녀의 뛰어난 연기력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진심을, 한 치의 절제도 없이 말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야.”

그게 설령 노하를 등지는 일이더라도.

나 자신을 죽여야 하는 일이더라도.

“그게 정말로 누군가를 위하는 일이겠지. 너처럼 날 위한다는 번지르르한 말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안 그래?”

샤를로트는 웃음기 없이 말을 마치곤, 몸을 돌렸다.

아마 이제 다시 이 저택에 발 들이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보다 이르게 떠나게 됐지만.’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상관은 없다.

정문을 나설 즈음 뒤에서 “샤를! 샤를로트!”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샤를로트는 돌아보는 대신 근처의 인력거에 올랐다.

“마차 대여소로 가 주세요. 참, 근처에 꽃을 파는 가게가 있나요?”

“예에, 있습니다. 그리로 가 드릴까요?”

“잠깐만 들렀으면 좋겠네요.”

병문안을 빈손으로 갈 수는 없을 테니까.

* * *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꽃향기가 너무 좋네요.”

“당연한 일이니 그런 말 말아요. 꽃이 마음에 든다니 기쁘군요.”

샤를로트의 말에 아델린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차를 달려 저녁에서야 겨우 도착한 이곳은 드베인의 라베루즈 사저.

오늘 오후 무렵 정신을 차렸다는 아델린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이맘때쯤이면 크게 앓긴 했지만, 올해는 조금 심하네요.”

“……지병인가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이 있어서요. 몸이 늘 이러니 야외 활동은 아무래도 잘 못 하는 편이에요.”

독을 먹은 것치고 아델린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죽지 않고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만 독을 먹였다더니, 아무래도 마비 계통인 것 같았다.

아마도 아델린이 타고난 병으로 독을 위장하려는 속셈이었으리라.

‘그나마 다행이네.’

어딘가를 불구로 만든다거나, 신경을 파괴하는 독을 쓰기라도 했으면 가져온 해독제가 듣지 않았을 텐데.

퀸시의 평상시 손속을 생각한다면 정말로 너그러운 처사였다.

그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샤를로트는 가져온 해독제를 내려놓았다.

“이건 내가 먹는 영양제인데, 효과가 좋아서 가져왔어요. 마셔요.”

“영양제라니…… 귀한 물건은 아닌가요?”

“내겐 많으니 사양 말아요. 자, 지금 마셔요.”

“아…….”

아델린은 다소 강경한 샤를로트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지만, 큰 의심 없이 해독제를 마셨다.

그리고는 멋쩍게 웃었다.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미안함의 표시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아, 신분을 속인 것 말씀이시죠? 샤를로트.”

아델린이 나직이 후후 웃었다. 조금 짓궂은 웃음이었다.

샤를로트가 없는 동안 알폰소는 정말 가감 없이 아델린에게 상황을 전달해 두었다.

샤를로트가 누군지, 그리고 알폰소와는 무슨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지금은 그를 돕기 위해 떠나 있느라 직접 사과를 전할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도.

문제는.

‘대체 뭘 어떻게 설명했는지…….’

알폰소의 얘기만 나오면 저렇게 웃는단 말이지.

“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해하니까 샤를로트야말로 너무 미안해하지 말아요.”

“……정말 이해하는 것 맞죠?”

“그럼요. 혼담이 오가는 상대에게는 아무래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게다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샤를로트는 오해를 정정해줄까 하다가, 상황이 더 이상해지기만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왜 ‘릴리’라는 가명을 썼느냐고 추궁해 오기라도 한다면 설명할 말이 궁핍해지는 것은 분명 샤를로트 쪽이었으니까.

적당히 수긍하고 넘어가는 게 낫겠지.

“어, 어쨌든. 그보다 아델린. 곤란하진 않나요? 건강이 이러면 혼담을 진행하기는 어려울 텐데.”

“음, 그렇긴 하죠. 아버지께서 이번 기회에 저를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는데, 조금 곤란해졌어요. 벌써 아버지를 통해서 소개까지 받았는데.”

“소개를 받았다고요?”

표현이 조금 의아해서, 샤를로트는 눈을 깜빡였다.

물론 부모를 통해 결혼 상대를 소개받는 건 그리 의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옆에 계신 분은 함께 오셨다던 분이신가요?

-이분은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이신데, 아버지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분명 드베인의 호수에서 알폰소와 함께 있는 아델린을 만났을 때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었나?

샤를로트는 의문했지만, 금세 상념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아델린이 풀 죽은 채로 말을 이었던 것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분명 다시 혼담을 꺼내기는 어렵겠죠. 조금 부끄럽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에 든 분은 처음이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데…….”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거예요. 분명. 상대 분도 아델린을 원할 테니까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렇잖아도 그분이 곧 병문안을 오기로 하셨어요. 소개해드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소개를…… 해준다고요?”

알폰소랑 내가 구면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던 게 아니었나?

‘아니, 그보다 이 자리에 알폰소가 온다고?’

괜히 여기 있다가 오해를 사는 건 아닐까?

마음이 급해진 샤를로트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럼 이만-”

“레이디 라베루즈.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등 뒤에서 과묵한 목소리와 함께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낭패감에 샤를로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여기서 또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샤를로트가 서둘러 괜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아, 에브뢰 경! 어서 와요.”

“전부 설명할게요, 알폰…… 네?”

에브뢰 경?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샤를로트가 시선을 들었다.

눈앞에는 남색 머리칼을 가진,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귀족 남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먼저 온 손님이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걱정 말아요. 당신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아델린은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남자를 끌어 오더니, 소개했다.

“샤를로트, 이쪽은 리암 에브뢰 경이에요. 방금 말씀드린, 아버지를 통해서 소개받았다는 분이요.”

“처음 뵙겠습니다. 리암 에브뢰입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십시오.”

리암이 허리를 꾸벅 숙여 깍듯이 인사하고, 자신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나가 있겠다며 자리를 떴다.

꼭 알폰소를 연상시키는 그 반듯한 행동에, 샤를로트는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에브뢰, 경이라고요? 에두아르트 공작이 아니라?”

“네? 에두아르트 공작 각하는 왜요?”

“그야…… 에두아르트 공작과 혼담이 오가던 게 아니었어요?”

샤를로트의 말에 아델린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무, 무슨 오해를 하시는 거예요? 각하께서 청혼한 건 샤를로트잖아요!”

“아니, 물론 청혼을 하긴 했지만…….”

그건 계약 제안에 더 가까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샤를로트가 그 제안을 거절한 지금은 썩 유효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그간 에두아르트와 라베루즈 사이에 사람이 계속 오갔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당연히…….”

당연히 혼담을 진행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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