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알폰소의 부고를 들은 아델린이 찾아온 일이 있기는 했다.
“제발요! 부인! 반드시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요! 제발 시간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라면 듣지 않겠어요.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은 나도 알고 있으니, 더 소란 피우지 말고 돌아가세요.”
하지만 샤를로트는 아델린과 조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아델린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자신에게 힐난이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까닭이다.
완고한 샤를로트의 거절에 아델린은 조금 아연한 표정을 했다.
“이미, 알고 계시다고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니, 안도한 표정에 가까웠을까.
아델린 역시 알폰소의 죽음으로 인해 낯이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던 터라, 확신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녀는 더 이상 시간을 청하지 않고 작은 함을 하나 두고 갔다.
“에두아르트의 물건이니…… 두고 갈게요.”
라는 말과 함께.
함에 들어 있는 것은 굳이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 반지였지.’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의 반지.
회상을 마친 샤를로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간만에 관련한 기억들을 떠올리려니 속이 역하고 머리가 아팠다.
다른 때였더라면 서둘러 뇌리 저편으로 밀어버리려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는 게 딜레마였다.
‘분명 반지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봐도 감이 잡히질 않으니.
하지만 샤를로트에게는 고민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마차가 속도를 줄이고 있었으므로.
“도착했습니다. 내리시면 됩니다.”
머잖아 마차가 멈추고, 열리는 문 너머 정말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호화롭기 그지없는 노하의 저택.
샤를로트가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기다리고 있던 남자 사용인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얼굴은 낯설지 않다. 퀸시의 수족 중 하나다.
그를 알아본 샤를로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도미닉과 퀸시 중 누가 날 먼저 찾을까 싶었더니.
‘역시나.’
도미닉은 모르겠지만, 퀸시는 이미 오래전 이 저택을 본인 수중에 떨어트렸다.
그러니 이 정도는 예상한 결과였다.
아니,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해야 할까.
‘퀸시라면 아무 연막도 없는 내 소재지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의 성격상 샤를로트가 수중을 벗어나는 걸 허락할 리 없으니, 그녀가 사라진 걸 안 순간 당장 들이닥치지 않으면 다행인 셈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면 퀸시치고도 오래 참아준 셈이다.
“퀸시는 안에 있나?”
“예. 아가씨께서 돌아오시거든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가봐야지.”
샤를로트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 * *
아니나 다를까.
퀸시는 굉장히 심기가 언짢은 표정이었다.
낯을 굳히고 있다거나, 인상을 쓴 것은 아니었다.
퀸시는 샤를로트를 볼 때면 언제나 미소를 걸고 있었으니까.
“이제야 얼굴을 좀 보겠구나, 샤를로트.”
하지만 입술이 웃고 있다 하여 그 낯의 기색을 읽지 못할 샤를로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샤를로트가 눈치를 보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지만.
“간만이네, 퀸시. 집에는 별일 없었어?”
“내가 있는데 별일이 있었겠니? 없었다. 네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느라 애를 먹긴 했다만.”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저지른 일이잖아, 퀸시.”
샤를로트의 차가운 대꾸에 퀸시의 낯에 미소가 희미해졌다.
“지금, 뭐라고?”
“에두아르트의 프레시오를 훔쳐갔다면서. 그 일을 수습하느라 데솔리에에 다녀온 거야. 아버지가 뜬금없이 그랬을 리 없으니 오빠가 그랬겠지. 아냐?”
“증거가 없다면 심증만으로 추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때로는 심증이 어떤 증거보다 강력한 효력을 발휘한다는 건 오빠의 말이었지.”
“그럼 내게 프레시오를 되돌려 달라고 하지 그랬니?”
“그렇게 말하면, 되돌려 줄 생각이 있긴 했고?”
“당연하지. 네 부탁인데.”
퀸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치 철부지 아이를 달래는 인내심 깊은 보호자처럼.
가까이 다가온 퀸시가 샤를로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언제나 너를 위해 행동한다는 걸 알아다오, 샤를.”
다정한 기만의 속삭임.
“네가 데솔리에에서 저지른 일로 아버지께서 적잖이 화가 나셨다. 내가 한 발이라도 늦게 사건을 파악했더라면 수습이 힘들 뻔했어.”
사실, 도미닉은 ‘화가 났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조금 모자랄 정도로 분개했다.
눈앞에 샤를로트가 있었더라면 서슴지 않고 후려쳤으리라.
“아버지께는 네가 에두아르트 공작의 환심을 사기 위해 행동하다 일이 꼬였다고 했다. 그나마 네가 데솔리에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으니 다행이었지.”
만약 샤를로트가 노하에서 데솔리에에 물밑작업을 해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샤를로트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일을 진행한 것이었지만.
“이런 일을 할 생각이라면 내게 먼저 연락을 하라고 누차 말하지 않았니. 밖에 나가서는 통 연락도 없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까지 한 데다 갑작스러운 소식까지 들려오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
“……사안이 급해서 연락할 틈이 없었어. 그래서 실비아도 두고 갔잖아.”
“그래, 이해한다. 나도 내 멋대로 에두아르트에 손을 댄 걸 사과하마. 네가 혼사 문제로 고민이 많은 것 같기에 도와주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구나. 다음에는-”
“아니, 다음은 없어.”
샤를로트가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누차 말하지만, 에두아르트에 손대지 마.”
퀸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유는?”
“건드려서 좋을 것 없는 가문이잖아. 우리와는 상극이고. 딱히 건드려서 얻을 것도 없는데.”
“그게 전부니?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이유가 될 만한 게 뭐가 있는데?”
샤를로트와 퀸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대치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내 퀸시가 눈을 휘어 웃었으므로.
“하긴, 네 말이 옳지. 에두아르트는 건드리지 않으마. 앞으로는.”
“……앞으로는?”
“아까도 말했지만, 아버지께는 네가 에두아르트와의 혼사에 열중하고 있다고 말씀드려 두었거든.”
문제는 상황이 그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에두아르트가 근래 라베루즈와 왕래가 잦아 보이더구나. 라베루즈와 혼사를 진행할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겉으로 보기에 상황이 핑계와 썩 어울려 보이지 않으면 당연히 의심을 살 터.
“그래서 손을 좀 썼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에두아르트를 직접 건드린 것도 아니고.”
그러나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아델린 라베루즈에게 독을 먹였다.”
이어진 퀸시의 말은, 샤를로트의 심장을 내려앉게 하기에 충분했으므로.
* * *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퀸시를 이 일에 끌어들인 것?
아니면 데솔리에의 일에 너무 깊게 관여한 것?
‘하지만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퀸시가 없었더라면 도미닉의 눈을 피할 수 없었을 테고, 데솔리에에 참견하지 않았더라면 알폰소는 또다시 근심거리를 잔뜩 떠안았으리라.
물론 퀸시에게 사람을 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오가는 사람이 있다면 퀸시에게 더 빨리 들켰겠지.’
샤를로트는 일부러 노하에서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모든 연락책을 차단해 두었다.
무엇보다 퀸시는 샤를로트의 결혼을 원치 않는 데다, 이득이 없는 일에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샤를로트는 그가 자신을 방해하는 일이 더 생길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아델린에게 직접 해코지하는 방향일 거라고는, 더더욱.
퀸시의 말을 듣는 순간 샤를로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뭐?”
“죽을 정도는 아니고, 당분간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니?”
딱 아파서 한 달 정도 앓아누울 정도.
그래서 알폰소의 혼사를 망쳐 놓을 수 있을 정도.
거슬리는 인간은 죽이는 게 일반적인 노하의 방식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퍽 자비로운 처사였다.
문제는 알폰소에게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샤를로트에게 얘기한 것만 해도 그랬으니 더 따질 필요가 있나.
퀸시라고 그걸 몰랐을 리 없다.
단지 그에게는 그런 사정 따위는 썩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
“에두아르트 공작의 결혼이야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지. 어쨌든 네가 그와 결혼하지만 않으면 될 일 아니니?”
“그래서 아델린 라베루즈에게 독을…… 독을 먹였다고?”
“무엇보다 편리하고 확실한 방법이지.”
태연하게 말하는 퀸시의 얼굴을 보자 뜨거운 화기가 뱃속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참담한 기분에 도저히 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분명 알폰소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시작한 길인데.
‘왜 자꾸만…….’
왜 자꾸만, 자신이 또다시 그의 삶을 망치는 것 같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