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가 샤를로트를 공작부인으로 대우하더라도, 끝내 진짜 아내로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이야기.
하지만 무엇보다 샤를로트의 입맛을 쓰게 만드는 것은 그 반지의 행방이었다.
샤를로트는 아직도 그 반지를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했다.
“아, 이 반지요? 그, 에두아르트 공작 각하께서…….”
애써 말을 얼버무리며 반지를 숨기던 아델린의 멋쩍은 미소.
그녀는 잘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샤를로트는 이미 반지에 박힌 에두아르트의 인장을 똑똑히 본 이후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순진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고.
‘선대 공작부인의 반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었다는 거겠지.’
혹은 억지로 에두아르트 공작부인 자리를 가져간 샤를로트 따위에게는 줄 수 없다는 뜻이거나.
하여 그 반지를 본 순간 샤를로트는 확신했다.
알폰소가 아델린을 사랑하고 있다고.
사실 그 반지가 아니어도 두 사람의 관계를 확신할 만한 일들은 많이 있었다.
알폰소와 아델린은 유난히 둘이 함께, 그리고 비밀스럽게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으니까.
“아무래도 레이디 라베루즈, 각하와 그런 사이신 거겠지?”
“레이디 라베루즈만 방문하시면 꼭 집무실이 있는 층에는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게 하시잖아. 왜 그러시겠어.”
“맞아. 특히 부인께는 알리지 말라고 하시기도 하고…….”
하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샤를로트는 애써 외면했다.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이야기가 있는 거겠지.’
아닐 거야.
알폰소가 바람을 피운다니. 그것도 몰래?
차라리 물고기가 걸어 다닌다는 말을 믿지.
그는 무엇이든 올바르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잖아.
‘하지만…….’
내가 혹시라도 아델린에게 보복할까 걱정해서 숨기고 있는 거라면?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여 샤를로트는 아델린이 에두아르트에 방문한 날, 차를 권하며 넌지시 떠보았다.
“요즘 날도 좋은데, 레이디 라베루즈에게는 좋은 소식이 없나요? 이제 결혼할 때도 됐잖아요.”
그 말에 아델린은 두 뺨을 발그레 붉히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실은 얼마 전에, 교제를 시작했어요.”
“……교제요? 정말 축하해요. 상대는 어떤 사람인가요?”
“과묵하고, 조금은 무심한 면도 있지만 좋은 사람이에요. 무엇보다 정말 올곧은 사람이거든요. 그 마음에 반했어요.”
과묵하고 올곧은 사람.
꼭 알폰소처럼.
“얼마 전에 교제를 시작했다고 했죠?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인가 봐요?”
“알고 지낸 지는 꽤 됐어요. 음…… 3년 정도 됐나? 3년 좀 덜 된 것 같네요.”
샤를로트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3년가량.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어요. 이 사람이 내 짝이구나. 운명은 믿어본 적이 없는데, 신기하죠. 그런데 그 사람도 절 봤을 때 그렇게 느꼈대요.”
“……그래요? 대단한 우연이네요.”
바싹 타들어 가는 샤를로트의 속내는 조금도 모르고, 아델린은 줄곧 연애 얘기를 할 데가 없었다며 근질근질했던 입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 태연한 태도에 오히려 의아해진 것은 샤를로트 쪽이었다.
‘아델린이 만나는 게 알폰소가 맞다면 내 앞에서 이렇게 태연할 수는 없을 텐데.’
하지만 그녀가 묘사하는 인물이 알폰소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운명이란 게 정말 있나 봐요. 사실 전 그이를 단념하려고 했었거든요. 결혼할 뻔도 했었는데, 일이 생겨서 틀어졌지 뭐예요.”
“……!”
“그래서 다시는 엮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잘 이어져서 이렇게 되었네요.”
막상 얘기해 보니 부끄럽다며 멋쩍게 웃는 아델린을 두고, 샤를로트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아델린이 결혼 얘기를 꺼낸 순간 일말 남아 있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날 조롱하는 거야.’
그녀는 알폰소와 교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샤를로트가 꿈에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해 이렇게 뻔뻔하게 구는 거겠지.
일말의 희망마저 박살 나고, 샤를로트는 밀려드는 모멸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샤를로트가 먼저 자리를 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티타임에 불청객이 급히 들어왔으니 말이다.
평소답지 않은 다급한 발소리와 흐트러진 머리칼.
“……샤를로트.”
척 보기에도 평정심을 잃은 듯 보이는 알폰소의 등장에, 그들의 티타임은 금세 파장을 맞이했다.
아델린을 배웅한 뒤 알폰소는 평소답지 않게 먼저 샤를로트에게 말을 걸어 왔다.
“샤를로트, 레이디 라베루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겁니까? 왜 그녀와 티타임을 가진 거고.”
“……내가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말하네요. 차 좀 마신 게 이렇게 추궁을 당해야 하는 일인가요?”
“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레이디 라베루즈는 내 손님입니다.”
“똑바로 말해요. 손님이 아니라 애인, 아니, 정부겠죠!”
그 말에 알폰소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니, 일그러졌다.
마치 지난번 샤를로트가 아델린을 사랑하는지 물었을 때처럼.
그 구겨진 낯이 마치 알폰소의 진심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 화가 났다.
“나한테는 에두아르트의 명예를 생각하라더니, 당신은 대체 뭘 하는 거죠? 내가 하녀들 입을 통해 당신이 아델린과 그런 사이라는 말을 들어야겠어요?”
“하녀들이,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하녀들만 따질 게 아니죠. 온 저택의 사용인들이 떠들고 있어요! 당신이 그토록 줄기차게 아델린을 만나는 건 그녀와 불순한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쾅!
샤를로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큰 소리가 났다.
알폰소가 문을 뜯어 던져 버릴 기세로 열어젖힌 까닭이었다.
“집사!”
“예, 각하!”
“저택 안의 모든 사용인을 해고해라. 또한 본분을 잊고 비밀 유지 조항을 가볍게 여긴 이들은 귀족에 대한 모욕죄로 처분해도 좋다.”
요컨대 함부로 입을 놀린 이들은 혀를 잘라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 살벌한 명령에 도리어 샤를로트가 소스라치게 놀라 알폰소의 어깨를 붙들었다.
“알폰소!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갑자기 해고라니,”
“주인의 일에 함부로 말을 얹는 사용인을 용납할 이유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습니다만.”
“지금 행동이 당신답지 않으니까 그렇죠. 과한 처분이에요.”
“나다운 게 뭐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이곳이 병영이었으면 함부로 입을 놀린 이들을 색출해 군령으로 처분했을 터. 조금도 과하지 않습니다.”
그제야 샤를로트는 눈앞의 남자가 단순히 올곧은 사람이 아니라 고지식한 사람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또한 알폰소의 기사 생활이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는 것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알폰소가 화가 났다는 것만큼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다음에도 그런 말을 하는 이가 있다면 당신의 판단으로 처벌해도 좋습니다.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평소의 그였더라면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여 샤를로트는 참담해졌다.
평소답지 않은 알폰소의 모든 행동이 아델린과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여서.
이미 아델린에게 확인사살이나 다름없는 말을 듣고 온 주제에, 대체 무슨 말이 더 듣고 싶어서 알폰소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
실은 질문에 대한 답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건지.
‘아니라는 말 한 마디만 해줬으면.’
그랬으면 나는 모든 걸 묻었을 텐데.
아델린과 알폰소가 눈앞에서 적나라한 애정행각을 벌이더라도, 눈과 귀가 죄 멀어버린 사람이 되어 기꺼이 기만당해 주었을 텐데.
‘어쭙잖은 사랑의 방해물이 되어 버린 기분이군.’
누군가가 열심히 가꾼 화단에 눈치 없이 뿌리 내려 버린 잡초가 된 것만 같다.
이 끔찍한 박탈감과 소외감.
다른 때였더라면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우려대로 아델린에게 해코지를 했을 것이다.
감히 너 따위가 이딴 소문으로 날 모욕하느냐며 뺨을 후려쳤으리라.
어쩌면 끔찍한 망신을 주어 에두아르트에 두 번 다시 발 들이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뿐이랴? 함부로 입을 놀린 하녀들은 혀가 아니라 목이 잘렸을 테고.
감히 그녀를 힐끔거린 시종들은 전부 눈을 멀게 했을 터다.
그리고는 알폰소를 찾아가서 패악을 부렸겠지.
‘……그게 내가 배운 방법이니까.’
그게 샤를로트가 여태 이 참담한 기분을 해소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배운 대로, 해온 대로 하면 될 일인데.
‘내가 어떻게…….’
그녀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원치 않는 사람을 억지로 결혼하게 만든 것도 샤를로트였고.
결혼 이후 본분에 충실했던 적 없는 사람 또한 샤를로트였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알폰소에게 패악을 부릴 수 있겠는가.
떳떳하지 않은 사랑으로 가장 괴로울 사람은 알폰소일 텐데 말이다.
하여 샤를로트는 아델린의 일과 함께 반지의 행방을 가슴 깊이 묻어 두었다.
다시 꺼낼 이유도 많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샤를로트는 퀸시에게 이혼하겠다는 편지를 썼고.
알폰소는 죽었으니까.